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詩 게르니카[Guernica]& 한국에서의 학살
2019.01.12 06:53
피카소 게르니카 & 한국에서의 학살
르네상스 미술의 전통, 특히 원근법과 3차원적 공간 표현주의에서 벗어나 그의 말처럼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 것을 그린 미술계의 이단아, 문학에서 영국이 낳은 국민시인이자 위대한 극작가로 인간에 대한 깊은 심리적 통찰을 보여준 윌리암 세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 ~ 1616)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의 마술사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 ~1939)에 이어 새로운 유형의 리얼리티의 원형을 제시, 보이는 세계로부터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본 무한한 상상력과 형이상학의 화가, 단일하고 제한된 시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할 수 있도록 다가화된 복수 시점을 화면에 도입한 입체파, 스페인 말라가의 파블로 파카소(Pablo (Ruiz y) Picasso, 1881-1973, 91세)
그의 쓸쓸하고 세계대전의 참혹한 현실의 반영인지, 그림의 구성이 종래의 이성을 중시한 신고전주의, 감수성을 더 중시한 낭만주의, 과학적인 실증적 사실주의 등 3차원적 공간적 표현주의를 벗어나 자연의 여러가지 요소을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상으로 환원하고 재구성하여 인간의 분열된 마음이나 뜯겨진 감수성까지 얼굴, 눈깔, 머리통, 손과 발, 팔 다리, 절규하는 말과 소 등 괴기스럽고 어디 제대로 된 것이 없는 그림으로 흑백의 토굴 속에서 버림 받은 인간의 절규와 창조의 세상을 향해 탈출하려는 배고픈 영혼의 자유 의지, 그리고 신의 창조물로서 13천 여점의 그림, 10만 여점의 판화, 34천 여장의 삽화 등 빛과 어둠으로 무장하고 예술가의 감각과 정신까지도 변화시켜 "나는 찾지 않는다. 나는 발견한다. I do not seek. I find. - Pablo Picasso " 정형화되고 힘의 논리에 추종하는 세계와 미술에 통렬한 자극을 줌으로써 질서를 깨고 극단적으로 창조의 대열에서 벗어나 신음하다가 자신 만의 독창적인 창조의 세계를 찾아가는 너무나 인간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에 그와 함께 전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피카소가 빛과 어둠의 세계를 떠나 19C 미술사조를 벗어나 20C 초현실주의를
잇는 상징과 입체의 기막힌 모던아트의 세계를 연결한 장본인이 되었다니,
그의 섬뜩하고 자유롭고 기괴스런 그림 만큼이나 복합적이고 신비스런 그의 변화가 주의와 시선을 끌게 됩니다. 또 그가 어찌 원근법과 명암법, 삼차원적인 공간에 갇힌 지긋지긋한 삶과 예술을 위한 예술의 암흑지대를 건너게 된 것인지....! 그의 자유분방한 삶에서 그가 만나고 몸서리치게 사랑했던 숱한 연인들. 1907년에 완성한 '아비뇽의 처녀들'처럼 정숙하고 전통적인 모성의 아름다움 여성상이 아니라 여성의 신체를 심히 왜곡시키고 전통에 정면으로 도전한 매춘부를 그린 것처럼 그의 삶 전반에 걸쳐 연애와 사랑이 끊이지 않았고 폭풍처럼 몰아치는 감성의 소용돌이 속에서 3D 시각을 다시점으로 분석해서 평면에 담고 날카롭고 충격적이고 상상할 수 없는 시점을 복수화한 그만의 새로운 화풍을 탄생시킵니다. 참고로 그의 반듯한 용모와 달리 공식적으로 알려진 연인이 일곱명이고 관계를 가졌던 여인도 여러명이었으며 사귀던 여자들도 본인이 애정이 식으면 철저하게 헤어지는 등 많은 여성을 웃기고 울린 바람둥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어찌 보면 방랑자요 난봉꾼인 그의 그림은 별안간 무시무시한 싸움꾼이요 고발자가 되어 전쟁으로 신음하고 고통을 겪는 무섭고 잔인한 세상을 고발합니다. " 모든 창조행위는 우선 파괴 행위다. Every act of creation is first of all an act of destruction. - Pablo Picasso " 이런 관점에서 아마도 피카소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 바로 게르니카[Guernica] 피카소가 자신의 모더니스트 개념을 자신의 신개념의 화풍과 결합하여 마치 전쟁의 절망을 표현한 스타일의 광폭하고 입체적 조합 인 게르니카 (1937)와 같은 초현실주의 명작, 겉보기에 게르니카는 가시적 세계를 평면화함으로써 현대 미술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과 반전을 가진 기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을 통해서 피카소는 전쟁 종식과 파시즘에 대한 비판을 전체적으로 보여주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피카소는 게르니카의 공포를 신고전주의, 사실주의 또는 낭만적 인상적인 것으로 표현하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인물, 뻗은 팔, 황소, 괴로운 말을 스케치 한 후에 세련된 캔버스에 옮겨 여러 번 다시 작업합니다. 어두운 색과 단색의 주제는 시련의 시간과 고뇌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게르니카 (Guernica)는 영웅적인 전쟁의 개념에 도전하고 그것을 잔인한 자기 파괴 행위로 표현합니다. 이 작품은 실용적인 고소장이자 노여움이 녹아있는 작품일 뿐만 아니라 멕시코 예술가 인 디에고 리베라 (Diego Rivera)의 프레스코화 그림과 경쟁하는 현대 미술에서 매우 강력한 정치적 그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게르니카는 확실히 그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성명이며, 스페인 내전 중 게르니카 바스크 마을에서 나치의 파괴적 폭격에 대한 분노와 격렬한 반응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게르니카는 전쟁의 비극과 그것이 국민, 특히 무고하고 죄없는 시민들과 동물에게 린치를 가하는 잔인성과 고통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은 전쟁의 비극과 반전反戰을 그리고 평화의 상징을 영원히 떠올리게 하면서 기념비적인 지위를 얻었습니다. 게르니카는 짧은 투어로 전 세계에 선보였고 유명해지고 널리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 투어로 말미암아 스페인 내전이 세계의 이목을 끄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전원적이고 웅대한 스타일을 융합한 것으로 컬러의 퇴출은 다큐멘타리로 촬영된 기록과 같이 고발의 질을 높입니다. 게르니카는 파란색과 검은색과 흰색, 높이가 3.5미터(11피트), 폭이 7.8미터(25.6피트)이며, 기름으로 칠해진 벽화 크기의 캔버스, 이 그림은 마드리드의 무세오 레이나 소피아에서 볼 수 있습니다. 게르니카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며 서로 모순됩니다. 예를 들어, 이것은 벽화의 두 가지 주요 요소인 황소와 말까지 확장됩니다. 미술사학자 패트리샤 패딩은 스페인 문화에서 황소와 말은 중요한 소재라 말한바 있습니다. 피카소 자신도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한 역할을 하기 위해 이러한 캐릭터들을 확실히 이용했습니다. 이것은 황소와 말의 구체적인 의미를 해석하는 일을 매우 어렵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일부 비평가들은 게르니카에서의 정치적 메시지를 신뢰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예를 들어, 여기서 파괴의 주요 모티브인 황소는 황소든 미노타우르든지 피카소의 자아의 반영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 황소는 아마도 파시즘에 대한 맹공을 상징합니다. 피카소는 그것이 잔인함과 어둠을 의미한다고 말했는데, 그 말이 게르니카 사람들을 대표한다고 말했습니다. 게르니카는 바스크 지방에 있는 비스케이 지방에 있는 마을입니다. 스페인 내전 당시, 그것은 공화당 저항 운동의 북쪽 보루이자 바스크 문화의 진앙지로 간주되어 목표물로서의 중요성을 가진 장소입니다. 한편 공화당은 정부와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 매우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공통된 반대를 가지고 여러 파벌(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소수의 이름을 붙인)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민족주의자들 또한 파벌화되었지만, 그들은 법, 질서, 그리고 전통적인 카톨릭 가족의 가치를 바탕으로 스페인의 황금기로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1937년 4월 26일 월요일 16:30분에 볼프람 폰 리치토펜 대령이 지휘한 독일 콘돌 레종 전투기가 게르니카를 약 2시간 동안 폭격했습니다. 히틀러가 이끄는 이 시기에 독일은 민족주의자들에게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히틀러는 이 전쟁을 새로운 무기와 전술의 시험발사의 기회로 삼고 있었습니다. 참사가 있은 후 피카소는 곧 본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됩니다. 당시 그는 1937년 여름 스페인 공화당 정부의 의뢰로 파리 전시회를 위한 벽화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독창적인 생각을 버리고 1937년 5월 1일에 게르니카를 시작합니다. 이것은 그가 두 달 동안 다소 냉정하게 일해왔던 이전의 생각과는 달리 그의 상상력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러나, 그 여름 파리 전시회에서 그것은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훗날 무고한 생명에 전쟁의 파괴를 상징하는 강력한 힘을 얻게 됩니다. 피카소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그림인 게르니카는 예술작품과 저항의 상징으로 관련성이 있어왔고, 바스크 마을의 악몽을 생생하게 기억하게 했습니다. 피카소가 2차 세계대전 중 나치가 점령당한 파리에 살고 있을 때, 그는 꾸준하게 게슈타포의 감시 대상이었습니다. 어느날 게슈타포 관리가 그의 아파트를 방문하여 도라 마르가 게르니카 그림을 찍은 사진을 보게 피카소에게 묻습니다. “네가 한 것인가? (Did you do that?)” 그는 이 그림을 네가 그린 것인가를 물은 것입니다. 피카소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네가 한 짓이다.(No, you did that)” 피카소는 그림의 내용으로 전쟁을 일으켜 수 많은 사람들을 죽인 그들을 비판한 것입니다. 수 많은 창조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림으로 시詩를 써내려간 피카소의 그림은 자신의 일기이자 삶의 궤적을 돌아보게 하는 한 인간의 자화상입니다. 게르니카는 현대 미술의 상징인 모나리자. 다빈치가 르네상스 시대의 평온과 자기 통제의 이상을 불러일으켰을 때, 게르니카는 어떤 예술이 모든 인간을 해방시키고 정치적 범죄, 전쟁, 죽음과 같은 압도적인 힘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자기 주장에 실제로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피카소의 파격적인 역설로 보여집니다. 아울러 피카소는 한국에서의 학살소식을 듣고 그 참혹하고 진안한 그림을 그렸으니 하늘아래 인간이 제국주의와 파시즘과 같은 세력에 의해서 함부로 취급받고 죽임을 당하고 고통받을 수 있는 현실을 고발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일이야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참혹한 짓이며 어느 곳에서도 다시는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될 비참한 역사임을, 눈 뜨고 볼 수 없는 현실을 무한한 상사의 날개를 펴 그림으로 웅변하고 있습니다. 그의 생각 속에 게르니카에서 아이를 잃고 몸부림치는 어머니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기막힌 현실 속에 아이를 안고 있는 한국 어머니의 슬픈 얼굴은 동시대에 같은 어머니의 얼굴이며 피카소가 생각한 가장 비극적이고 처참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걸었던 외로운 길 - by pablo picasso 난 외로운 길을 걸었다, 내가 알고 있던 단 하나의 길이었다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지만, 나는 계속 걸었다 부서진 꿈으로 이어진 다리를 건너기 위해, 외롭고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걸었다 세상이 무얼 위해 싸우는지 모른다 왜 이리 선동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혼자서 이 외로운 길을 걷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무너진다, 무너진다 자제력이 부족한 것은 표면으로 떠오르려는 내면 때문이다 소모되고 혼란되게 만드는 무엇이 저기에 있을 거란 두려움 때문이다 이상한 놈이란 말을 들으면서도 부서진 꿈의 가장자리로 난 외로운 길을 걷는다 "나는 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그린다. Pablo Picasso"
'sial 2019.1.5(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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