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 평안히 가거라
2015.10.04 05:35
딸아, 평안히 가거라
마가복음 5: 21- 43
회당장 야이로의 딸과 하혈하는 여인의 일화는 12년이라는 숫자가 동시에 등장하고 있다. 12살 소녀와 12년 동안 병을 앓고 있었다는 이 두 사건의 내용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12는 관계 맺는 능력, 온전함 (하늘 3과 땅 4의 곱수). 물질로는 모든 생명의 근원인 물, 몸으로는 간과 관련 있는 숫자이다.
한자로 사람 人이 두 사람이 기대고 있는 모양을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의 속성과,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본질은 그가 맺고 있는 관계의 내용에 있다. 인간(人間)은 ‘사이’의 존재이며 사이를 사랑으로 채우느냐 미움과 원망으로 채우느냐 여부에 그가 추구하는 삶이 결정된다.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모두 인간관계가 파탄난 상태, 극도의 고립상태에 빠져있는 사람을 상징하고 있다.
가부장적이고 봉건적인 시대의 아버지들은 매우 권위적이었다. 사회적으로 활동무대가 크고 높을수록 자녀들이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을 받기는 매우 어려웠다. 여자와 아이들은 사람들의 숫자에도 들어가지 않던 시대를 고려한다면 사회적으로 잘나가는 회당장이라는 직책의 사람이 딸을 자상하게 대했을 것 같지는 않다.
로마가 세운 도시의 회당 유적지를 가보면 돌로 세워진 건물의 규모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회당장은 그 지역 유대인들의 중심이 되는 인물이다. 그 회당장 아버지는 딸을 자기 생각대로 다룰 수 있는 통제와 지시의 대상으로 생각했을 뿐 딸을 하나님께 내 맡기는 믿음과 자상함은 갖고 있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런데 그 딸이 병이 들어 죽게 된 것이다.
죽어가는 딸 앞에서 아버지는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절감했을 것이다. 자신을 대단한 능력의 사람이라고 자부했던 회당장은 딸을 살려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았고 급기야 예수의 발치에 엎드리게 되었다.
야이로는 자신의 무능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간청할 때 딸이 살아나는 기적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알고 있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할 때 지혜의 세계가 열리듯이 기적을 불러오는 믿음의 비밀은 처절한 자기 자신의 무능을 깨닫는 데 있다는 것을 야이로는 보여주고 있다. 딸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생각과 세상의 권세를 내려놓고 아버지로서의 아버지로 딸 앞에 설 때 딸이 살아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숨통을 막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 딸이 빛을 만나는 해방사건이었다.
광복절처럼 해방은 사회적, 역사적 해방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해방이 있어야 한다. 그 때 진정한 빛을 보는 광복이 찾아들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어떤 해방을 맞이해야 하는가?
회당장 야이로는 딸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예수에게 온전히 내맡기는 자세를 나타내었다. 예수는 야이로에게 “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 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가 야이로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딸이 숨을 거둔 상태였다. 그러나 예수는 아버지와 함께 침상에 다가가 딸의 손을 붙잡고 ‘달리다 굼 (소녀야 일어나라)’ 이라고 말씀하셨다. 소녀가 죽었다고 통곡하는 사람들의 비웃음 속에서 예수는 죽은 소녀에게 권능과 치유의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 소녀는 곧 일어나서 자기 발로 걸어 다녔다. 예수는 그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다.
소녀가 스스로 일어나서 걸어 다녔다는 이야기는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소녀는 과잉보호 속에서 성장했다 , 아무것도 스스로 할 필요가 없는 환경은 몸과 마음의 생명력을 약화시키기 마련이다. 계란 속에서 노른자위로 있을 때는 알 껍질이 필요하지만 병아리가 되면 그 껍질은 강력한 위험요소가 된다. 그 때 껍질은 반드시 깨어져야만 한다. 창조는 파괴의 다른 얼굴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성장에 있어 가장 위험한 것은 불필요한 과보호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과보호는 자립과 공생의 삶을 살아야할 자녀의 인생을 망치는 것임을 부모들은 깊이 인식해야 한다.
야이로의 집에 가는 동안 하혈하는 여인을 치유하는 사건이 등장한다. 율법에 의하면 하혈하는 여인과 접촉하면 정결의식을 취해야만 할 정도로 그녀는 접촉 불가 대상인 여인이었다. 피는 생명력의 상징이다. 피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피로 상징되는 자신의 생명을 다 바쳐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 헌신해왔다. 그녀는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무진 노력을 다해 왔다. 그러나 자신의 생명을 다 바쳐 타인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녀의 손에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녀를 생각하면 데카그램에서 2번 유형이 떠오른다. 2번 유형은 남에게는 잔칫상을 차려주기 위해 헌신하지만 정작 자신이 배고플 때 라면 하나 끓여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외로움의 사람이다. 모든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꿈과 희망마저 포기한 채 베풀었지만 늘 손해만 보고 이용만 당하는 허탈함에 시달리는 유형이다. 그녀는 주기만 하던 삶에서 자신의 필요를 알아차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다. 그 때 기적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수련 안내를 해오면서 확인한 것은, 사람들의 삶에 기적적인 변화가 오려면 욕심이 아닌 자신의 필요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그 필요를 위해 노력할 때 일어난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수많은 0 앞에 1 이라는 숫자를 세우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0은 아무리 많아도 0일 뿐이다. 곱해도 나누어도 더해도 0은 0일 뿐이다. 그러나 그 앞에 1이 서게 되면 0은 10배씩 기하급수 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내 삶에 있어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을 결정적인 시간에 붙잡음으로써 그녀는 치유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피는 멈추게 되었다.
그녀는 예수의 옷자락을 은밀하게 만졌지만 손 댄 사람을 찾으시는 예수에 의해 공개적으로 자신에 대해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수치스러운 병과 치유에 대해 용기를 내어 있는 그대로 말하게 되었다. 자신의 수치스러운 병을 치유 받은 일을 고백하는 순간 그녀는 단순히 병만 치유 받은 것이 아니라 그녀의 인격과 여성성이 바로 세워지게 되었다. 비밀스럽게 혼자만 경험하는 치유였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사건에서 감동적인 것은 그녀에게 주신 예수의 말씀이다.
“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네 병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건강해져라” (34)
'딸아‘ 라는 말을 가슴으로 느껴보라. 이 말을 듣는 순간 그녀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하나님 나라의 가족으로 인정하면서 그녀의 믿음과 행동과 고백이 그녀 자신을 구원했다고 인정하시는 예수의 말씀에 그녀는 어떤 심정을 가졌을까. 예수의 그 말씀은 그녀의 심장과 인생을 관통하는 말씀이 되었을 것이다.
타인에게 잘 보여 인정받으려는 수고와 노력은 ’나‘라는 에고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게임이다. 내가 스스로 얻으려 하고 이루려고 하는 무망한 노력이다. 그것은 처세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노력이다. 주기만 하고 받아드릴 줄 모르는 사람들의 비극이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를 믿었고 그녀에게 꼭 필요한 것을 얻게 되었다. 구걸하는 사랑에서 자기 우물을 가진 사랑의 사람으로 우뚝 일어서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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