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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1  어싱(earthing)하러 오신 분들


살면서 지치고 힘들어 몸이 외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 소리를 잘 들으면서 걸어봅시다.

그것도 땅에 접지하며 맨발로 걸어봅시다.

분명히 몸이 달라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도 걷고 싶어 오셨습니다.

걸으며 걷고 또 걷는 분들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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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를 마치며......


6월 11일자로 갈라디아서 마지막 장 6장을 읽고 함께  묵상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나오는

"내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라는 말씀 중에

"자랑"이라는 단어에 꽂혔습니다.


현대는 자기 피알시대라고들 합니다. 

자기소개서가 진학이나 취업전선에서 아주 중요하게 작용을 하기도 하니까요.

있는 것을 있다고 솔직하게 아니 그럴듯하게 표현하면 더 유리하겠죠.

이러한 자기 피알을 못해서 소극적인 사람으로 때론 모자란 사람으로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얌전하고 겸손하다고까지 소리를 듣기도 하면 과연 좋을까요? 오히려 공허할 뿐이죠.

그래서 어떤 수련에서는 자랑하는 장을 터놓고 열기도 합니다.

돌아가며 자랑을 한 가지씩 얘기하면 손뼉치며 환호성으로 응답을 해야하는 그런 룰을 정해놓고 말이죠.

저도 한 가지 정해서 환호를 받은 기억이 떠오릅니다.

내용인즉슨,

"우리 집 정원은 눈에 보이는 곳까지가 다 우리집 정원이다."

"와아~~~"


바울 사도가 자랑할 것은 이거 밖에 없다고 한 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고통과 쓰라림과 눈물과 짊어지기 싫은 그 무엇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것이 자랑거리가 될 수 있을까요?

십자가를 통해서 "변화를 받아 새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라고(갈6:15) 바울은 고백합니다.

경각산 불재 정원에서 산 지가 20년이 되어갑니다.

그 동안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기에

그 역경을 견디어 왔기에 내가 사는 곳을 내심 자랑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바울 사도처럼 이렇게 자랑하고 싶어집니다.

"태풍에 지붕이 날라간 적도 있는 우리집은 눈에 보이는 곳까지가 우리집 정원이다."

조금은 어색하지만 어떻습니까?

오늘처럼 불재가 세파에 지친 영혼들의 쉼터가 되길 꿈꾸는 날이면

내가 불재에서 뿐만이 아니라 이 지구에 와서 경험한 모든 것들을 사랑한다고

사랑하는 자만이 자랑할 수 있다고 감히 고백을 하면서 갈라디아서를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기를 빕니다. 아멘"(갈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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