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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⑥ 예수가 말한 ‘가난한 마음’의 정체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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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트마 간디는 성서에도 이해가 깊었다. 조국의 독립을 맞은 그는 식민지를 떠나는 영국인에게 “당신들이 만든 예수는 가져가고, 성서 속의 예수는 두고 가라”고 말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1869~1948)는 힌두교 신자였다. 그럼에도 그는 성서를 깊이 읽었다.

간디는 “예수께서 설한 ‘산상수훈’은 종교 중의 종교다. 모든 종교의 다이아몬드”라고 표현했다.

신약성서에는 두 개의 기둥이 있다. 하나가 산상수훈이고, 또 하나가 주기도문(주님의 기도)이다. 그럼 왜 ‘산상수훈’이 모든 종교의 다이아몬드가 되고, 신약성서를 떠받치는 기둥이 되는 걸까. 마음과 비움,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얽힌 ‘삼각함수’를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산상수훈’은 한 마디로 하느님 나라의 문턱을 넘어가는 이정표다.

갈릴리 호수 뒤로 헤르몬산이 보인다. 겨울에는 마치 만년설처럼 정상이 눈으로 덮여 있다. 이곳에서 흘러온 물로 인해 갈릴리 호수가 생겼다.


갈릴리 호수는 아름다웠다. 해뜰 녁과 해질 녘에는 더욱 그랬다. 호숫가에는 끊임없이 새들이 지저귄다. 철새들이 줄지어 호수를 가르기도 한다. 호수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어찌 보면 높은 언덕 같고, 어찌 보면 낮은 산 같다. 호수 북동쪽에는 저 멀리 헤르몬산이 보인다. 겨울과 봄에는 정상의 세 봉우리가 흰 눈으로 덮여 있다. 갈릴리 호수에서 보면 마치 만년설 같다. 이스라엘 젊은이들은 거기서 스키를 즐긴다. 헤르몬산의 높이는 무려 2814m. 백두산(2744m)보다 조금 더 높다. 헤르몬산에서 물이 흘러와 갈릴리 호수를 만들고, 호수의 물은 다시 흘러가 요르단강이 된다. 그 강이 광야에서 사해(死海)를 만든다.

예수가 갈릴리에 머물 때였다. 그는 수시로 산에 올랐다. 산 위에 올라가면 호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호수 서쪽의 티베리아스, 동쪽의 거라사, 북쪽의 가버나움과 타브가도 한눈에 보인다.

산에 올라간 예수는 고요한 곳으로 갔다. 홀로 기도를 한 뒤 내려오곤 했다. 갈릴리 일대를 돌면서 예수는 몸이 아픈 이, 마음이 아픈 이들을 치유했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남녘의 예루살렘은 물론, 유다 지역과 데카폴리스, 강 건너 요르단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왔다.

사람이 너무 많아지자 예수는 산으로 올라갔다. 당시에는 마이크도 없고, 스피커도 없던 시절이다. 예수는 어떻게 그 많은 군중에게 들리도록 메시지를 전했을까. 크게 고함이라도 지른 걸까. 아니면 종이를 말아서 메가폰이라도 만들었을까.

현지에서 만난 유대인이 흥미로운 설명을 했다.
 
이스라엘의 햇볕은 뜨겁다. 낮에는 땅의 온도가 갈릴리 호수의 수온보다 높아진다. 바람이 호수에서 산 쪽으로 분다. 아래에서 위로 분다. 밤에는 정반대다. 땅의 온도가 호수의 수온보다 더 떨어진다. 그래서 밤에는 산에서 호수 쪽으로 바람이 분다.”

이스라엘의 햇볕은 뜨겁다. 낮에는 땅의 온도가 갈릴리 호수의 수온보다 높아진다. 바람이 호수에서 산 쪽으로 분다. 아래에서 위로 분다. 밤에는 정반대다. 땅의 온도가 호수의 수온보다 더 떨어진다. 그래서 밤에는 산에서 호수 쪽으로 바람이 분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화가 코시모 로셀리(1439~1507)의 ‘산상수훈’. 바티칸의 시스티나 예배당에 있는 작품이다.


마침 낮이었다. 바람이 호수에서 산으로 불었다. 테스트를 해봤다. 저만치 아래에 선 사람에게 평소 목청으로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다. 신기했다. 크지 않은 목소리임에도 바람을 타고 위쪽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마치 그리스ㆍ로마 시대의 원형극장에서 스피커 없이 울리는 소리처럼 말이다.

예수는 이런 원리를 이용하지 않았을까. 만약 그랬다면 언덕 저 아래 어디쯤 예수가 섰을 터이다. 사람들은 산 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예수를 내려다봤겠지. 귀를 쫑긋 세우면서 말이다. 그렇게 예수는 자신의 음성을 바람에 실어서 띄워 보냈을 터이다. ‘산상수훈(山上垂訓ㆍSermon on the Mount)’으로 불리는 이른바 ‘예수의 행복론’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모세가 하늘로부터 받은 율법을 철통같이 지켰다.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고 여겼다. 그들은 문자 하나하나에 집착하며 율법을 따졌다. 거기에 행복이 있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예수의 행복론’은 상식 밖이었다. 그야말로 파격이자 혁명이었다. 율법에 대한 그 모든 문자주의와 형식을 격파하며 예수는 살아서 꿈틀대는 ‘실질적 행복론’을 사람들에게 내밀었다. 첫 마디는 이랬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복음 5장3절)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복음 5장3절)


무슨 뜻일까. 요즘 사람들도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러니 2000년 전에는 오죽했을까. 사람들은 따진다. “마음은 부자여야 하는 것 아닌가. 실제 가진 게 없더라도 마음만이라도 부자여야 푸근할 텐데. 예수님은 왜 마음이 가난해야 한다고 했을까. 그래야 행복하다고 했을까. 하늘 나라까지 그들의 것이라고 했을까. 도통 알 수 없는 이야기다.” 이렇게 푸념한다.

렘브란트의 1650년 작품 ‘그리스도의 초상’. 렘브란트는 네덜란드의 유대인 거주 지역으로 아예 이사를 가서 유대인의 얼굴과 삶, 풍습을 들여다보며 이 작품을 완성했다. 예수의 눈빛이 온유하다.


예수가 말한 ‘가난한 마음’이란 대체 뭘까. 그리스어 성서에서 ‘마음’에 해당하는 단어는 ‘프뉴마(pneumaㆍspirit)’다. ‘가난’은 ‘프토코스(ptochos)’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그리스어로 ‘프토코이 투 프뉴마티(ptochoi to pneumati)’다.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뜻한다.

이 대목에서 사람들은 다시 따진다. “아니, 더 헛갈린다. 영적으로 가난한 게 대체 뭔가. 영적으로 부유할 때 우리가 하늘 나라에 더 가까이 가는 게 아닌가. 영적인 가난. 너무 추상적이라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바람이 불었다. 부드러웠다. 그 바람을 안고서 눈을 감았다. 예수가 말한 ‘가난’에는 이유가 있다. 가난하고, 가난하고, 가난해져서 결국 무언가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아무런 방향성도 없이 궁핍하고, 궁핍하고, 궁핍해지라고 말한 게 아니다. 그게 뭘까. 가난에 가난을 더하고, 그 가난에 다시 가난을 더해서 예수가 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한 건 대체 무엇이었을까.

호숫가의 언덕을 올랐다. 도로를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팔복교회(The Church of the Beatitudes)’가 있다. 예수가 ‘산상수훈’을 설했다고 전하는 곳에 세운 교회다. 그곳으로 갔다. 각국에서 온 순례객들이 여기저기서 묵상에 잠겨 있었다.

‘아! 이곳이었구나. 이렇게 생긴 언덕, 이렇게 생긴 나무들, 이렇게 생긴 풀들을 배경으로 ‘산상수훈’을 설하셨구나.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란 예수의 노래가 이렇게 생긴 언덕에서 울려퍼졌구나!’ 팔복교회는 주위 분위기가 참 평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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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교회로 들어가는 길에는 ‘산상수훈’의 메시지를 영어로 새겨놓은 팻말이 있다.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예수는 “마음을 가난하게 하라”고 했다. 다시 말해 “마음의 창고를 비우라”고 했다. 우리의 창고가 늘 무언가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게 뭘까. ‘집착(Attatchment)’이다. 접착제처럼 끈적이며 내 마음의 창고를 채우는 건 다름 아닌 ‘집착’이다.

집착할 때 마음의 창고가 찬다. 집착을 비울 때 창고도 빈다. 그 이치를 꿰뚫은 예수가 말했다. “마음을 가난하게 하라!” 불교에서는 그걸 “마음을 내려놓으라”고 표현한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 나라의 문턱을 넘는다. 불교는 불국토(佛國土ㆍ부처님 나라)의 문턱을 넘는다. 그 문턱을 넘어가는 첫 번째 징검다리가 서로 닮았다. ‘마음의 창고를 비워라.’

팔복교회 주위의 나무와 풀, 그리고 꽃들을 둘러보면 예수 당시의 ‘산상수훈’ 풍경이 눈앞에 그려진다.


갈릴리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다. 권력과 재력을 모두 갖춘 사람이 예수에게 물었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누가복음 18장18절)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누가복음 18장18절)


예수는 “간음하지 말고, 살인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며 구약의 십계명을 일러주었다. 그러자 권력가는 “그건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라고 대꾸했다.

권력가는 자기 안의 집착을 보지 못했다. 그에게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너에게 아직 모자란 게 하나 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너에게 아직 모자란 게 하나 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이 말을 듣자 비로소 그 사람은 낙담했다. 그는 굉장한 갑부였기 때문이다. 이어서 예수는 말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가기는 참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누가복음 18장25절)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가기는 참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누가복음 18장25절)


삼성의 창업주 고(故) 이병철(1910~87) 회장도 이 물음을 던진 적이 있다. 타계 한 달 전에 가톨릭의 고(故) 박희봉(1924~88) 신부에게 건넨 종교적 내용의 질문지에는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약대(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라는 문항이 담겨 있다. 예수가 말한 ‘부자’의 속뜻은 무엇일까. 정말 재산이 많은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가기가 어려운 걸까.

사람들은 오해한다. 예수의 메시지를 문자적으로 해석한다. 예수는 왜 권력가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했을까.

이유가 있다. 계명을 지키고 율법을 지킨다는 뿌듯함으로 바깥만 바라보는 그의 눈을 자기 안으로 돌리기 위해서다. 눈을 돌려서 마음의 창고를 보게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모든 걸 던지라”고 했다.

다시 말해 “마음의 창고를 다 비우라”고 했다. 마음 창고에 대한 ‘전면적 포맷’을 요구한 것이다. 모든 바탕을 하얗게 바꾸면 그 위의 까만 점들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자신만만하던 권력가는 그제야 절망한다. 자신이 틀어쥐고 있던 집착이 비로소 보였기 때문이다. “모든 걸 던지라”는 말 앞에서 ‘도저히 던질 수 없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예수가 설한 ‘가난한 마음’이다. 가령 마음의 창고를 비운 백만장자와 돈에 대한 집착으로 가득한 걸인 중에 누가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울까. 누가 더 가난한 마음을 가진 걸까. 가진 게 많다고 반드시 집착이 많은 건 아니다. 또 가진 게 없다고 꼭 집착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예수가 들이민 잣대는 ‘재산의 총액’이 아니라 ‘집착의 총액’이었다.
 

헝가리 화가 카롤리 페렌치(1862~1917)의 ‘산상수훈’. 헝가리의 사람과 자연 풍경을 배경으로 예수가 산상수훈을 설하고 있다. 부드러운 붓터치가 예수의 메시지와 잘 어울린다. 부다페스트의 헝가리국립미술관 소장.


그래도 사람들은 따진다. “어떤 목표를 세워서 추구할 때는 집착이 있어야 하지 않나. 그 집착 때문에 에너지가 생기고, 추진력이 생기는 것 아닌가. 어떻게 집착도 없이 이 무한경쟁 사회를 살아갈 수 있을까.” 그렇게 묻는다.

과연 그럴까. 중국땅에 선불교의 꽃을 활짝 피웠던 육조 혜능 대사는 『육조단경』에서 “마땅히 머무는 바없이 마음을 내라(應無所住 而生其心)”고 했다. ‘머무는 바없이 마음을 내라’는 건 ‘집착 없이 마음을 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구절 앞에 ‘마땅히(應)’란 단어가 붙는다. 왜 그럴까. 그게 너무도 마땅한 우주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정상급 골퍼들의 단골 어록이 있다.
힘을 빼라. 어깨에 힘을 빼고, 팔에 힘을 빼고, 손에 힘을 빼라.”

힘을 빼라. 어깨에 힘을 빼고, 팔에 힘을 빼고, 손에 힘을 빼라.”

이 모두에 힘을 빼려면 어떡해야 할까. 그렇다. 마음에 힘을 빼면 된다. 욕심 때문에, 집착 때문에 힘이 들어가니까.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욕심을 갖고, 집착을 가져야 더 멋진 샷이 나오는 게 아닐까. 그래야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아닐까.

왜 프로들은 거꾸로 “힘을 빼라”고 하는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힘을 주면 비거리와 정확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집착이 강할수록 몸이 굳고, 샷이 망가진다.

『장자』의 ‘외편’에 나오는 일화다. 사람들이 활쏘기 내기를 했다. 질그릇을 걸고 내기를 하니까 과녁을 팍!팍! 맞혔다. 이번에는 값이 좀 더 나가는 띠쇠를 걸었다. 그랬더니 명중률이 좀 떨어졌다. 마지막에는 황금을 걸었다. 그러자 화살은 아예 과녁을 빗나갔다. 왜 그럴까. 집착 때문이다. 머무는 바없이 활 시위를 당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혜능 대사가 “머물지도 말고, 마음도 내지 마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그럼 사람들의 우려가 맞다. 마음을 내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 요즘도 ‘수행=고요한 상태만 유지하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게 스윙을 하지 않으면 어찌 될까. 고요함 속에만 머물면 어찌 될까. 일상의 삶을 꾸려갈 수가 없다.

예수가 “마음의 창고를 비우라”고 한 건 텅 빈 고요 속에만 머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고요를 품은 채 지혜로운 스윙을 하라는 거다. 그래서 혜능 대사도 “마음을 내지 마라”가 아니라 “마음을 내라”고 했다. 머무는 바없이 마음을 내라고 했다. 자신의 삶 속에서,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가난한 마음으로 적극적인 스윙을 하라고 일갈했다.
 

팔복교회의 정원에 꽃이 피어 있었다. 머무는 바없이 마음을 내는 것과 집착 없이 피어나는 꽃. 둘은 그렇게 통한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양자 택일’을 일깨운 적이 있다. 예수가 말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복음 6장24절)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복음 6장24절)


예수는 똑 부러지게 말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가 없다.” 사람들은 헛갈린다. 그럼 하느님을 섬기는 이는 재산을 모아선 안 되는 걸까. 경제활동도 해선 안 되는 걸까. 재물은 어디까지 용인이 되는 걸까.

여기에도 ‘가난한 마음’의 코드가 숨어 있다. 예수가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지적한 두 가지는 하느님과 재물이다. 다시 말해 ‘비움’과 ‘집착’이다. 우리는 비움과 집착을 동시에 취할 수 없다. 비움을 붙들면 집착을 놓아야 하고, 집착을 붙들면 비움을 놓아야 한다. 둘 다 취할 수는 없다. 하나가 사라져야 다른 하나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자 택일’이다.

예수는 그저 소박하게 살라고 “마음을 가난하게 하라”고 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각별한 이유가 있다. 마음이 가난해질 때 비로소 ‘없이 계신 하느님’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음의 창고를 비워야 ‘하느님 나라’와 통하게 된다.

왜 그럴까. ‘가난한 마음’이 곧 ‘하느님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신의 속성’이다. 아무런 집착도 달라붙지 않는 자리, 거기가 바로 ‘하느님 나라’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팔복교회의 분위기는 평화로웠다. 언덕 아래에는 갈릴리 호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나무 그늘이나 구석진 벤치에서 묵상에 잠긴 이들이 많았다.


해가 하늘 높이 올랐다. 이스라엘은 겨울에 비가 잦다. 그래서인지 갈릴리 호수 주변도 초록이 무성했다. 수년 전 여름에 왔을 때보다 더 푸르렀다. 햇볕은 따사했다. 한국으로 치면 봄볕이었다. 주위에는 온갖 꽃들이 피어 있었다.

특히 노랗게 무리지어 하늘거리는 겨자꽃이 참 예뻤다. 2000년 전에도 저런 들꽃들이 있었겠지. 예수가 ‘가난한 마음’으로 사람들이 거머쥔 ‘집착’을 겨냥할 때도 겨자꽃은 주위에 만발했겠지.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하느님 나라 때문에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누가복음 18장29~30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하느님 나라 때문에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누가복음 18장29~30절)


사람들은 이 구절도 종종 오해한다. 무작정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를 따르려면 집도 버리고, 부모도 버리고, 처자식도 팽개치고 따라나서야 한다고 풀이한다. 그 대가로 천국에서 상을 받는다고 여긴다. 이 때문일까. 중동의 이슬람 땅에 가서 목숨을 걸고 선교를 하는 이들은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예수가 겨눈 건 그런 식의 ‘맹목적 충성’이 아니었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 하물며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을까. 예수가 겨누는 것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가족에 대한 집착’이다. 그럼 왜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리라고 했을까. 그들에 대한 집착이 ‘하느님 나라’를 가리기 때문이다. 그런 집착을 안고서는 진정으로 예수를 따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버리라고 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을 버리라고 한 게 아니라 ‘가족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했다. 그런 뒤에 “나를 따르라”고 했다.

프랑스의 판화가 구스타프 도레의 ‘산상수훈’. 판화 작품인데도 빛과 어둠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예수의 ‘산상수훈’은 마음의 어둠을 걷어내는 실질적인 행복론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어떻게 집착 없는 사랑이 가능한가. 집착이 있어야 사랑도 있는 것 아닌가.” 그건 ‘작은 사랑’이다. 다시 말해 사랑의 가면을 쓴 욕망이다. 예수는 큰 사랑을 말한다. 우리는 종종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집착을 자식에게 강요한다. 결과는 늘 좋지 않다. 주위를 둘러보면 안다. 자식을 지혜롭게 키우는 이들은 다르다. 그들은 강하게 집착하지 않는다. 그저 사랑으로 지켜본다. 그게 ‘집착 없는 사랑’이다. 혜능 대사가 말한 ‘머무는 바없이 마음을 내는’ 사랑이다. 예수는 그걸 ‘가난한 마음’이라 불렀다.

구약에서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바치라고 요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브라함은 말년에 아들을 얻었다. 그러니 얼마나 애지중지했을까. 그 집착이 오죽했을까. 그런 집착이 하느님 나라를 가리기라도 했을까.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아킬레스건’을 찔렀다. 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고 했다. 아브라함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어린 양이 아닌 어린 자식을 번제로 바치라니 말이다. 번민에 번민을 거듭하던 아브라함은 결국 아들을 향해 칼을 빼든다. 그때 신의 음성이 들린다. 왜 그럴까. 집착이 끊어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집착이 소멸할 때 신의 음성이 들리고, 집착이 무너질 때 하느님 나라가 드러난다. 그래서 예수는 자꾸 자꾸 강조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렘브란트의 1635년 작품 ‘이삭의 희생’. 러시아 생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 소장. 아브라함이 칼을 빼드는 순간, 천사가 나타나서 말리고 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가 설한 행복은 깊다. 로또에 당첨됐다고 덩달아 따라오는 얕은 행복이 아니다. 그런 식의 ‘사라지는 행복’이 아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서 ‘행복’은 그리스어로 ‘마카리오이(Makarioi)’다. 그건 잠시 작용하고 사라지는 행복과는 차원이 다른 행복이다.

왜 그럴까. ‘마카리오이’는 신의 속성을 공유할 때 피어나는 행복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행복이다. 하느님의 마음, 그 속성 자체가 ‘마카리오이’다. 그러니 ‘예수의 행복론’은 요즘 우리 사회 여기저기서 붙여대는 ‘일회용 행복 반창고’와는 차원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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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교회의 입구. 출입문 위에는 ‘산상수훈’ 그림이 붙어 있었다.

팔복교회 입구로 갔다. 출입구 위에는 칼 하인리히 블로흐의 ‘산상수훈’ 그림이 붙어 있었다.

그림 속 예수의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의 표정이 제각각이다. 바위 앞의 남자는 두 손을 모은 채 마음을 연다. 예수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설교에 집중한다.

그의 왼편에 앉은 여인은 깍지 낀 손을 이마에 댄 채 눈을 감았다. 예수의 메시지가 이미 그녀의 가슴을 찔렀기 때문이다.

가장 맑은 얼굴로 예수의 메시지를 듣는 이는 여인 뒤에 선 어린아이다. 반면 바위 뒤편의 나이 지긋한 남자는 팔짱을 낀 채 예수를 노려본다. 유대의 율법과 너무나 다른 ‘산상수훈’이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아 보인다.

여인의 눈은 내면을 향하고, 그의 눈은 바깥을 향한다. 200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누구의 눈은 안을 향하고, 누구의 눈은 밖을 향한다. 예수가 우리에게 묻는다.
 
너의 눈은 어디를 향하는가?”

너의 눈은 어디를 향하는가?”

칼 하인리히 블로흐의 작품 ‘산상수훈’.


교회 안으로 들어가 빈 의자에 앉았다. 교회의 천장은 팔각형이었다. 여덟 개의 면마다 팔복의 메시지가 하나씩 적혀 있었다. 그 메시지들을 하나씩 안고서 눈을 감았다. 산상수훈의 두 번째 메시지가 울렸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복음 5장4절)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복음 5장4절)



[7회에서 계속됩니다.]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페이스북 주소 : www.facebook.com/baiksungho)


[출처: 중앙일보] [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⑥ 예수가 말한 ‘가난한 마음’의 정체는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