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 무덤의 돌이 치워진 사람들
2021.04.04 16:55
20210404
마태복음 28: 1-15 부활 – 무덤의 돌이 치워진 사람들
지난주에 나눈 27장에서 빌라도의 병사들이 예수에게 주홍색 옷을 입힌 이유가 무엇인가? 질문한 분이 있어 이에 대한 답변을 드리고자 한다. 빌라도가 병사들에게 사형집행을 명령하자 병사들은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하며 희롱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빌라도의 주 심문 내용이 ‘네가 유대인의 왕인가?’(27:11)라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주홍색은 왕의 컬러였기 때문에 로마 병사들은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하기 위해 홍포를 입혔다. 그 옷은 빌라도나 헤롯이 입던 옷으로 추정한다. 병사들은 왕의 상징인 홍포에 어울리게 가시로 만든 왕관을 씌웠고 왕이 들고 있는 홀 대신에 갈대를 오른손에 쥐어 주었다. 그리고 왕 앞에서 무릎을 꿇듯이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 만세!’ 하며 희롱하였다. 그리고 예수에게 침을 뱉으며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지속적으로 때렸다. 갈대는 한국의 연약한 갈대가 아니라 4.6m까지 자라는 파피루스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구타와 모욕이 있은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갔다.
@ 무덤을 보러 갔다
안식일이 지난 그 이튿날 새벽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는 무덤을 보러 갔다. 왜 그녀들은 겁도 없이 무덤을 찾아갔을까? 마태는 이에 대한 힌트를 ‘본다, 묵상한다’라는 뜻을 동시에 가진 ‘theoresai’라는 단어를 통해 전해 주고 있다. 여인들은 충격적인 십자가의 사건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그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고자 했다. 그 마음이 그들을 무덤에 찾아가게 했을 것이다. 부활은 예수에게 일어난 예수의 부활만이 아니라 나의 부활이 되기 위해 깊은 묵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마태는 제시하고 있다. 눈 뜨고 봤다고 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상식적인 얘기이다. 어떤 마음의 눈으로 관심 있게 보느냐가 중요하다.
마가복음에서는 여인들이 공포에 질려 도망한 것으로 되어 있는 데 반해 마태복음의 여인들은 예수를 사랑하는 용감한 여인들이었다. 나아가 천사로부터 부활의 소식을 제자들에게 가서 전하라는 위탁을 받고 큰 기쁨으로 제자들에게 돌아간 것을 강조하고 있다.
여인들이 무덤에 갔을 때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면서 하늘에서 주의 천사가 내려와 그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다. 그 천사의 모습은 번개처럼 빛났고 옷은 눈 같이 희었다”(2-3)
마태복음에서 ‘주님의 천사’는 예수의 탄생과 부활의 때에 관여하고 있다. 천사는 하나님의 뜻을 전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천사는 무덤의 돌을 치운다.
@ 무덤의 돌
천사의 모습과 활동은 부활의 신비를 상징하면서 그 부활의 신비가 오늘 나에게 어떻게 이어져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다. 예수의 부활이 오해되어지는 것은 지구의 시간으로 이천 년 전에 있었던 예수의 부활만 있을 뿐, 그 부활이 나의 부활로 이어지지 못하는 데 있다. 그리하여 부활주일은 예수의 과거 부활을 기념하는 기념식처럼 되어버렸다. 또한 부활은 죽음 다음에 이루어지는 것으로만 오해 되어지고 있다. 지금 나와 상관 없는 부활이라면 과연 예수의 부활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고 하신 말씀처럼 부활하신 예수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임마누엘의 주님으로 계신다.
일상의 삶, 생활 현장에서 임마누엘의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항상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부활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지금 여기에서 존재의 부활, 삶의 부활을 경험해 간다. 그 부활의 삶으로 가는 첫 단계가 무덤의 돌을 치우는 일이다. 나를 짓누르고, 가로막고, 방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애벌레가 고치 속에서 나비가 되면 그동안 자신을 보호해준 고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너무나도 익숙한 고치 안의 세상에서 더 큰 세상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나비는 자신이 날아야 할 하늘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죽게 된다.
인류의 비극은 고치로 비유할 수 있는 세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죽어가는 것이다. 지구의식이라고 하는 3차원의 고치에서 영성과 신성의식으로 깨어나 이곳이 아닌 여기에서 영생의 삶을 누리는 것이 부활의식이다. 이런 관점에서 내가 가장 나다운 나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보여주고 있다.
천사는 부활하신 예수를 무덤에서 찾지 말고 갈릴리로 가라고 했다. 예수는 최후의 만찬에서 “그러나 나는 다시 살아난 후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다.”(26:32)라고 말씀했다. 갈릴리는 세례 요한과 예수 운동의 근거지였다. 복음 전파의 시발지요 중심지였다.(행 10:37) 공생애 기간뿐만 아니라 부활 이후에도 예수의 주 활동은 갈릴리에서 이루어졌고 승천도 갈릴리였다.(행1:11) 갈릴리는 예루살렘과 먼 곳이고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말할 만큼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멸시받는 땅이었다. 그러나 갈릴리는 부활하신 예수로 인해 생명 운동의 진원지가 되었다.
@ 무덤의 돌이 치워진 사람들
무덤의 돌이 치워진 사람들은 예수께서 그러하셨듯이 두려움이 없다. 어디를 가든지 아빠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으리라는 절대적인 확신이 있다. 어떤 위험을 겪게 되든 무사히 빠져나오게 된다. 부활의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어떤 위협도 권위도 질병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결핍의식에 시달리지 않고 넘치는 감사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그의 마음은 열려 있어 만민을 사랑하기에 넉넉하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살아있는 하나님을 믿는 부활의식의 사람들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심판의 하나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죽음과 파멸을 가져올 수 있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 율법은 하나님의 아들마저 율법의 이름으로 죽였다. 율법의 안경을 쓰고 진실한 사람을 죽이는 율법은 율법을 집행하는 사람들마저 망하게 했다. 그러나 예수는 ‘나는 너희를 자유케 하러 왔고 더 풍요로운 생명을 가져다주러 왔다고 말씀했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성을 뛰어넘어 하나님이라고 하는 실재와의 접촉을 통해 의식의 상승을 하는 사람은 고차원의 생명의식, 곧 부활의 생명에 도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생명이 올라오는 봄날의 산천들이 우주적 생명으로 꽉 차 있듯이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나타내고 구현하여 자신의 달란트를 발휘하는 사람이 참사람이요, 그리스도 의식의 사람이다. 바로 이 뜻을 함축한 것이 眞達來이다.
지금 여러분의 가슴을 누르는 돌문을 치워 주시기를 기도하자. 내 안의 쓰라림과 회한의 바위를 걷어내고 부활의 새 생명이 움터 올라오도록 하자. 망설이는 일이 있다면 즉시 실행해보자. 단단하고 무거운 흙덩이를 뚫고 올라오는 순들처럼 여리지만 강력한 능력을 발휘해 보자.
‘일체 은혜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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