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의 세 가지 주제
2017.04.07 05:42
창세기의 세 가지 주제
인간의 깨달음을 설명할 때 ‘卽非의 原理’로 설명하곤 한다. 늘 때 되면 먹는 것이 밥 인줄 알았는데 부도가 나서 길바닥에 나 앉고 보니 ‘그동안 먹던 밥이 밥이 아니었구나’ 하고 눈물과 함께 밥을 먹게 되었을 때 밥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대낮의 태양이 빛 인줄만 알았는데 밤의 우주를 보는 데는 어둠이었구나 하고 깨닫는 것이다. 신앙도 마찬가지 이다. 내가 죽게 되었을 때, 자식이 깊은 병에 결렸을 때 더 뜨겁게 기도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고난이 주는 축복을 신앙의 선배들은 강조하곤 했다.
나라가 망해서 바빌론으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뒤늦게 자신들이 왜 여기에 끌려왔는지 반문하면서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과거의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하다가 광야로 탈출해서 세운 피어린 나라의 역사를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노예들이 꿈 꾸는 세상은 채찍 맞으며 노동에만 시달리는 노예가 없는 세상일 것이다. 그런 세상을 세우기 위해 굶어 죽을 각오, 목이 말라 죽을 각오를 하고 광야로 나갔던 조상들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노예를 부리고 약자를 억압했던 자신들의 삶을 반성하게 되었다.
BC 586년 바빌로니아 포로로 끌려가서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의 키루스(고레스) 대왕이 BC 538년 유대인들에게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허용했을 때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면 이렇게 살아보리라 하는 다짐이 있었다. ( 유대인 공동체 가운데 일부는 자발적으로 유배지에 남아 살았다. 왕비 에스더의 무덤 밑에는 지금도 유대인 회당이 있고 고대로 부터 전해지는 두루말이 성경이 보존 되어 있다. )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고백을 창세기에 담았다.(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구약 성경에 언급된 책은 유다왕의 역대지략, 야살의 책, 여호와의 전쟁기가 있다.) 창세기 족보가 기록된 역대기가 쓰여진 시기는 바벨론 포로기 (BC 605~586년)이후인 에스라 선지자가 활동한 BC 480~440사이로 보고 있다. 역대하 마지막 부분에 바사왕 고레스 원년이 나오는 데 에스라서 1장에도 바사왕 고레스 원년이 언급되고 있다. 이 기록이 역대하와 에스라의 저자가 동일하다고 보는 근거이다. 에스라에 나오는 족보와 역대기의 족보, 창세기의 족보는 같은 사람이 쓴 것으로 보고 족보를 쓴 사람과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쓴 사람이 동일인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모세 오경은 디아스포라 노예집단으로서의 경험을 한 그 후예들이 정리하고 예배 시에 활용되었다. 창세기에는 나라가 망해서 개처럼 끌려간 체험을 뼈저리게 경험한 사람들의 신앙 선언이 담겨 있다. 그 중에 우리가 깊이 참고해야할 주제들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주제이다. 다시 말하면 창조세계를 아름답게 감탄하신 하나님의 눈을 뜨자는 다짐이다. 그 눈을 잃어버릴 때 인간은 눈먼 사람이 된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1:3-4 )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1:10)
창조를 마치신 후에 하나님은 “보기에 심히 좋았다” (1:31) - 이 구절은 보기에 좋았다 – 10,12,,18,21,25 과 달리 심히, 완벽하게 감탄하고 만족 해 하신다고 표현되어 있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보지 못했구나 하는 처절한 반성과 회개를 통하여 아름다운 것을 아릅답게 보는 눈이 떠진 사람들이 성경을 기록했다. 돈을 아름답게 보고 남보다 우월적인 위치에서 거들먹거리는 것을 아름답게 보던 눈이 정화된 사람들이 성경을 기록했다.
신앙도 예술도 눈 뜨는 것이 핵심이다. 그림 한 점을 감상하는 데도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보는 눈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낌이 있고 그 느낌 만큼 표현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이다. 마가복음의 핵심은 예수님 당시 그 분을 알아보는 눈을 뜬 사람의 한 명도 없었는데 영안을 뜬 사람은 오직 바디메오 하나 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디메오는 예수님이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고 했을 때 ‘저는 위를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해 주세요’라고 말했다.
두 번 째는, ‘인간은 하나님의 숨을 자각할 때 살아있는 영적 존재’라는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의 모양을 만들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은 존재가 인간이라는 선언이다.
“하나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 2:7 )
그렇다면 최초의 아담에게만 코에 생기를 넣어주신 것인가? 아담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아담과 나를 분리해서 생각하면 창세기의 원뜻을 잃어버리게 되고 창세기는 종교적 경전이 아니라 동화 같은 이야기가 된다.
지금 이 순간 내 코에 하나님은 생기를 불어 넣어 주시고 있지 않은가. 이것을 알아차리고 살아가는 것이 기도요 깨어있는 신앙이다. 숨이란 내가 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내 온몸에 채워지는 사건이다. 그 덕분에 내가 살아있다. 따라서 생명의 주권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숨을 주시는 하나님에게 있을 뿐이다. 만약 내가 스스로 숨을 쉬는 것이고 생명의 주권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는 흙덩어리로 누워있는 비존재 일 뿐이다.
하나님의 눈을 뜨고 하나님의 숨을 쉬는 자각이 없으면 그는 영적으로 죽은 인간이다. 그들은 보내신 분이 있어 이 지구에 왔다 가는 존재가 나라는 사실을 모르고, 육체를 나로 알면서 죽으면 끝이라는 신념을 갖게 된다.
세 번 째는 자연과의 관계이다.
“ 내가 바다에 사는 물고기와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와 땅위에 기어다니는 온갖 짐승들을 다스릴 권한을 너희에게 주마. 너희는 그것들을 다스리고 잘 관리하여라. (1:28)
‘라다’라는 말은 먹이고 입히고 양육하고 서로 호혜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나무의 산소를 인간이 마시고 산다. 인간은 모든 생명을 신바람 나게 살게하는 역할을 하라는 책임을 맡은 존재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환경문제에 민감해야할 책임이 여기에 있다.
영국 여행을 하면서 그 섬나라가 얼마나 선진국인가를 실감한 바 있다. 영국이 얼마나 선진국인지를 알 수 있는 사례 하나를 들자면 모든 도시에 깔린 보도블록이었다. 천년을 가도 끄덕 않을 돌 판으로 모든 도시들이 깔려 있었다. 함부로 길을 내지 않고 2차선 도로가 오래된 나무들과 함게 보존 되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긴 안목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그들의 눈이 부러웠다.
그들의 실력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것은 성서가 말씀하는 신앙의 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의 눈을 뜨고 하나님의 숨을 쉬고 세상 만물과 이웃들이 환호하는 신앙의 실력이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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