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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의 애환과 망향 탑의 향수

2016.07.24 06:12

물님 조회 수:3680



섬진강의 애환과 망향 탑의 향수 

                  시인  이 병 창


임실은 그리운 ‘님’이 사는 마을(실)이라는 뜻이다. 그리움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정서이고 문학의 원초적 바탕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임실이라는 지명이 더욱 친근하기만 하다. 임실군은 산세가 아름다워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산과 산이 첩첩 둘러 있어 마치 병풍을 두른 것처럼 아름다운” 고장이라고 표현했다.  노령산맥의 한 봉우리인 장수군의 팔공산을 중심으로 하여 산줄기가 크게 세 갈래로 뻗치는 데 서북쪽으로 뻗은 줄기가 성수면의 성수산을, 지사면에 주봉을 만들었고 또 한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임실읍에 두만산을, 강진면에 백련산을 , 덕치면에 회문산을 만들었고 나머지 북쪽으로 뻗은 줄기가 마이산을 만들었다.
 임실이라는 지명의 역사를 살펴보면  백제 때에는 임실현 또는 운수현이라고 불렀다. 백제는 섬진강의 배편을 이용하여 일본과 교류를 활발히 하였는데 그 때문에 섬진강의 상류에 속하는 청웅면, 강진면, 덕치면, 운암면, 관촌면은 일찍부터 번성하였다. 그러나 통일신라와 고려 시대를 거치면서 점차 쇠퇴하여 남원부의 속현으로 있었지만 1895년에 다시 남원부에서 떨어져 나와 임실군으로 독립하였다.
 
   한 많은 사연의 운암 저수지


전북에서 가장 큰 저수지이며 만경평야의 젖줄인 운암 저수지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전부터 주목한 곳이었다. 만성적으로 식량부족에 시달리던 일본은  호남평야에 물을 대기 위한 수원으로서 섬진강 물을 끌어올려 터널을 통하여 공급하게 하였다. 그 과정에서 산외면 종산리에 한국최초의 수력발전소가 세워지게 된다. 후에 세워진 칠보발전소로 통폐합되기는 했지만 지금도 종산리에는 그 유적이 남아있다. 터널을 뚫을 때 몽고인들을 동원해서 강제노역을 시켰는데 사고로 숨진 사람들이 많아 밤이면 노역자들의 슬픈 울음소리가 많았다고 촌로들은 증언하고 있다. 종산리 발전소 건물이 지금도 튼튼한 것은 당시에 모래를 물로 씻어서 시공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내용들을 유추해 보면 일본은 한국을 영원한 속국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65년에 운암강 하류인 강진면 옥정리에 섬진강 다목적 댐이 건설되게 되고 옥정호 또는 운암 저수지라는 이름으로 통하는 저수지가 생기면서 운암면의 땅 8백여만 평이 수몰되었다. 이 땜으로 인해 발생된 일 만 오천여명의 수몰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부안군 계화도 간척지가 조성되게 된다. 보상금을 받고 이주해간 사람들이 일만 여명이라고 하지만 당시의 계화도는 뻘흙탕이고 임실에서 사뭇 외딴 지역이어서 이사를 가지 않고 버틴 주민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들은 물이 들어오지 않는 산 위로 옮겨 비좁은 경작지를 일궈 살아가게 되었다. 계화도로 떠난 사람들도 그곳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현대사에서 임실 지역이 겪은 가장 큰 아픔이었던 옥정호의 사연은 아래 사진에 등장하는 ‘망향탑’이 상징해 주고 있다. 망향탑에 함께 자리한  시비에는 김춘자의 시가 새겨져있다.
 
“국사봉 아래 운암강 흘러 흘러 이룬 터전/ 하늘 아래 구름과 땅 위에 바위가 어우러진 운암/산자락엔 실한 열매 가득하고/조상님들 얼과 혼이 서린 골짝마다/오순도순 들어앉은 마을들/ 수 천년을 살았던 땅 수 만년을 이어갈 땅/ 몸 부쳐 살 던 집 마음 바쳐 잣던 문전옥답
속수무책 차오르는 물 속에 잠기는데/희로애락 함께 하던 이웃들과 뿔뿔이 흩어지는데/설움은 삼켜도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멈출 수 없었다./삶의 터를 잃고 떠나야만 했던 애달픈 운암사람들/안타깝고 눈물겹던 그날들은 시간 속에 흘러간다.“(중략)
-사라진 흔적 가슴에 새기며-
     
  댐 건설로 인해 삶이 뿌리 채 뽑혀진 임실 지역의 문제와 강을 떠나지 않고  곤고한 삶을 지탱해가는 사람들의 애환이 문학의 한 소재가 되어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은 김용택 시인의 섬진강이다.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 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섬진강 1-

 

김용택의 시가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80년대의 상황과 맞물려 있다. 그는 군부독재의 가혹한 시대에  핍절한 농촌의 현실과 역사적 상황을 방관적 순수 서정이 아닌 서정시로 함께 담아냈다. 그의 시에서 서정과 역사가 하나로 녹여지게 된 것이다. 시인이 살고 있는 임실이라는 농촌의 현장에서 농민의 시선으로 바라본 그의 시는 농민시의 계보로 평가되고 있다. 바로 이런 관점 때문에 그의 시는 여타의 순수 서정시나 참여시와는 다른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다.   
문학이라는 인간의 정신활동은 작가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삶의 현장과 무관할 수 없다. 그 삶의 현장은 역사적 현실과 맞물려 있다. 이런 관점에서 임실문학의 지평 역시 이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60년대에는 강제 이주로 삶의 터전을 잃었다면 70년대 이후에는 산업화의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시골학교들은 거의 폐교가 되고 면소재지에 하나만 남아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정황 속에서 남아있는 자들의 몫과 책임이 크다.  특히 임실의 문학인들은 지역사회에 어떤 희망을 제시하고 노래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이다. 아무쪼록 한국인들이 가장 살고 싶어 그리워하는 땅, 임실이 되기만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