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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직 모르겠느냐?

2015.10.04 05:48

물님 조회 수:6845



  그래도 아직 모르겠느냐?

                           마가복음 6: 30-44, 8: 1-21

 

이주동안에 걸쳐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또는 Luder, 14831110~1546218)의 생가에서부터 그가 마지막 설교를 하는 중간에 세상을 떠났던 현장까지 답사하고 왔다. 그리고 네델란드에서 청교도와 관련한 새로운 사실들을 접하면서 청교도의 신앙적 뿌리가 되는 교회와 유적들을 살펴 보았다.


마틴 루터는 독일의 가톨릭 수사이자 사제, 신학 교수였으며, 훗날 종교개혁을 일으킨 주요 인물이다. 아우구스티노회 수사였던 루터는 광범위하고 노골적으로 진행되던 면죄부 파동에 맞서 151795개 논제를 게시함으로써 종교개혁의 불을 일으켰다. 1520년 그는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자신의 모든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거부하였고 1521년 보름스 회의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 황제로부터 같은 요구를 받았으나 거부함으로써 결국 교황에게 파문을 선고받았다. 또한 황제로부터 삭권 박탈당해 사형에 준하는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를 살려내 보호한 작센공의 도움으로 피신생활을 하는 동안 멜라노톤의 도움과 조언으로 9개월에 걸쳐 성서를 신약성서를 번역하였다.


독일어라는 말과 문법조차 없던 당시에 번역과 문법의 정형화를 동시에 정립하면서 번역 작업을 한 것은 어학적, 학문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종교사적인 배경으로 볼 때 그의 만인사제설이 적용되려면 만인에게 성서가 필요했다는 점에서 일반인들이 성서를 읽을 수 있도록 한 것 역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종교개혁은 루터 혼자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의 앞과 뒤에서 목숨 바쳐 헌신했던 많은 개혁자들과 조력자들이 있었다. 하나의 큰 사건이 일어나는 데는 그만한 이유와 배경이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루터의 종교개혁과 청교도의 역사를 살펴보는 여정에서 나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 현장은 룩셈부르크에 있는 독일군 묘지였다. 패전국이기 때문에 국가 차원에서 묘역을 정리할 수 없었던 당시 형편 때문에 미군에 비해서 초라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수많은 십자가에 새겨진 이름들을 살펴보다가 올라오는 감회를 시한 수로 적어 보았다.


룩셈부르크 독일군 묘역에서

 

죽은 자는 말이 없다지만

말이 없는 죽음

말 못하는 죽음

죽어서 영원히 말하는

죽음도 있다.

유럽의 하늘과 땅과 인간들이

송두리째 혼돈에 빠져들었던

전쟁의 현장에는

승전국 미군의 화려한 묘역과

패전의 나라 독일군 묘지가

가까이 있다.

 

매끄러운 대리석 십자가와

거친 돌 십자가의 차이가

죽은 자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십자가로 가득 채워진 독일군 묘역

중앙의 거대한 돌십자가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신의 침묵인가

종교라는 이름의 시체인가

 

루터의 나라 독일

청교도의 나라 미국의 젊은이들은

누구의 이름을 부르며 죽어갔을까

Hebert Friedrich

Gren 17.3.11 + 13.1.45

Rudolf Oser

4.5.07 + 20.12.44

작은 돌십자가 하나마다

전쟁이라는 맷돌 속에 짓뭉개진

목숨들이 네 구씩 묻혀있다.

전쟁의 끝은 무덤뿐이라고 말해주는

묘비석 앞에는

누군가 그 이름을 기억하며

눈물지었을 노란 국화가 놓여있고

아주 낯설게 차가운

팔월의 바람이 지나가고 있다.

2015.8.24.

 

이 시와 연결지어 오늘의 본문을 생각해 보자. 십자가도 독일군 십자가와 미군의 십자가가 다른 것처럼 각자마다 입장과 처지에 따라서 다른 종교관과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은 자들의 묘지에 세워지는 용도의 십자가가 아니라 지금 나의 삶을 정립해주고 이끌어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아야 할 것이다. 마가는 예수의 엄청난 초자연적 기적을 반복해서 목도했음에도 믿음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과 그 제자들을 향한 예수의 탄식을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다

   

마가복음에는 광야에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등장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의 기적사건에 초점이 있지만 정작 마가는 이 사건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성서학자들은 두 차례에 걸쳐 등장하는 수천 명을 먹이신 사건이 하나의 사건을 두 번 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저자의 의도는 무엇인가? 두 번째 기적에서 그 힌트를 알 수 있다. 제자들은 비슷한 상황에서 첫 번 째 기적을 망각한 양 행동하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이 두 사건 모두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는 사건 사이에 배치되고 있다. 호수를 건너갈 때 마다 반복해서 일어나는 권능의 사건들은 제자들에게 어떤 믿음의 깨달음도 주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세 번 째다. 그 때 예수는 호되게 제자들을 책망하셨다.

 

빵이 없다고 걱정들을 하다니, 아직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느냐? 그렇게도 생각이 둔하냐? 너희는 눈이 있으면서도 알아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면서도 알아듣지 못하느냐? 벌써 다 잊어 버렸느냐? - ” (8: 17- 18 )


맹인들이 앞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믿음의 눈이 없는 제자들에게는 예수의 어떤 기적도 통하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말할까? 예수의 기적을 체험하고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사람들마저 이렇게 믿음에 들어서기 어려웠는데 보지 않고 믿음에 들어서기는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그래서 보지 않고 믿음에 들어선 자가 복이 있는 법이다.


기적이란 일상적인 아니다. 그럼에도 일상의 사건일 수 있는 일을 근거로 이적이 일어나고 있음을 우리는 간파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다섯 개라는 적은 숫자의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나눌 때 그것은 물질에서 초월하는 일이 발생한다. 돈을 생명을 살리는 일에 사용하면 그것은 돈이 아니라 생명이 된다. 하나님의 신비는 물질을 초월시키는 자들에 의해 현현한다. 예수는 최후만찬에서 자기 몸을 빵으로 비유하여 물질 몸을 초월하는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자기완성의 소명을 말씀하셨다. 우리는 그의 살과 피를 마심으로써 생명의 양식을 먹고 마시게 된다. 수천 명을 먹이신 사건은 인류가 먹고 마셔야할 예수의 몸에 대한 예표이다.


첫 기적은 새로운 이스라엘 인으로서 부름 받은 유다인을 상징한다. 출애굽기에 나타나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군중들은 오십 명, 백명 씩 질서 있게 행동했다. 그러나 두 번 째 사건은 이방인 지역을 배경으로 이방인들이 몰려 온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마가는 거라사의 군대 귀신들린 광인이나 이방 여인의 딸 치유 사건을 통하여 예수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까지 확산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두 기적 사건의 차이


두 사건은 예수의 측은지심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차이점이 있다. 첫 사건은 군중들을 바라보시면서 그들이 목자 없는 양 떼 같았기 때문” (6:34)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의 형편은 눈먼 자들이 눈 먼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과 같았다. 정치와 종교의 지도자들은 사리사욕을 챙기는 사람들이었지 민중을 돌보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목자 없이 뿔뿔이 흩어져 위험에 처해 있는 양들과 같은 형편이었다. 그들은 자기 존재와 하늘의 소명을 깨달아야할 가르침이 주어지지 않았다. 예수는 영혼이 굶주린 그들에게 영혼의 양식을 주셨다. 삶의 만족과 의미와 풍성함을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그들은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맛볼 수 있었다.


두 번 째 기적의 바탕이 되는 예수의 말씀이 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벌써 사흘이나 나와 함께 지냈는데 이제 먹을 것이 없으니 참 보기에 안됐다. 그들을 굶겨서 집으로 보낸다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그 중에는 먼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 (8:2-3)

 

먼데서 온 사람들은 이방인이다. 그들은 길을 가는 도중에 죽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예수의 기적 바탕에는 그런 사람들에 대한 측은지심이 자리하고 있다. 예수는 인생의 길을 제대로 갈 수 있는 힘이 없는 자들에게 힘이 되신다. 그들에게 예수는 생명의 빵이 되신다. 마가는 군중들이 먹고 힘을 얻은 빵이 결국 예수의 찢겨진 몸이라는 사실을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다. 예수의 몸과 삶은 모두 인류를 위한 제단에서 제물이 된 것임을 밝혀주고 있다. 예수의 입을 빌려 그래도 모르겠느냐고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