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4장22-33. 물 위를 걷는 사람
2020.09.30 05:45
마태복음 14장22-33. 물 위를 걷는 사람
시가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에게 내가 하는 대답은 ‘절실함’이라는 말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 절실함 때문에 잠을 못 이루어본 경험이 한 번도 없다면 그의 인생은 매우 무미건조할 것이다. 공부를 하건 돈을 벌건 또는 어떤 연구를 하건 그 일에 대한 절실함의 크기가 그 사람을 만들어 간다. 그런데 인생이 술술 풀릴 때보다는 잘 나가다가 앞이 막혀 숨이 막히기 시작하면 그 절실함의 농도는 매우 매우 진해지다가 절박함으로 바뀌게 된다.
절박함에 대해 생각하다가 떠오른 장면은 군대 훈련 중에 가스실에 들어가서 최루가스 체험을 한 것이다. 오래된 고물급 방독면을 차고 엉겹결에 가스실에 들어가면 그 고통의 현장은 삽시간에 지옥으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길거리에서 데모할 때 당했던 경우하고는 차원이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맑은 공기를 마신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 거구나 하는 독한 체험을 하게 된다.
시달리다(basanizo)
오늘 본문에서 나에게 마음으로 다가온 말씀은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역풍을 만나 시달리고 있었다’는 부분이다. 여러분 가운데서 요즘 시달리는 일이 있다고 생각되는 분은 누구인가? 시달리다(basanizo)는 말은 고통과 괴로움의 증세이다. 이것은 그 종류가 각 사람의 인생만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사람들은 날마다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다. 지금 제자들은 힘껏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나 역풍을 만나 도저히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배타기 직전의 상황은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 5천명을 먹이는 기적이 있었다. 아마 제자들의 어깨는 무척 힘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가. 그들은 예수의 제자가 된 일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끼고 앞으로의 미래가 탄탄대로가 될 것으로 확신했을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을 재촉해서 군중들로부터 떨어지게 했다. 재촉했다는 말을 보면 어쩌면 제자들의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제자들의 감격과 흥분은 자신들을 내팽개치는 역풍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아무리 힘을 다해 노를 저어도 물결은 더욱 높아지고 이러다가 죽게 되겠구나 하는 공포마저 더해 갔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이 다 끝났다고 하는 상황에 돌입하면 우리는 자신의 불완전함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 얼마나 불안전한가를 깨닫게 된다. 인간은 자신이 운명을 헤쳐가기도 하지만 운명이 자신을 나둥그러지게 뒤집는 경우도 있다. 이 때 우리가 가장 절박해 질 때이다.
새벽 4시
이 일이 일어나 시간을 마태는 밤 사경 (새벽 3시부터 6시 까지. 공동 번역에는 새벽 4시로 번역)이라 기록하고 있다. 4라고 하는 이 숫자는 수비학적 장치를 요소요소에 두고 있는 마태복음의 특성을 고려해서 해석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출애굽기 14장 24절에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때 추격하던 이집트 군대는 새벽(밤 4경)에 박살이 났다. 이런 배경에서 성서에서의 4경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임하는 시간의 상징이다. 이스라엘이 4경에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경험했던 것처럼 제자들은 4경에 예수의 구원 사건을 체험하게 된다.
4라는 숫자는 수비학에서 땅의 숫자이고 안정의 숫자이다. 그것은 익숙한 삶의 상징이다. 여기에 벗어나 5로 탈출하는 것이 구원 사건이다. 인간의 변화단계를 보면 40대 중년에 역풍을 만나게 된다. 이른바 사추기이다. 사추기는 억압되었던 무의식 속에서 폭풍이 일어나는 시기이다. 여기에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위기가 더해질 때 중년은 심각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반전이 있다. 그것이 바로 5의 세계이다. 인류의 구원 사건이 5번 째 여인인 마리아에게서 출발하는 것처럼 내가 파도와 역풍에 내동댕이 쳐질 때 5의 세계가 열려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
마태는 그 계기가 예수의 출현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제자들은 물 위를 걸어서 다가오는 예수를 보고 겁을 먹었다. 그들은 예수를 유령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물 위를 걸을 수 없다는 고정관념의 상징이 4이다. 예수는 그 4를 뛰어넘는 방식으로 찾아오셨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고 말씀했다. 자신을 드러내는 ‘나다 I AM’라는 예수의 말속에서 제자들은 안심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이벤트와 같은 말씀이 첨가되고 있다.
베드로, 물에 빠지다
베드로는 예수를 알아보고 나서 ‘물 위를 걸어오라고 하십시오’라고 청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오너라’라고 말씀했다. 배는 늘 떠나는 것이 속성이다. 배는 물 위에서 나를 보호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이다. 그런데 그 배에서 조차 떠나는 모습을 베드로는 잠시동안 보여주었다. 그것은 잠깐이지만 베드로가 인간으로서의 익숙한 모든 경계를 벗어나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물 위를 걸어가던 베드로의 시선이 예수에게서 풍랑으로 옮겨지고 두려움에 눌리게 될 때 그는 물에 빠져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애처로운 처지가 되었다. 예수를 알아보고 용기를 낸 것 까지는 좋았으나 자신에게 입력된 한계 속으로 다시 돌아가고 만 것이다.
예수는 물에 빠진 베드로를 붙잡으시면서 “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베드로에게만 주신 말씀일까? 오늘도 수많은 베드로들이 약한 믿음 때문에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작은 파도에도 두려움의 파도에 빠져가며 살아가고 있다. 4의 세계인 자기 생각으로 예수를 믿는 한 그는 인생을 날마다 시달리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는 삶의 기적을 체험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 내 배에 타시면 나는 평화로워질 수 있다.
나는 지금 무엇에 시달리고 있는가?
나의 시선이 역풍에서 예수에게로 옮겨진다면 우리의 강한 믿음은 산을 옮길 수 있고 물 위를 걷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바라본다는 것은 예수처럼, 베드로처럼 시달리고 있는 모든 두려움의 파도 위를 걸어가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 기적을 살아갈 수 있다.
지금 내가 무엇에 시달리고 있는지 살펴보자. 몸의 고통인지, 불면증인지, 분노인지, 직장인지, 누군가의 언어폭력인지, 바쁜 일정 때문인지... 잘 살펴보자. 내 생명을 갉아먹는 일을 바쁘게 하면서 나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지 않은지 점검해 보자. 마태는 우리에게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은 인생에서 자신의 생각을 믿는 신념의 믿음에서 벗어나 예수를 바라보는 진정한 믿음을 가져보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지금 몰려오고 있는 두려움의 파도만 바라보지 말고 예수에게 시선을 두고 그 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믿음이 있어야 신앙의 맛을 아는 사람이 된다고 권고하고 있다. 시달림의 끝자락에서라도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라는 음성을 듣게 된다면 우리의 마음과 삶은 새롭게 변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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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받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