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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하나님이 차려주신 혼인잔치

2015.07.06 05:51

물님 조회 수:6347


삶은 하나님이 차려주신 혼인잔치


                                                                   마가복음 2: 13- 28

복음서에는 예수와 바리새파(바리사이파 또는 바리새인)의 은 갈등관계를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등장하고 있다. 마가복음 역시 다른 복음서에 비하면 그 정도가 약하기는 하지만 예외가 아니다. 바리새파는 예수가 활동하던 시대에 존재했던 유다교의 경건주의 분파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그리스와 로마문화가 융합된 이방문화의 영향을 받아 고유문화와 신앙을 잃을 것을 우려하여 오경(토라 또는 율법)의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준수하는데 철저함을 보였다. 그리하여 유다교 전통을 계승하는 업적을 남겼다. 천사 등의 영적인 존재를 받아들였고 부활을 믿었기 때문에, 영적인 존재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파와 대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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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사이파는 유다전쟁(서기 70년) 이후 유다교를 이끄는 종파가 되었다. 유다전쟁으로 로마제국에 의해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성전은 파괴되었다. 유다왕국이 완전히 패망한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던 유다교는 성전이 없는 종교로 변화되었다. 패망 이후 유다교의 주요한 세 종파였던, 귀족 계급의 사두가이파와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하던 젤롯파, 바리사이파 중에서 바리사이파만이 남게 되었다. 정치적 지배 세력을 지지하던 사두가이파와 무력항쟁을 지지하던 젤롯파는 유다 왕국 패망 이후 존속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바리사이파는 이후 유다교의 주류가 되었고, 회당을 중심으로 하는 유다교를 형성하여 현재 까지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바리새파는 초대 교회와 마찰이 심했다. 바리새파는 유대인 기독교인을 회당과 유대사회에서 축출하고, 추방하였다. 바울사도의 예처럼 기독교 전파와 형성을 유대교의 위험요소로 인지하여 교회를 핍박하였다. 이로 인해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파의 대부분은 반기독교, 반그리스도적 성향을 보이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누가복음서에서 예수에게 "헤롯이 죽이려고 하니까 몸을 숨기셔야 한다."라고 정보를 제공한 사례가 있듯이 모든 바리새인이 예수에게 반대한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예수 당시 바리새인들은 민중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것은 그들이 율법을 구체적인 삶으로 실천하려했고 사람들의 믿음을 깊게 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과 열정이 심화 될수록 일반 대중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율법의 짐을 안겨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예수는 그들의 믿음이 너무나 외형적이고 실적주의에 치우쳐 있으며 율법의 근본 취지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을 지적했다.

 

            단식에 대한 가르침


본문에는 단식에 대한 논쟁이 등장하고 있다. 바리사이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규칙적으로 단식을 했다. (월요일과 목요일, 그리고 정해진 날)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예수는 그들의 단식에 대한 비판에 이렇게 대답하셨다.


"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 혼인잔치 손님들이 단식할 수 있습니까.? " (2:19)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예수는 자신을 신랑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자기 자신에게 주인공 일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아버지의 혼인잔치판으로 인식했다는 뜻이다. 예수에게 세상은 혼인잔치와 같았다. 마가가 기록하는 예수는 금욕주의자가 아니라 잔칫날에 찾아오는 걸인들까지 영접하고 함께 즐기는 신랑과 같은 분이었다. 그에 따라서 바리새인들이 볼 때 평판 나쁘고 상종하기 어려운 인간들과 거침없이 함께하는 분이었다.


" 그 때 바리새파의 율법학자들이 예수께서 평판 나쁜 사람들과 같이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서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 어떻게 당신네 선생은 저런 인간들과 같이 식사를 하는거요? "


예수는 모든 인간을 무차별하게 대하셨다 사람들이 버리고 세상이 버린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였다. 중요한 것은 예수를 만난 사람들의 의식이 깨어나고 가슴은 사랑으로 충만하여 졌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규정한 죄인의 사슬을 벗고 새로운 ‘시작’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율법의 준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체험에 있다. 그 체험이 삶을 변화시킨다. 예수는 자신을 신랑으로 자각했고 아버지의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였다. 그 잔치는 하나님 아버지와 인간이 하나로 만나는 회복의 잔치이다.


혼인잔치는 어린아이 시절이 종식되고 한 존재가 성숙과 완성의 자리로 들어가는 자리이다. 혼인잔치를 통하여 남자와 여자, 나와 너는 하나가 된다. 잔치야말로 금욕과 포기를 넘어서서 일체가 통합되는 자리이다. 진정한 기쁨과 신뢰가 환호하는 자리이다. 우리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오한 사랑을 혼인잔치로 비유한 말씀을 잘 유념할 필요가 있다. 과연 나는 신랑 되신 예수의 혼인잔치를 누리고 있는가? 하나님이 차려주신 인생이라는 이름의 잔치를 모든 이들과 즐기고 있는가?


예수는 바리새파들에게 자신의 죽음으로 제자들이 신랑을 빼앗기게 될 때 단식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 날이 오면 신랑을 잃은 슬픔 때문에 단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을 따라 초대교회는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하면서 십자가를 지나 부활의 길을 가셨던 예수와 하나 되는 영성을 추구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이 두 가지 축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하나는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님과 하나 됨을 이루는 잔치를 누리는 삶과 또 하나는 악한 세력과 대결하는 인내의 힘을 기르는 단식과 같은 영적 수련이다.


예수는 혼인잔치의 비유로 제자들의 태도를 정당화하는 말씀을 주셨다. 그 말씀은 새 가죽부대에 담는 새로운 포도주와 같이 신성했다. 바리새파들은 옛 계명의 잣대를 융통성 없이 그대로 새로운 현실에 들이 대었다. 그것은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규범의 논리였다. 그러나 예수는 대담하고 신선한 관점으로 율법의 본질을 꿰뚫어 말씀하신다. 예수는 유다의 율법적 전통과 제도를 존중하셨지만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예수의 발상은 만물을 늘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데서 나오는 지혜였다.

          

                     안식일의 주인은 인간


바리새파들과의 논쟁은 이어서 안식일 논쟁으로 등장하고 있다. 안식일이란 노예제도가 있던 시대에 인간을 배려하는 은혜로운 날이다. 말 그대로 하던 일을 멈추고 쉬는 날이다. 그럼에도 바리새파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법과 규정을 많이 만들어 인간을 억압하고 나아가 안식일이 무거운 짐이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하였다. 바리새파들 중에서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은 안식일에 이삭을 자르는 일을 수확하는 일로 규정했다. 배가 고파도 안식일에 밭에서 이삭을 자르는 일은 금기사항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제자들을 비판하는 그들에게 예수는 성전에 들어가 거룩한 빵을 먹었던 다윗왕의 사례를 들고 있다. (사무엘 상 21: 1-10) 다윗은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가 빵 5개를 청했다, 그러나 자신에게 빵이 없자 아히멜렉은 성전의 빵을 다윗에게 주었다. 예수는 이 사례를 통하여 안식의 진정한 의미는 쉼과 치유와 자유에 있음을 설파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27)


이 말씀은 인간이 왜 위대한 것인지, 인간에게 자유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존엄한 가치인 자유를 안식일을 통해 누리도록 하셨다. 바로 그 진정한 의미를 문자적 규정으로 가두거나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예수는 유다교와 그 종교를 지탱하는 완고한 율법의 고치를 뚫고 영생의 자유혼이 되셨다. 나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은 나에게 주어진 삶의 모든 조건을 통하여 다가오고 있다. 빛도 어둠도 일체가 은혜이다. 그것을 깨닫고 삶을 잔치판으로 살아가는 자는 인간을 차별하지 않을 것이다. 아름다운 세상, 아름답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2015. 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