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기는 자가 다스리는 나라 - 숨 이병창목사 설교
2020.12.06 21:06
20201206
마태복음 20: 20-34 섬기는 자가 다스리는 나라
* 그때
공간을 가진 사람이 힘 있는 사람이라면 때를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20장은 슬픈 예수의 모습과 자신들이 희극적 비극의 주인공인지도 모른 채, 때를 분간 못했던 제자들의 현주소를 드러내 주고 있다. 수난에 대한 세 번째 예고를 하던 ‘그때’ 제자들은 딴 꿈에 빠져있었다. 예수의 죽음을 향해 가는 길에서 예수를 더욱 처절한 고독으로 몰아넣는 행태를 자신들이 하고 있음을 그때 제자들은 알지 못했다. 마태가 ‘그때’라는 시간적 배경을 강조하는 것은 예수를 둘러싼 사람들의 영적 무지가 얼마나 최악의 상태였는지를 언급하고자 함이다.
그때 세베대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찾아와 엎드려 절을 하였다. 예수는 그 부인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번에 주님의 나라가 서면 두 아들을 좌 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부인이 누구인가? 그녀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이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친자매인 살로메였다.(막 15:40. 요 19:25) 예수에게 살로메는 이모이고 야고보와 요한은 이종사촌이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이모가 찾아와 엎드려 절하는 본문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살로메가 생각한 주님의 나라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왕국이었다. 지상의 메시아 왕국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예수가 왕이 되면 차지할 권력 서열의 맨 앞자리에 두 아들이 자리하기를 바랐다. 다른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지만 야고보와 요한은 어머니까지 동원하여 야심을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예수는 두 번째 수난 예고 후에 벌어진 제자들의 다툼 때와 같이(18:1-14) 겸손히 자신을 낮추어 섬기는 자가 하나님 나라의 큰 자라고 교훈하셨다.
예수는 진달래꽃처럼 아름다움을 나타내려고 피지 않고 지기 위해서, 죽기 위해서 피는 꽃과 같은 분이었다. 살로메의 사건은 살로메 한 사람에 그치지 않고 예수의 3대 제자라고도 하는 두 아들과 다른 제자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에 이르기까지 예수가 오해되고 있음을 교훈해 주고 있다. 제자들은 예수의 수난 예고가 반복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를 따르는 그들의 동기 자체가 욕심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예수를 따르는 목적이 예수를 통해서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함이었다. 예수의 수난 예고가 현실이 되었을 때 그들이 도망가고 부인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살로메는 골고다의 사형장까지 따라갔던 사람이다. 그는 예수의 처형장에서 좌우에 매달린 사형수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신이 원했던 예수의 좌우에 아들들이 없었던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겼을까? 살로메는 예수의 좌우편에 앉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십자가의 증인이 되었고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의 두 아들 역시 고난과 순교의 잔을 마시는 진정한 제자로 거듭나서 영광스러운 이름을 남기고 있다.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투사시키는 대상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 예수는 기득권의 수호신으로, 지상의 축복을 내려주는 신으로 섬겨지고 있다. 예수는 지금도 고독한 절규를 하고 있다. 내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은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바치러 왔다고-(28절).
*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는 나라
예수의 하나님 나라와 제자들의 하나님 나라는 하늘과 땅처럼 다른 나라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진 나라라면 제자들의 하늘나라는 자신의 이기적인 뜻이 이 땅에서 성취된 나라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했다.
“너희도 알다시피 세상에서는 통치자들이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높은 사람들이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25-26)
이 세상의 시스템은 오랜 세월 동안 권력자들의 착취시스템으로 유지되어 왔다. 시대가 바뀌어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착취의 시스템은 온갖 형태로 존속되고 있다. 착취는 경제 분야만이 아니라 광범위한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집값 폭등의 배후, 엄청난 미국제품 무기 수입, 목숨을 잃는 노동자들, 농민과 거리가 먼 농협 등이 있다. 물질적 착취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지만 도그마를 주입시키는 착취는 알아차리기 어렵다. 특히 이단 종파나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에서 볼 수 있듯이 도그마에 의한 착취 구조는 매우 간교하다. 인도의 계급구조는 피착취자의 마음에 열등감을 주입시켜 지배구조를 영속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얼마 전에 국민을 개돼지로 표현한 발언이 문제 된 적이 있었다. 그런 류의 표현은 대중에게 열등감을 주입시켜 정신적 콤플렉스를 강화시키려는 방법으로 권력자들이 즐겨 사용했던 방법이기도 하다.
인간을 억압하고 비인간화하려는 악마적 착취자들은 경제 사회 심리 종교적인 분야에까지 덫을 놓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덫을 보는 것이 현실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성적순으로 인간의 인격까지 재단해 버리는 교육 시스템은 아이들이 공부 외에는 무능력한 상태에 빠져들게 한다. 자립능력이 마비되어 자유의 기회가 찾아와도 붙잡지 못한다. 새끼 때부터 새장 안에서 크게 되면 날개의 힘을 잃은 새가 된다. 마찬가지로 억압과 공포심의 조장 속에 성장하게 되면 인간의 마음 역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그리스도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착취의 시스템이 작동할 수 없는 인간 해방의 세상으로 변혁하는 길에 동참하는 것이다. 예배당 안에서만 예수님 찬양하는 것으로는 이 세상의 변혁과 구원은 거리가 멀다. 예수의 십자가는 예수처럼 선한 사람이 억울하게 못박히는 세상에 대한 고발이 아니던가. 우리는 예배당 밖의 세상을 향하여, 모든 인간은 한 아버지의 자녀라는 평등의 입장에서 기꺼이 섬기는 자리로 내려서야 한다. 이 세상에 가득한 악의 세력들이 설치한 착취의 덫들이 더이상 작동되지 않는 새 세상을 만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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