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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균형()이 무너진 사람을 고치시다.

 

                                                                                        마가복음 3: 1-6

 

인간에게 팔이 없었다면 문명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도구와 언어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문명사회를 건설할 수 있었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인간의 팔 신경과 언어감각이 하나의 연결망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 주었다. 팔은 도구를 사용할 때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다채롭게 표현 할 때도 쓰인다. 명상의 자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손이 잠잠하면 입도 잠잠해지기 마련이다. 손은 물건을 주고받고 만지고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수단이다. 손은 그 사람의 현재 의식과 삶이 어떤 상태인지 가늠할 수 있는 가늠자와 같다. 그것은 그 사람의 현재의식과 삶의 패턴을 이해하는데 손과 팔이 중요한 힌트를 주기 때문이다.

스트레스 상황이나 긴장 상태에 처하게 되면 팔이 경직되게 된다. 특히 미래에 대해 걱정이 많은 머리형들은 팔의 긴장이 많다. 걸음을 걷게 될 때 팔은 몸 보다 앞서 간다. 내가 도달할 미래를 팔이 앞서 가는 것이다. 다가올 미래를 또는 그 대상이 공포스러울수록 손과 팔과 어깨는 오그라들기 마련이다. 나의 지나온 과거가 다리와 연결되어 있듯이 손은 미래의 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손은 사랑을 표현하고 악수와 포옹을 통해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특히 에너지를 표현하고 교류하는 춤의 핵심이다. 따라서 자신감이 떨어질수록 손은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 자기의 의사표현을 하지 못하는 사람, 수업 시간에 손을 들어 질문을 하지 못하는 학생들은 손과 팔의 이슈를 가지고 있다. 삶이 건강하려면 손과 연결된 신경이 편안해야 한다. 팔은 인간의 날개이다. 두 날개를 힘차게 사용할 수 있을 때 인간은 자신의 하늘을 날아갈 수 있다. 그리하여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에 도달 할 수 있고 언제나 지금 여기에 머물 수 있다.

안식일 날 회당의 예배 시간에 예수는 한 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바라보시고 한 가운데 일어서라고 말씀하셨다. 전설에 의하면 그 사람은 석공이었다고 한다. 노동을 해야만 하는 오른 손이 마비되어 양식을 구할 수 없는 딱한 처지가 된 것이다. 손이 오그라들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 전체가 오그라든 것을 의미한다. 손이 오그라들면 마음도 삶도 위축되기 마련이다. 그는 눈치 보며 사는 아웃사이더 인생이 된 것이다. 돈을 버는 손과 관계의 손이 모두 마비되었다. 그는 주변의 사람이었지 중심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조차 중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예수는 그 에게 명령했다. 일어나 중심의 자리에 가서 서라고-. 관객의 인생이 아니라 주인공의 인생으로 살아야 한다고 - . 피하기만 하지 말고 너를 너답게 드러낼 수 있는 자리에 가서 서라고 말씀하셨다.

데카그램의 성격 유형 중에 4, 5, 9 번 유형을 움추림 또는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그들을 대기만성형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을 중심의 자리에 서도록 하는 것을 스스로 힘들어하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너의 빛을 됫박으로 덮지 말고 산 위의 높은 곳에 세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잘난 척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일이라면 자기 자신을 드러낼 줄도 알아야 한다.

본문을 보면 여전히 삐딱한 눈을 가진 바리새인들이 등장하고 있다. 안식일과 상관없이 병을 고치시는 예수를 잡기 위해 그들은 감시의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그들은 마음(카르디아) 과 영적 생명력이 굳어지고 어둡게 된 사람들이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바리새인들이야 말로 영혼의 손이 오그라진 인간들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생사가 걸린 상황에서만 환자에 대한 치료를 허락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안식일을 규례대로 지키는 일이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 특히 노예와 같은 약자들의 생명을 위해 안식일 주셨건만 그 본질이 왜곡되고 말았다. 예수와 바리새인들의 갈등은 바로 이 차이에서 발생하고 있다. 예수는 그들에게 물었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

 

예수는 돌같이 굳어있는 바리새인들을 바라보면서 탄식하셨다. 그 탄식은 깊은 연민과 함께 분노와 슬픔이 배인 마음이다. 예수는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그들은 그 손을 거절했다. 예수는 그들의 마음을 그들에게 맡기고 소신 있게 자신의 일을 하셨다. 바리새인들이 악한 것은 그들의 마음이 돌처럼 굳어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완고한 마음으로 인간을 보았기 때문에 인간이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돌 같은 사람은 인간을 경시하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향해 돌을 던지기 마련이다.

종교에 갇힌 사람들의 우매함은 율법의 눈, 곧 심판과 정죄의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다가 율법의 근본정신을 놓치고 결국은 생명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는 데 있다. 규범만 존재하고 그 규범의 잣대로 감시의 눈초리가 빛나는 곳에서는 영혼이 살아날 수 없다. 복음은 한 사람의 인격을 자유혼이 될 수 있도록 이끄는 능력이다. 사람이 사람다운 숨을 쉬게 하는 곳에서 영혼은 균형 있게 성장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