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 ‘같은 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2017.09.03 07:09
진달래 요한 1서 나누기
교회 – ‘같은 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요한 1서4장
사랑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물질로 하는 것이라는 실천적 관점을 요한 1서는 강조하고 있다. 그 실천의 근거는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더욱 강조 된다. 초대 교회의 많은 신자들은 예수가 인간 세상에, 인간의 육체로 오셨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워했다. 요한 1서는 그런 이원론적인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적이며 거짓 예언자라고 말한다. (4:3,4) 예수에 속한 자들은 예수의 성육신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 믿음으로 초대교회는 거짓 예언자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몸으로 오셔서 세상을 이긴 (요한 16:33) 예수의 육화를 고백하는 것이다. ‘고백하다’ (동사 호몰로게오)는 ‘같은 것을 말하다’라는 의미이다. 각자 다른 것을 말하고 탐욕 때문에 형제를 돌아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을 받아들인 사람의 삶일 수 없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같은 것을 말하고 나눔으로 일치를 이루어가는 사람들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친교와 일치를 이루어나가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혼자만의 신앙생활을 이루면서 고요히 어떤 간섭도 책임도 없이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런 행태는 자신의 소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피 튀기는 치열한 삶을 살아가신 예수를 외면하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 머무는 사람들은 세상에 속한 탐욕의 사람들이면서 사람들을 현혹하는 영을 식별할 수 있다. (4:6) 이 식별은 영적인 지혜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그렇다고 세상을 단죄하고 외면하고 대립각을 세우라는 뜻은 아니다. 또 세상은 악하고 그리스도인은 선하다는 관점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둠의 세상을 탓하지 말고 하나님의 빛을 받아들여 어떻게 태양처럼 빛을 낼 것인가를 생각하고 집중하는 데 있다.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고 하시면서 창조한 세상이고 예수께서 살다 가신 세상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이 시대에는 그리스도의 사명을 다하라고 여러분을 보내 주셨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아름답고 경이롭게 보는 눈이 열려 하나님의 빛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고 그 빛을 더욱 받아서 ‘나’가 빛의 존재로 살아가는 일이 중요하다. 이것을 빼버린다면 신앙생활은 종교적 생활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를 위해 요한은 사도적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것을 당부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 (4:6) 여기에서 ‘우리’라는 관점은 하나님과의 친교는 교회 공동체의 친교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친교는 개인적인 취향과 능력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친교이며 삶의 태도와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뿐인 아들
요한 1서 4:7절에서 5:3절 까지 ‘사랑’은 33번 등장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확실해졌다. (4:9) ‘외아들’ ‘독생자’는 남녀의 성별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 뿐인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리스어 ‘모노게네스’는 유일성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는 모든 존재가 유일하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똑 같은 돌멩이가 있는가? 눈송이 하나하나마다 결정체의 구조가 다르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를 완전하게 창조하신다. ‘나’역시 똑 같은 존재는 없다.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의 오심으로 확증되었다. 요한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눈으로 보고 만졌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예수가 열어준 그 사랑의 세계 안에서 그분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일 수 있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친교는 교회공동체 안에서 형제의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의 완성이다.(4:12,17) 완성을 말하는 ‘텔로스’는 ‘가득 참’ ‘성숙함’의 뜻이 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가득차고 성숙한 영혼이 되기 위함이 아닌가. 가장 훌륭한 수행은 가부좌 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사랑하는 실천에 있다. 지금 이 순간은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자 처음의 순간이다. 다석 선생님이 말씀한 가고 오는 이 순간에 점을 찍는 ‘가온찍기’는 이미 실현된 종말론적 삶이다. 그 종말은 먼 어느날 미래에 내가 숨을 거둘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형제를 위하여 땀을 흘리는 지금 이 순간이 종말을 완성하는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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