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님은 숨님
2018.09.09 10:37
우리 님은 숨님
창세기 1:26 – 2: 8
숨
성서의 인간관의 바탕은 창세기의 다음 두 구절에 두고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자 이제는 우리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러고 나서 하나님이 당신의 모습을 따라 당신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 (1: 26-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 그러자 사람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 창세기 2:7)
인간은 하나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다. 인간의 DNA는 신성하게 창조되었고 그 덕분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이런 전제가 있어서 인간의 존엄성과 신비는 무한하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이 코에 불어 넣어 주시는 생기인 숨에 의해서 순간마다 살아가는 존재이다. 이 말은 생명의 주권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있다는 의미이다.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자기 존재와 은혜로 주시는 숨에 대한 자각이 없는 신앙은 현실에 대해서는 기복적이고 내세적인 미래로 도피하게 된다.
성서적 영성은 지금 이 순간 하나님과의 하나 됨이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고 눈을 뜬 자의 하나님이다. 도를 닦아서 도달하는 피안의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이미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다. 내가 찾고 있고 이루고자 하는 모든 것은 이미 나에게 은혜로 주어져 있다. 다만 잠을 자고 있을 뿐. 형을 피해 하란으로 도망가던 야곱은 꿈에서 깨어나 이렇게 외쳤다.
“ 여호와께서 바로 이곳에 계시는구나. 그 분이 여기 계신데도 내가 그걸 몰랐구나, ..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바로 여기가 하나님의 집 아닌가? 이곳이 바로 하늘이 열리는 문이로구나”. (창 28: 16-17)
아하! 내가 이걸 몰랐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변곡점에 도달하는 신호는 야곱처럼 ‘아하’하는 경험이 찾아 올 때이다. 나의 공간과 시간, 그동안 만나왔던 사람에 대한 새로운 이해, 영적인 깨달음의 체험 등에서 우리는 그런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나에게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내 생각을 믿고 있었다는 자각이었고 숨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었다.
하나님이라는 말은 한국 사람만 사용하는 이름이다. 하나님은 이름 없이 계신다. 왜냐하면 인간이 이름 지을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냐, 하느님이냐 하는 논쟁도 사실 부질없는 말장난일 뿐이다. 공동번역 성서에서 히브리어 원전에 가까이 번역한다고 해서 ‘야훼’라는 이름을 사용했지만 이것조차도 추론일 뿐, 논리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 번역일 뿐이다. 왜냐하면 히브리어로 주어진 신명인 YHWH (요드, 헤, 와우,헤) 는 자음만이 있기 때문에 입소리로는 발음할 수 없다. 예를 들어 ㄱㄴㄷㄹ을 어떻게 한 단어로 발음할 수 있겠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발음 자체가 되지 않는 이름을 부를 수도 없었고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율법 때문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너는 네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를 함부로 부르지 말아라. 나 여호와는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들을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다. ” (출 20:7)
이런 연유로 그들은 엘로힘이나 아도나이라는 이름으로 대신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 네 글자(YHWH)를 직접 발음하여 읽지 않는다. 우리가 "여호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고유 이름인 YHWH가 [구약전서]에 6,823회나 등장하고 있다. 히브리어 [마소라본문] 안에 하나님의 이름 네 글자를 읽을 때에는 "아도나이"(주, 6,518회), 혹은 "엘로힘"(하나님, 305회)으로 읽으라고 마소라 학자들은 모음기호를 붙여 놓았다. 마소라 학자들이 '아도나이'의 모음을 붙여 놓은 것은 그 이름을 '여호와'라고 읽으라는 것이 아니라 '아도나이'로 대신해서 읽으라는 표시이고, '엘로힘'(하나님)의 모음을 붙여 놓은 것 역시 그 이름을 '하나님'으로 대체해서 읽으라는 표시였다. 우리나라 성서공회와 세계 각국의 주요 성서 번역본은 이 견해를 따르면서 아도나이와 엘로힘을 자국의 언어로 번역하였다.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던 모세에게 주어진 말씀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였다. (출 3:13-14) 자신의 욕망을 거세당한 채, 주인 없이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노예들은 ‘나’가 없는 주인의 종속물일 뿐이다. ‘스스로 있는 자’로서의 하나님은 노예들에게 모세를 보냈다. 모세에게 주어진 신명의 뜻은 모세의 소명과 인간이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를 함축하고 있다.
YHWH – 코로 숨 쉬는 소리
오랜 세월 동안 알 수 없었던 발음 불가의 신명에 대해 새로운 해석이 등장했는데 (David Abram. 1996) 그것은 입소리가 아니라 코로 숨 쉬는 소리라는 견해이다. 들숨과 날숨의 소리 값을 시늉낸 것이라는 이 주장은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 까지 신의 이름을 부르는 존재라는 이 관점의 해석은 창세기가 말씀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을 한 화살로 꿰뚫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서의 숨을 집중해서 쉬어 보다가 다석 유영모님의 ‘우리 님은 숨님, 참 숨 쉬어지이다’라는 말씀의 참 뜻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감격스럽다. 한국 땅에 다석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이미 다석은 1950년대에 우주를 ‘한 숨 덩어리’ 인간은 ‘작은 한 숨’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유한한 숨만 쉬지 않고 참 숨이요 영생의 숨인 말씀으로서의 ‘말숨’을 쉬어야 한다고 가르쳤고, 그리스도와 성령을 ‘숨님’이라고 표현했다. 목숨에서 말숨 쉬는 것이 거듭남이요 구원이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늘 아버지께서 주시는 참숨을 쉬는 사람이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있다. 지금 내 쉬는 숨이 육체적인 목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요 영원불멸의 숨이라는 가르침은 얼마나 귀한 것인가.
만물이 하나님의 숨을 쉬고 있고 만민이 하나님의 이름을 호흡으로 부르고 있다. 첫 사람 아담(사람)의 코 속에 불어 넣으셨던 하나님의 숨은 지금도 동일하게 내 코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갈릴리 호수 가를 거니시며 내 쉬던 그리스도 예수의 숨, 십자가에서 거두어진 그리스도 예수의 숨,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내 쉰 숨이 나에게 들어오고 있다.
‘우리 님은 숨님,
참 숨 쉬어지이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175 | 두려움의 죽음 | 물님 | 2019.02.22 | 6022 |
» | 우리 님은 숨님 [1] | 물님 | 2018.09.09 | 7009 |
173 | 만약 [1] | 물님 | 2018.09.09 | 5854 |
172 | 옷을 찢지 말고 [1] | 물님 | 2018.03.12 | 5704 |
171 | 말씀 한마디 [1] | 물님 | 2018.01.17 | 5758 |
170 | 전주대학교 찬양경배학과 목요예배 설교(2017.11.23(목) 19:30) | 선한님 | 2017.11.24 | 5874 |
169 | 너희 염려를 주께 맡기라 | 선한님 | 2017.09.26 | 6275 |
168 |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 물님 | 2017.09.14 | 5672 |
167 | 교회 – ‘같은 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 물님 | 2017.09.03 | 6843 |
166 | 하늘 씨앗을 품은 사람 | 물님 | 2017.08.27 | 6194 |
아멘!!!!!!!!!!!!!!!!!!!!!!!!!!!!!!!!!! Forever !
Glory to Him al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