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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4장 10인가? 01인가?

2021.01.31 18:55

물님 조회 수:6806



마태복음 24장      10인가? 01인가?

 

24장은 유대인들이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던 예루살렘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질 것이라는 재난의 경고로 시작한다. 예수의 예언은 40년 후에 이루어졌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로마에 의한 멸망이 아니라 종교적 열광주의자들에 의한 자멸이었다. 이성도 전략도 지혜로운 지도자도 없는 열심당원들의 선동에 의해 이스라엘은 처참한 종말을 맞았다. 그들은 유월절 절기를 지키러 온 동족들을 인질 삼았고 배수진을 친다고 식량을 불태워 수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싸워 보기도 전에 굶어 죽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의견과 다르면 타 지도자들을 모조리 암살했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죽인 만 여명의 동족들의 시체로 성을 둘러 세웠다. 한마디로 미친 전쟁이었다

    

마태복음 서두에서 마태복음을 이해하기 위한 배경에는 서기 90년 경에 있었던 유대인 랍비들의 얌니아회의가 있었다고 언급했다. 얌니아의 중심 인물은 최고위 랍비였던 요하난 벤 자카이(Yohanan Ben Zakai). 그는 전략적 사고를 할 줄 아는 바리새파의 대제사장으로, AD 66~73년 열심당원이 주도한 유대의 반란이 결국 실패할 것을 예견하고 유대교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당시 로마 진압군 사령관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을 만나 최소한의 유대교 랍비의 존속을 허락 받았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루살렘에서 비전투원 110만명, 갈릴리에서 10만명이 사망했고 97000명이 노예가 되었다고 한다.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되고 그의 아들 티투스에 의해 AD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 후 유대의 율법학자들은 해안 도시 얌니아로 이주했다. 유대인의 전쟁은 73년에 마사다 함락으로 완전히 끝이 났다. 얌니아에 모인 율법학자들은 그곳에 율법 학교를 세우는 것과 종교 생활에 대한 보장을 로마로부터 허락 받았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된 후 얌니아는 많은 유대교 율법학자들이 주로 활동하는 도시가 되었다. 얌니아회의에서  랍비들은 그리스도교와 완전한 결별(파문)을 선언하였고 희브리어로 쓰여진 경전 39권만을 정경으로 확정했다.

 

재난에는 예고가 있다.

 

24장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생각은 예루살렘의 멸망 사건과 코로나19 사태였다. 코로나 사태는 시점만 다를 뿐 확대된 예루살렘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당연한 일상이 붕괴되는 경험을 인류 전체가 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속출하고 있는 것은 한국교회 안에 내재해 있던 맹목적인 광신주의의 실체이다. 사람들을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사이비 영적 지도자들과 그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신봉자들에 의해 교회가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상식과 이웃 사랑의 복음 정신을 잃어버리고 있다. 그들의 폐쇄적이고 강박적인 공격성은 예루살렘을 멸망으로 몰아넣은 열심당원들의 의식과 유사하다.

 인간은 하나만 아는 사람이 위험하다. 그것은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들까지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종교적 강박 관념이 주입되면 그 관념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우리는 날마다 전해지는 뉴스를 통해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어떤 일이 일어날 때는 조짐이 있기 마련이다. 난파당할 배는 쥐들이 먼저 알고 도망간다고 한다. 비가 오기 전에 개미들이 분주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루살렘 폭동이 일어나기 전에 어떤 일이 있을 것이며 그에 대한 대책이 무엇인지를 15절 이하에서 예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예언자 다니엘이 말한대로 황폐의 상징인 흉측한 우상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게 될 것이다.(독자는 알아 들으라) 그 때에는 유다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가라”(참조 다니엘 9: 26-27, 11:31, 12:11)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긴박하게 예루살렘을 떠나 산으로 도망가라는 말씀의 의미를 여러분들은 생각해 보기 바란다. 과연 우리는 이 위기의 시대에 자신의 생명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그리고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생명나무를 지키는 지혜


에덴 동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가 있었다. 아담과 이브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살았다. 그러나 지식의 열매를 먹게 되면서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선악의 기준을 자기 자신의 이기심에 두고 판단 분별하는 선악과는 우리가 날마다 먹고사는 것이니까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면 생명나무는 무엇일까? 생명나무는 창조 세계 전체에 가득 찬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큰나무에 연결된 인간은 작은 하나의 생명나무이다. 요한복음서의 핵심 열쇠인 영원한 생명은 바로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 예수는 포도나무에서 분리된 가지는 말라버리는 이치로 이에 대해 설명하셨다.


인간은 생명나무에 연결되어 있으면 영생의 존재이다. 그러나 스스로 단절되어 분리가 되면 불멸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 상태가 에덴으로 부터의 추방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성한 자식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는 지구에서 사는 동안 이것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경험하면서 살아야 한다. 내가 지금 에덴에 있는가? 아니면 추방당한 세계에서 살고 있는가?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사는가? 아니면 선악과를 열심히 먹고 사는가? 나는 이 내용을 10(Deca)으로 정리했다. 데카그램의 핵심 주제는 여기에 있다.

 

10 = 1+0

 

10은 모든 숫자를 포함하고 숫자가 가지는 모든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10은 시방세계(十方世界), 진공묘유(眞空妙有)이다. 없음을 있음으로 표현한 0(카오스, 딥마젠타, 혼돈, 어둠, 가능성, 여성성...) 으로부터 1(, 존재, 남성성)이 나왔다. 0은 모든 것의 자궁이자 가능성이다. 10은 영과 물질, 음과 양의 원리이다. 이 둘의 결합에 의해 생명의 작용과 추동력이 공간 안에서 일어나게 된다. 0이 천 개, 만 개 있어도 1이 없으면 그저 가능성일 뿐이다. 그러나 1뒤에 0이 이어지면 수는 10배씩 늘어난다. 그런데 사람들은 100점이라는 기준에 갇혀 지내기 때문에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사장시키고 있다.

계란 안에서 병아리가 되었다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견딜수록 답답함이고 종말은 죽음일 뿐이다. 그래서 9라는 완성에서 자신의 한계를 깨고 나가는 열(10, Open)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창조의 0을 무한하게 공급 받아 증폭시키는 삶이다. 열려있는 삶이고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삶이다.

 

인간의 삶이 불행해지고 궁핍해지는 것은 10으로 살지 못하고 1로만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불행은 물질과 영을 통합(10)하지 못하고 01앞에 세우는 데 있다. 010일 뿐이다. 이것은 물질주의에 빠져 0을 버린 인생의 상징이고 자신이 10의 존재라는 것을 모르는 무지이다. 에니어그램에서는 인간을 몇 번 유형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에니어그램은 10 이전의 9에 머물러있는 도형이다. 물론 에고의 영역에서 노예 생활하는 인간을 이해하는 데는 유익이 있으나 그것으로 인간을 규정해 버린다면 그것은 에고의 감옥에 붙인 숫자에 불과하다.


예수는 1로만 살지 말고 0을 만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다. 10은 영성의 숫자이고 01은 물질의 숫자이다. 10은 에덴이고 1은 자기가 자신을 소외시키는 선악과의 세계이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이 10의 존재라는 것을 아는 데 있다. 그 앎이 복음이다. 오늘의 본문은 숨이 붙어 있는 동안 자신의 생명을 찾는 일을 무엇보다 긴급하게 챙겨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