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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후의 만찬 - 이것은 내 살이요 피다.

                         마가복음 14: 12 -42



최후라는 말은 비장하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외로움의 끝자락에서 예수는 마지막 만찬장에 가셨다. 지난 주 나누었던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에 관한 아름다운 일화는 바리사이 시몬의 집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예수는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고 나서 또 다른 만찬에 참여하셨다. 그것은 제자들만 참석하는 이른바 최후만찬이다. 최후만찬은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매우 중요한 성만찬과 관련이 깊다. 또한 미술 작품의 소재로 많은 화가들이 그림을 그린 주제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르네상스 시대의 대가 다빈치가 이태리의 밀라노에 있는 수도원에 그린 최후만찬은 가장 유명하다.


대제사장과 군인들에게 연행되기전, 마지막으로 12명의 제자들과 만찬을 가진 예수의 모습을 묘사한 '최후의 만찬'은 1491년부터 1498년까지 무려 7년간의 기간 동안 그려진 작품이다. 다빈치의 걸작품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숨겨져 있다고 한다. 1491년, 새로 지어진 수도원의 벽화를 그릴 화가를 찾던 로마 교황청은 당시 이태리에서 명성이 높던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불러 성서속에 있는 예수의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 광경을 벽화로 그려줄 것을 부탁을 하게 되었다. 부탁을 받은 다빈치는 그때부터 실제로 그림의 모델로 쓰일 사람들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오랜 엄선 끝에 1492년 예수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는 용모를 가진 19세의 젊은이를 찾은 뒤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후 6년 동안 예수의 11명 제자그림을 모두 다 완성한 다빈치는 마지막으로 예수를 밀고한 배반자인 가롯 유다의 모델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다빈치가 가롯 유다의 모델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게 된 로마 시장은 "로마의 지하 감옥 속에 사형을 기다리고 있는 수 백명의 죄수들 가운데서 모델을 찾아보라는 제안을 하게 되었다. 다빈치는  사형수 감옥에서 한 죄수를 선택하게 되었다. 예수를 팔아넘긴 가롯 유다의 얼굴을 다빈치는 몇달에 걸친 작업을 통해 완성한뒤 "모델은 이제 감옥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통고를 하였다. 그 때 갑자기 다빈치 앞에 무릎을 꿇은 살인범은  다빈치가 완성한 최후의 만찬을 가리키며 "저기 저 그림속에 그려진.. 6년전 예수의 모델이 바로 나였소.." 라고 부르짖었다.

그렇게 얼굴이 성스럽고 깨끗했던 젊은이가 로마 최악의 살인마로 돌변하였다는 사실을 알게된 다빈치는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되어 최후만찬 이후로는 예수에 관한 그림을 더 이상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악마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천사가 악마가 되었다는 그 역설과 아이러니가 최후의 만찬에 깃들어 있다는 것이 참으로 의미심장하기만 하다.

           

유월절의 새로운 의미


이스라엘은 모세의 인도아래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탈출한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나라였다. 모세의 기적 가운데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집만 장남이 죽지 않았던 사건이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조상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였던 역사와 하나님의 기적을 찬양하는 축제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들은 긴박한 탈출의 과정 때문에 발효시킨 빵이 아닌 무교병을 먹었던 조상들을 기억하면서 유월절 만찬에 무교병을 먹는다.


마가는 전통적인 축제의 만찬 의식을 예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운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예수는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지는 빵과 자신을 동일시하셨다. 빵이 목구멍으로 삼켜지듯이 갈보리에서의 죽음으로 예수는 인류의 제단에 바쳐진 찢겨진 빵이 되었다. 십자가에서 몸이 찢겨지는 고통을 통하여 예수의 사랑이 들어 났듯이 빵을 나누는 성만찬의 의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사랑에 참여하게 되었다.


'내 살과 피를 그대들의 양식으로 바칩니다.

나는 나의 온 몸과 생명을 그대들을 위해 바칩니다.

나는 그대들을 위한 빵,

그대들이 마실 물입니다.

나의 몸은 이 빵처럼 찢겨지고

나의 피는 대지를 적시겠지만

나는 그대들의 몸과 삶 속에서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예수는 이어서 포도주를 당신의 피로 비유하셨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위해 흘리는 계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피는 생명이라는 말과 동의어라고 할 만한 단어이다. 피는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또한 인격적인 의미 곧 자신을 죽음 속에 던져 희생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예수는 자신의 피로 새로운 계약을 맺으신다. 그로인해 인류는 하나님의 계약에 참여할 수 있는 초대를 받게 되었다. 성만찬은 예수의 피로 세워진 계약에 참여하는 표시이다. 그 계약 안에서 문화와 인종과 시대를 초월하여 하나의 공동체가 출현했고 그것이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성만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마심으로 주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심을 체험하고 고백하고 그 분의 사랑에 동참해왔다. 교회의 뿌리와 믿음의 뿌리는 성만찬을 통해 나타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적 죽음에 있다. 그의 죽으심으로 악마의 세력이 무력해졌기 때문이다.


마가는 예수의 십자가의 행진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 가를 말하면서 동시에 예수의 처절한 고독에 대하여 보도해 주고 있다. 제자들은 그 누구도 예수와 함께 있지 못했다.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잠만 잤고 배신했을 뿐이다. 지금 무엇이 문제이고 어떤 상황에 빠져있는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 가운데서 홀로 자신의 길을 가시는 예수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가 지극히 인간적이고 평범한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너무나도 괴롭고 힘든 겟세마니의 기도 현장 가운데서도 홀로 였던 예수의 절대고독을 전해 주고 있다. 또한 권능 있는 모습이 아니라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 용기는 비겁과 만용의 중용이라는 말을 생각한다. 비겁해 보지 않고 만용의 어리석음을 체득한 사람이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삶의 여러 순간에 우리는 가슴이 오그라들고, 나중에 보면 고양이를 호랑이로 착각한 것을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내가 당면한 두려움을 어떤 방식으로 대하느냐 하는 것은 나의 믿음과 실상을 대변해 주는 시금석과 같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처절한 고독과 고통의 정점에서 보여준 예수의 모습은 삶의 소소한 것들을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고 있다.


예수는 먹고 사는 문제, 남이 나를 알아주느냐, 안 알아주느냐 하는 문제와 씨름하지 않고 온 세상을 위협하는 악마의 세력과 싸우셨다. 그분은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최후를 맡기셨다. 그리하여 어둠의 세력, 의심과 불신, 죄악의 권세를 물리치셨다. 잘 산다는 것은 두려움과 불신에서 사랑과 진실의 영역으로 의식이 바꾸어지는 것이다. 바로 그 힘이 믿음이다. 죽음으로도 나를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정신력이다. 예수의 살과 피는 그 믿음과 정신력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