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자녀를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2015.9.6
2015.09.13 06:01
네 자녀를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2015.9.6
마가복음 7: 24- 30
삶은 반복되지 않건만 자신의 삶을 중복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늘 새로움과 은혜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완고한 틀에 매여 사는 사람들은 변화와 도전적 삶을 살기 어려울 것이다. 마가복음서는 스승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고루한 자기 생각의 틀로만 바라보았던 제자들에 대해 그들의 민낯을 보여주고 있다.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보아도 그들은 여전히 먹을 것을 걱정하고 돈 계산을 하면서 스승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제자들의 신앙은 고무줄 신앙으로 비유할 수 있다. 잡아당기는 손만 놓으면 다시 원 위치되는 그런 식의 반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예수의 말귀를 알아듣는 한 이방 여인이 나타났다.
예수와 이방여인의 만남은 헤로데의 추적을 잠시 피하기 위하여 시로페니키아 지역으로 가셨을 때 이루어졌다. 예수는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계시고자 했지만 결국 알려지고 말았다. 한 여인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와 발치에 엎드리면서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간청을 했다. 그 때 예수는 아주 심오한 화두 같은 말씀을 주셨다.
“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는 빵을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27)
내가 어려서부터 들어온 바로는, 이 본문은 예수께서 당신의 능력을 유다인들 에게 베풀려고 한 것이지 이방인들에게는 베풀려 하지 않았다는 해석이었다. 이방여인의 간곡한 청 때문에 예수께서 이방인을 향한 마음을 바꾸셨다는 식이다. 그러나 7장 이전에 이미 이방인 지역 사람들에게 복음은 전해졌고 게라사 광인의 경우처럼 치유의 사역이 있었다. 이 본문을 이방인과 유다인의 관계로 보지 않고 그냥 한 여인과 딸의 관계로 좁혀 본다면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딸의 병은 몸의 병이 아니라 마음의 병이었다. 그 병의 원인은 어머니가 딸을 배불리 먹이지 않은 데서 온 병이었다. 예수는 어머니로서 딸에게 주어야 할 빵을 강아지에게 주어 온 어머니를 지적하고 있다. 개는 애완동물의 중심이다. 나는 어머니가 키우는 개를 오대 독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어제 불재를 찾아온 여인도 애완용 개를 품에 안고 있었다. 어떤 여인들은 자식보다도 더 애완동물을 소중하게 여기기도 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강아지는 무엇일까? 우리는 성서가 성서인 이유는 어떤 말씀을 통하여 인생의 깊은 통찰을 제시하는 데 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애지중지하는 강아지는 그 여인에게 있어 돈, 명예, 사회활동 등의 기타 조건들이라고 볼 수 있다. 딸에게 쏟았어야할 그 여인의 관심 에너지는 비유하자면 강아지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 결과 딸은 어머니가 손 쓸 수 없는 상태로 빠져들게 된 것이다. 예수는 그 여인에게 무엇보다 먼저 딸과의 관계를 살펴보고 딸에게 진정 필요한 것들을 주어온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해 통찰하라고 말씀하셨다. 딸이 진정 필요한 것은 딸을 이해하고자 하는 어머니의 마음이고 사랑이지 그 여타의 것들이 아니었다. 그 여타의 것들로 사랑과 이해의 자리를 차지하려 하기 때문에 부모와 자식 간에 대화가 사라지고 사랑이라는 포장지로 위장한 폭력이 자행되게 된다. 많은 부모들이 내가 뼈빠지게 일하는 것은 오직 자식인 너를 위해서이기 때문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런데 왜 오늘날 청소년 문제가 이토록 심각한 것일까.
여인은 현제 나타나고 있는 딸의 상태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지 그 원인이 무엇인지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오직 딸의 문제를 해결해줄 해결사만을 찾고 있다. 그런데 예수는 그 여인이 딸과의 관계에서 어떤 문제를 자신이 안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주신 것이다. 완벽함을 추구하여 정신적으로 숨을 못 쉬게 한 것인지, 귄위적이고 지시적인 행동 때문인지, 좋은 가문에 시집가는 문제에 만 집착하고 있었던 것인지, 지나친 기대를 딸에게 함으로써 늘 부담을 주어온 것인지 ---- 그리하여 딸이 어머니로부터의 중압감에 눌리고 눌려 몸과 마음이 망가져 버린 것인지에 대해 돌아보라는 지혜의 말씀을 주셨다. 여인은 예수의 말씀을 알아차렸고 온전히 승복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지혜롭고 담대한 말을 더했다.
“선생님 그렇긴 합니다만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 (28절)
이 말은 어떤 뜻일까? 그 여인은 딸의 문제에 있어, 딸을 배불리 먹이지 못한 자신에게 원인이 있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강아지, 곧 자신으로서의 삶의 영역도 필요한 것임을 주장하고 있다. 어머니라고 해서 오직 딸만을 위해서 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딸에게 먹이고 남은 것은 강아지에게 먹일 수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라고 말하고 있다. 딸의 욕구와 어머니의 욕구가 공생의 관계일 때 건강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 자신의 욕구를 죽이고 딸의 욕구만을 위해 희생한다고 생각할 때 삶은 병들게 된다. 인간은 각자의 소명이 있고 가야할 저마다의 길이 있다. 만약 어머니로써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직 딸만을 돌본다면 그것 역시 건강한 삶의 방식일 수 없다.
사랑은 상대의 필요를 제대로 알아차려서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만큼 주는 것이다. 그것은 지혜가 있을 때만 가능한 사랑이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오직 주는 것만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지혜로운 사랑을 할 수 없다. 그러기에 성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는 어머니로서 딸에 대한 자신의 태도와 관계를 살펴볼 줄 아는 지혜를 촉구하고 둘 사이의 관계가 조화롭고 나아가 두 사람 모두 온전한 인간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안내하셨다.
이 시대는 마귀들이 부모와 자녀 관계 속에서 크게 힘을 쓰고 있다. 단절과 미움과 한이 서려있는 가정들이 얼마나 많은가. 가장 평화로운 천국을 누려야할 가정이 망가지고 깨어지는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이 원인은 강아지와 자식의 빵을 구분하지 못하는 데 있다. 이 통찰이 있을 때 마귀는 힘을 쓰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깨닫는 이방 여인에 대해 예수는 감탄하셨다. 다른 치유 사건을 보면 믿음의 사건인 데 비해 이 경우는 믿음에 통찰을 더한 사건이었다.
그 여인은 딸과의 관계가 건강하려면 무엇부터 필요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딸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끝없이 걱정하고 구속하던 집착을 내려놓게 된 것이다. 나아가 딸의 문제와 자신의 문제를 구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딸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자신도 자유롭게 되었다. 삶을 들여다보면 자신을 얽어매는 사람이 남을 얽어매고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사람이 물귀신처럼 남을 불행하게 한다. 딸의 삶을 병들게 하는 귀신 역할을 어머니가 해온 것이다. 어머니의 과도한 기대와 요구는 딸도 어머니도 모두 삶을 망치게 하는 촉진제였을 뿐이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딸을 이미 정상이었다. 귀신이 떠나간 것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깨어나는 어머니의 큰 깨달음이 딸을 귀신에 매인 삶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해방의 사건이 된 것이다. 그 여인은 ‘내가 나다운 삶’이야말로 우리가 누려야할 진정한 축복임을 증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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