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2016.04.18 03:06
2016, 4 ,17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요한 3:16 – 21
요한복음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내가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으로 거듭 거듭 깨어나는 일임을 강조하고 있다. 살다보면 왠지 모를 답답함과 짜증에 시달릴 때가 있다. 그런 때는 영감의 샘이 말라있고 삶에 대한 신선한 감각이 죽어 있다. 답답함은 타인과 자신에 대한 공격성을 불러 온다. 바로 그 때 우리는 깨끗한 물로 몸을 씻어내듯 신선한 마음과 하늘과 통하는 영적 각성이 필요한 때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봄날의 산천이 깨어나 저마다 자기완성의 첫걸음을 열심히 내딛는 것처럼 우리도 날마다 새로워지는 각성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생각과 영혼의 성장이 정지된 사람은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이다. 뱀이 지혜의 상징동물인 것은 낡은 허물을 벗지 못하면 죽기 때문이다. 허물을 벗는 것이 생사의 전제 조건이 된다는 점에서 인간 역시 자신의 낡은 의식의 허물을 때마다 벗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삶의 주제인지 알아차려야만 한다.
이 세상을 비본질적인 것으로 보는 그리스의 이원론자들과는 달리 요한은 이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물론 이 세상은 죄와 고통과 온갖 시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 그 사랑은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킬 만큼 큰 사랑이다. 오늘의 많은 사람들이 헬 조선을 외치고, 크리스챤들은 세상을 교회로 대치시켜 이해하는 경향도 있지만 세상은 멸망할 저주의 세상이 아니라 사랑과 구원의 대상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이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를 보낸 것이다.
이 세상이 멸망하지 않게 하시려고 그리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진정한 인간회복이 일어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예수를 지구에 보내셨다. 세상이란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의 선물이며 땀 흘려 가꾸어야할 경작지다.
두 갈래 갈림길
예수를 만나게 되면 이 순간 내가 인생의 결정적인 갈림길에 서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생명의 길이냐? 아니면 죽음의 길이냐? 하는 두 갈래 선택이다. 하나님이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표현은 50여 곳이 등장할 만큼 요한복음의 두드러진 표현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정죄하려 함이 아니라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17절) 그리스어 동사 ‘크리노’는 판단하다, 정죄하다, 결정하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나온 영어 단어가 crisis(위기, 혼란, 갈림길)과 critic (비판, 비평, 판단, 숙고)이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갈림길 곧 어떤 생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결정이 나누어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 예수는 사람들을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삶 자체가 이미 정죄 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자 보시기에 아름답게 창조한 지구에서 두려움의 노예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달리 정죄할 것도 없다는 관점을 깊이 숙고 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이미 어둠 속에서 길을 잃었고 악한 행동으로 지옥을 살아가고 있다. ( 18 –19절 ) 인간은 자기 심판의 올무에 걸려 있다.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지는 최후 심판은 이미 시작 되었다. 심판은 먼 미래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결정하는 순간순간마다 자기 심판이 일어나고 있다. 저자 요한의 종말(에스카톤, 끝)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실제로 우리는 우주 창조의 시간 가장 끝자락에 있다.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지구 시간에서 벗어난 지금 여기는 영원이라는 차원의 조명을 받는 지금 여기이다.
지금 – 가장 치열한 전생이자 내생
3차원의 시간 끝에 영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이 깨어져 과거 현재 미래가 사라진 그 자리에 영생은 있다. 내가 지금 천국에 가있어 그 곳에서 지금 여기를 돌아본다면, 지금 이 순간이야 말로 가장 치열한 전생임을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 치열한 내생임을 또한 이해할 것이다. 영혼의 스승들은 지구에서 지구를 초월하는 이 주제를 강조했다. 지구의 공간과 시간에 매인 의식이 깨어질 때 새로운 마음과 영의 세계를 이해 할 수 있다.
우리가 어찌
초면일 리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오기 전 우리는
하느님의 의자 밑에서
숨바꼭질하며 놀지 않았던가요
우리가 다시
그분에게 가면
쓸데없는 근심으로 지새우던
오늘을 웃지 않겠습니까
몸뚱이를 나로만 알던
철부지 어린 시절을
화내고 욕심 부리던 일들을
부끄러워하지 않겠습니까
- 전생을 묻는 이에게
빛은 어둠에서 태어난 것이기 때문에 모든 빛깔에는 그림자가 있다. 빛이 어둠을 찾아오면 어둠이 물러가지만 그림자가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빛이 나에게 오면 나의 어둠과 그림자는 물러나야만 한다. 그 순간 우리는 어둠을 붙잡아야 할지 빛을 선택해야할지 하는 선택의 문제에 봉착한다. 판단과 결정의 순간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어둠을 선택한다. (19절)
성서 속의 인물들은 가장 결정적인 삶의 선택을 어떻게 했는지를 보여 준다. 예수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엄습해오는 어둠의 권세에 굴복하지 않고 빛을 선택하였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선택한 것이다. 본문 앞에 등장하는 니고데모는 빛을 선택한 사람이다. 베드로는 어둠을 선택하는 과오를 범했지만 돌이켜 빛을 선택하였고 빛의 길을 걸어갔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어둠을 스스로 선택하여 영원한 멸망의 길을 걸어갔다.
인생은 선택이다. 사랑이냐 미움이냐, 정죄냐 용서냐, 그 선택은 미래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내 일상적 삶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바로 이 선택을 올바로 하도록 하기 위하여, 멸망의 길을 가지 않고 영생하는 빛의 길을 가는 사람으로 안내하기 위하여 예수는 우리에게 오셨다. 그 분은 우리에게 인간의 길을 가는 데 있어 지금 가장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선택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그 선택은 내 생각에 바탕을 신념의 믿음에서 깨어난 통찰의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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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지도 않고 지키시는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 안에서는 ''지금, 여기''가 전생이며 내생입니다
참 고 맙 습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