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질 - 폭력을 거부하는 몸짓
2015.10.11 07:02
간질 - 폭력을 거부하는 몸짓
마가복음 9: 14-29
간질환자와 수 년 동안 생활을 함께하면서도 간질의 발작증세만 보았을 뿐 간질을 알지 못했었다. 내가 간질을 새롭게 이해하게 된 것은 가족 세우기라는 가족치유 방법을 체계화한 버트 헬링거 신부의 웍샵을 참석하게 된 계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가족 세우기를 많은 상담가들이 사용하고 있지만, 내가 가족 세우기를 이해는 하면서도 멀리하는 이유는 과정 중에 너무나 많은 개인 신상의 아픔이 드러나게 되고 따라서 그 뒤처리가 힘든 것과,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과 통찰이 없는 사람들이 이 기법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놀라움 때문이다.
헬링거는 자신의 문제를 명확하게 한 단어나 한 문장으로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직 그 문제를 해결할 때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은 육하원칙으로 자신을 살려달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단순하고 절박하게 ‘살려달라’고 외칠 것이다. 인생의 문제를 풀어가는 지혜는 단순할수록 그 본질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지혜를 그는 보여 주고 있었다. 또한 인생이 꼬이는 것은 관계의 꼬임에서 출발하고 귀결 된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부모와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헬링거는 현장에서 보여 주었다.
인간은 부모의 운명에 ‘YES’하고 있는 그대로 존중할 때 행복할 수 있다. 그것은 심리적, 영적인 나비효과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특히 어머니는 육체의 영역에서 탯줄로 연결되어있고 영적인 영역에서도 은줄(Silver Code)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족 간에는 ‘나비효과’의 에너지가 작용하고 있다. 가족사에 얽힌 아픔과 상처가 가족 누군가에게 대를 이어 질병과 관계의 마찰로 나타나게 된다. 버트 헬링거는 가족의 운명을 내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고, 그 것이 어떤 불합리한 내용이라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존중할 때 고통의 근원이 제거된다는 지혜를 제시하고 있다.
그분의 웍샵에서 한 아버지가 무대에 올라와 아들의 심한 간질 발작 때문에 힘들다고 말했다. 헬링거 신부는 간질은 병이 아니라고 말했다. 병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나 역시 그 말이 생소했다. 헬링거는 내가 질 알고 있는 박병식 목사를 지명한 다음 ‘당신은 지금부터 간질 그 자체입니다’하고 말하자 박 목사는 서서히 목을 좌우로 돌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양 볼이 튀어나올 만큼 심하게 흔들어대었다. “ 간질은 병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그 폭력은 살인입니다. 아들은 영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살인의 현장을 보지 않으려고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사자는 놀랐고 거부했지만 결국 그 내용은 밝혀지고 말았다.
헬링거는 그 남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 당신의 아들은 이중적인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마음으로 보이는 폭력과 당신이 아들에게 행하고 있는 무고한 폭력으로 고통 받고 있다. 당신은 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해야한다 ” 그 아버지는 자신의 폭력을 인정했고 무대 위에서 아들 역할을 하는 사람에게 진정성 있는 사과를 했다. 그 사과는 서울에서 대역을 하는 사람에게 했지만 전주에 있는 아들의 발작이 멈추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담임 목사는 나에게 찾아와서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물었다. 바로 이것이 영적 에너지 차원의 나비효과이다.
간질병자 소년과 아버지
간질병 소년은 벙어리 였고 심한 간질발작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입에 거품을 내품고 이를 가는 모습은 평상시에 내놓지 못한 잠재적 분노와 억압, 그리고 그의 무의식의 스크린에 뜨는 영상이 발작의 형태로 튀어나오고 있다. 아이에게 가해졌던 온갖 폭력의 에너지가 발작의 형태로 분출 될 때 아버지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들을 치유해 달라고 제자들에게 데려온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은 역부족이었다. 그 이유는 제자들이 믿음에 들어서지 못했고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마가는 전해주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의식으로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창조의식을 가지고 있다. 의식은 입자와 파동의 경계를 좌우하는 힘이 있다. 나무에 오르지 못하는 살쾡이가 나무위의 다람쥐를 떨어뜨려 잡아먹는 것도 의식의 힘인데 인간의 의식적 창조력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인간의 믿음과 확신은 주변 환경에 강력한 힘을 끼치게 된다. 그러나 의심을 할 때 현상계에 미치는 영향은 멈추게 된다. 인간의 형편은 아직도 창조력을 사장하고 폭력과 탐욕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은 없다는 점에서 인간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인간은 자신을 위해 삶을 아름답게 살 수 있는 잠재력을 은혜로 받아 태어나지만 스스로 불행의 감옥을 짓고 자신을 가두면서 살아가기도 한다. 바로 이 사실을 직면하여 자기 자신의 진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창조력을 받아들이는 믿음의 사람들에 의해 역사는 늘 새롭게 쓰여지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믿는 그대로 그것이 되고 현실을 창조한다. 자신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의식의 패턴이 그 사람이다. 내가 남에게 축복의 존재가 되어야지 .. .라고 믿으면 그렇게 삶이 펼쳐지게 된다. 내가 모든 대상들과 조화와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지면 하늘 아버지와 하나가 된다고 예수는 말씀하셨다. 하지만 제자들은 나를 통해 역사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생각하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다. 그들은 간질에 시달리는 아이에 대한 연민도 없었고 치유와 능력을 간구하는 절실한 기도도 없었다.
기도는 나의 의식을 극복하고 나의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게 한다. 자아의 뜻을 따르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나를 향한 아버지의 최고 최선의 뜻을 찾고 따르고자 하는 노력이다. 모든 일에 아버지의 도움을 간구하는 태도가 구원이고 믿음이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물주고 가꾸었지만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 같은 제자들에게 실망하셨다.
“아, 이 세대가 왜 이다지도 믿음이 없을까!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살며 이 성화를 받아야 한단 말이냐? 그 아이를 나에게 데려 오너라” ( 19절)
예수를 보자마자 그 아니는 심한 발작을 일으켰다. 예수는 소년의 아버지에게 언제부터 그랬느냐고 물었고 아버지는 아이의 병력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 선생님께서 하실 수 있다면 자비를 베푸셔서 저희를 도와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 ‘할 수만 있다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안 되는 일이 없다.”
언어는 그 사람의 존재와 의식 상태를 반영한다. 아버지의 조건적인 말은 그의 깊은 불신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예수 앞에 와서 하는 그의 말을 보면 그는 아들도 믿지 않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네가 1등을 한다면 .... 나는 너를 내 아들로 인정할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자식들이 깊은 속내를 말할 수가 없다. 오늘날 청소년 문제의 뿌리는 부모에게 터놓고 대화할 수 없는 분위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번 시험에 꼴찌했어요’ 라고 당당하게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보여주고 받아들이는 부자관계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많은 부분을 숨겨야하고 억지로 참아야할 때 그 에너지는 질병을 통해 나타난다. 불은 정열과 성적 욕구를, 물은 무의식의 영역을 상징하는 단어이다. 아들은 발작과 땅바닥에 나뒹구는 모습으로 자신의 깊은 의식을 표현하고 있다. 의식의 영역에서는 아버지를 어떻게 해 볼 수는 없지만 무의식의 표현인 발작을 통해서 아버지를 꼼작 못하게 하고 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선을 놓고 부자간의 대결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믿음이 부족하다면 도와 주십시오
예수는 발작과 경련으로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 소년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다. 새로운 시작과 부활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자빠져 뒹구는 죽은 삶에서 스스로 자기 발로 서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부모에 대한 반항으로 잘 못된 길로 빠져들어 방황하는 젊은이들에 대한 상징적 치유사건으로 읽혀진다. 이 사건은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 곧 예수의 참된 본질이 드러난 사건 직후의 기록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간질로 인해 인간의 아름다운 존엄성이 손상된 소년이 자신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된 것은 그가 육신적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이제는 하늘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자식이 되었음을 나타낸다. 변화산의 예수님만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식이요 영광스러운 존엄성을 찾아야할 존재라고 마가는 말씀하고 있다. 구제불능의 상태로 상징되는 간질적 상황이라 하더라도 주님께 도움을 간구할 때 우리는 새롭게 설 수 있다. 그 때 내 안에서도 하나님의 빛이 밝히 빛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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