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주일 - 나는 무엇인가?
2016.03.28 00:24
부활 주일 -
나는 무엇인가?
요한복음 2:21-25
칸트는 74세 때 마지막 작품으로 ‘인간학’을 썼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책을 세권이나 썼다는 칸트는 자신의 인생경험을 통하여 인생의 도는 평상심에 있다는 것을 설파해 주고 있다. 아파보면 건강의 중요성을 절감하듯이 인간이 철이 든다는 것은 일상의 모든 것이 넘치는 은혜이고 감사의 조건임을 깨닫는 것이다. 가장 평범한 것이야말로 알고 보면 가장 비범한 것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칸트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는 30년 동안 지리학과 인간학을 강의 했는데 철학의 내용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1.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나? 2.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나? 3. 인간은 무엇을 바랄 수 있나? 4.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말했다.
인간은 물음이 있어 인간이다. 내가 나를 묻는 존재가 인간이다. 스승은 물음 앞에 제자를 세우는 사람이다. 그 물음으로 인간을 인간으로 이끌어 준다. 칸트는 자신은 학자로서 지식에 대한 강렬한 욕구가 있었고 그와 동시에 지식에 대한 한없는 교만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지식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무식한 사람들은 인간도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그가 루소를 만나고 나서 인간에게는 지식 이상의 세계와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든 애벌레들이 새로운 차원의 나비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인간 속에는 깊이 감추어진 인간의 본성과 숨겨진 법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애벌레 차원의 지식을 벗어나서 그 법칙을 알고 실천할 때 인간의 존엄성이 드러난다는 것을 루소를 통하여 깨닫게 된 것이다. 그 때서야 칸트는 인간을 무시하지 않고 존경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칸트는 지식을 추구하는 머리형 인간으로서 머리공부로는 인류의 정점에 선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식의 공간이 깨어지고 영혼의 빛이 조명하는 공부를 하면서 칸트는 자신을 완성하는 인간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서재에 루소의 초상화를 유일하게 걸어놓았다.
칸트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만나는 이웃들과 어떻게 사이좋게 살아가느냐 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인간의 삼대 명제 공간, 시간, 인간이 모두 사이 間자를 사용하는 바처럼 사이좋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인생의 덕목이다. 내 생각과 감정만 주장하고 앞세우게 되면 사이는 깨어지게 된다. 평화는 사라지게 된다. 그 바탕에는 이기주의가 있다. 인간은 세계 안에 살고 있고 세계 시민으로서 수많은 사람과 함께 살고 있으면서도 세계 전체를 자기 안에 포섭하려는 자아의 횡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기에 자기 밖의 다른 사람들의 인격도 존중할 줄 아는 다원론의 입장에 서야 자기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단원론에 서서 자기만의 생각을 고집하기 때문에 이기주의에 갇혀있다고 말하였다.
자기 초월의 삶으로의 변화
인간은 인간과 더불어 성장하고 인간이 되어간다. 성장의 단계마다 자기 초월과 의식의 상승이 있다. 물이 포도주가 되듯이 맹물처럼 맛없는 인생이 삶을 신명나게 살게 되는 경우도 있다. 사는 것도 두렵고 죽는 것은 더욱 두려워 죽지 못해 살던 사람이 생사로부터 벗어난 해탈의 삶을 살 수도 있다. 요한복음이 술 떨어진 잔치판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기적을 맨 처음 소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삶을 잔치로 사느냐? 죽지 못해 사는 지옥으로 사느냐? 하는 갈림길에 우리는 서있다. 칸트가 루소를 만나 새로운 하나님을 만나듯이 예수를 만난 제자들은 예수와 더불어 새로운 인류의 시대가 시작된 것을 보았다. 이 깨달음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난 뒤에 일어났다. 예수의 삶과 죽음을 되돌아 본 후에야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바둑기사가 복기를 하면서 자신의 실수를 확인하고 반성하는 것처럼 부활의 조명 안에서 예수 안에 있었던 하나님의 생명이 어떻게 죽음을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거듭나게 하였는지를 보게 된 것이다. (2:22)
저자는 요한복음의 서두에서부터 삼년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저자의 모든 생각 속에는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 삶의 초점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과거와 미래의 예수를 현재적 사건으로 경험하고 있다. 예수의 공생애 초기의 사건으로 배치된 성전 정화 사건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전조이다. 성전의 회복을 염원했던 예수의 불같은 사랑은 예수를 스스로 불태워 성전의 제물로 바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 덕분에 물이 술로 바꾸어지듯이 지금까지의 전통보다도 완전하고 더 좋은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은 건물 성전이 인간 존재의 성전으로, 동물의 희생제사가 예수의 희생 제사로 바뀌게 되는 일이었다.
눈에 보이는 건물 안에만 하나님이 계신다는 생각에서 ‘나’라고 하는 존재 안에 모신 하나님으로, 나의 일상생활 속에서 함께 하시는 아빠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벌주고 심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용서하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예수는 말씀하셨다. 요한 저자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고 예수가 행하신 표증을 기록한다고 하였다. (20:31) 그리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표증을 보고 믿었다. (2:23) 그럼에도 기적에 바탕을 둔 믿음은 한계가 있다. 그것은 자신이 원하는 생각 밖으로 나가기 어려운 것과 정작 자기 자신을 아는 이해로 들어가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 그러기에 예수는 공생애 후반에 갈수록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고 표증을 원하는 ‘그 유대인들’에게도 표증을 보여주지 않았다. (2:18)
중요한 것은 예수의 기적이 아니라 그 분에 대한 신뢰(피스티유오 2:24)이다. 예수를 신뢰하지 않고 신비한 기적과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예수를 이용만하려는 사람들을 예수는 신뢰하지 않았다. 나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 예수의 제자들조차 부활 사건 후에야 예수를 신뢰할 수 있었다는 점을 우리는 깊이 묵상하여야 한다. ‘나는 예수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가? 몇 퍼센트나 믿고 있는가?’를. 예수는 사람들의 마음을 환히 알고 계신다. (2:25) 저자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주님은 나를 꿰뚫어 알고 계신다.
신뢰하는 믿음의 회복
믿음은 나라고 하는 알껍질을 깨뜨려 나 밖의 세계와 연대하고 참여하여 더불어 사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불의한 세계와 역사를 외면하고 나 홀로만 안일을 찾는 신앙은 성서적 신앙이 아니다. 참된 믿음으로 들어서기 위해서 우리가 극복해야 될 과제는 망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인간의 감각은 외감과 내감이 있다. 망상은 내감의 영역으로 자신의 상상을 객관적 실제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은 외감을 차단하고 내감으로만 들어가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발생하는 일이다.
몸이 있는 인간은 에너지를 외부에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무시하는 인간은 자기 망상과 인격 분열에 시달리게 된다. 인간은 내면의 무한 깊은 곳으로 도망칠 수 있다. 그것을 수행이라고 착각하며 세월을 낭비하는 사람을 보면 안쓰럽다. 독서하지 않고 남의 말과 충고를 귀담아 듣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 위험에 빠진 사람이다. 인간의 고통은 노동과 사색과 지혜의 추구가 사라진 안일함과 권태이다. 권태의 끝은 자살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써 누리는 기쁨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안일함이 아니라 자신의 사명을 열심히 완수하는 부지런함에 있다. 그 때 우리는 생의 약동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은 자기의 일을 찾고 동시에 새롭게 삶을 창조해 가야 한다. 나라고 하는 존재의 새로움, 내가하는 일의 새로움이 있을 때 우리는 타성을 벗어난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예수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다. 예수는 제자들을 불러 물로 포도주를 만들 듯이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셨다. 성전이라는 공간을 벗어나 자기 초월의 삶으로 안내하셨다. 그 새로운 삶이 부활의 삶이요 신앙이다. 이 부활의 믿음이 우리를 용기 있게 도전하게 하고 창조적인 삶으로 안내한다. 내 생각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생각으로 나를 무한하게 성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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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님
오늘도 주시는 향그럽고 맛좋은 새 포도주,
관념의 돌무덤에서
사라진 예수를 만나러
나의 갈리리
나의 엠마오로 달립니다
고 맙 습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