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6장 자립과 공생의 결실 – 성벽
2021.09.06 15:57
20210905
느헤미야 6장 자립과 공생의 결실 – 성벽
숨 이병창
6장은 방해자들의 온갖 책동을 뚫고 성벽을 완공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성벽의 완공은 이스라엘이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자립의 시작이었고 이 일을 통하여 사회적 분열을 극복하여 공생의 집단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다. 개인이나 민족이나 자립은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기본적 전제 조건이다. 이번에 아프간 사태는 자신을 스스로 지켜내고자 하는 자립 의지가 없을 때 어떤 비극이 발생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자립이 되지 않으면 의존하게 되고 의존의식이 길들어지게 되면 그는 인간 구실을 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의 성장 과정에서 21살은 자립의 정체성이 확립되어야 할 나이이다.
인간이 부딪치고 있는 어떤 문제이든 그 뿌리를 찾아가면 명확한 정체성 형성과 이어져 있다. 이 주제가 상담의 핵심이다. 인생의 중요한 주제는 내가 나임을 아는 것이고 내가 나로서, 나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감나무라면 좋은 감이 되는 길을 가면 된다. 너는 요즘 잘나가는 배가 아니고, 사과가 아니고, 수박이 아니니까 부족하거나 잘못되었다고 다구치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성장해 왔다. 부모가 사과가 되기를 원하는데 내가 감나무인 것이 잘못된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바로 이 점에 대해서 ‘나’는 그 무엇이 아니고 나로서의 ‘나’(I AM)이다 라는 사실을 알려 주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이다.
내가 예수를 통하여 알게 된 것은 그 무엇이 되려고 하지 말고 네 자신이 되라는 가르침이었다. 내가 이 사실을 알고 나서 100점이라는 기준을 뚫고 나갈 수 있었고 나에게 달라붙어 있는 직함의 딱지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여러분도 경험했듯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 점수를 줄 때 100이라는 기준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점수를 주어 왔다. 그런 기준으로 보면 나는 항상 부족하고 100에 도달하기 위해 무진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거기에서 죄의식이 발생하고 있다.
경각산에 살면서 참나무는 참나무로서 아름답고 소나무는 소나무로서 아름답고 완전하다는 것을 실감해왔다. 엉겅퀴, 민들레, 인동초 등등 모두 일체가 완전하다. 장미나 국화나 백합만이 아름다운 꽃인가? 돈을 많이 주고 산 꽃일수록 아름다운 꽃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 세상이기는 하다. 난 한 촉에 얼마인데 내가 그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도 만나본 적이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어떤 난이건 난은 난일 뿐이다. 한겨울 산천에 내리는 눈송이들의 결정체는 하나하나가 다 다르다. 돌멩이도 모두가 다 다르다. 그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자연의 세계는 완전한 하나님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세계, 자연의 세계는 일체가 완전하다. 그런데 인간만이 부족한 것인가?
돌은 금보다 가치가 없고 금은 다이아몬드보다 가치가 없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일 뿐이다. 그런 왜곡된 생각으로 보면 장애인, 무학력자, 가난한 사람은 열등하게 보게 된다. 바로 이런 왜곡으로부터 눈의 비늘이 떨어지는 것이 거듭남이다. 내가 나임을 자각하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고 창조적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 자립정신이 있는 사람이 이웃과 더불어 살 수 있고 물살을 거슬러 강물을 오르는 물고기처럼 반역의 삶을 살 수 있다.
@ 방해자 대표 산발랏과 도비야
산발랏은 바빌론의 언어로 신우발리트 또는 산우발리트로 추정하고 있다. 신(sin)은 달(moon)을, 산(san)은 태양(sun)을 의미한다. 우발리트는 ‘생명을 주었다’는 뜻이다. 산발랏은 ‘달이나 태양이 생명을 부여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그의 조상들이 달과 태양을 신으로 숭배해왔었다는 사실을 유추하게 한다. 달과 태양은 피조물에 불과하다. 피조물을 하나님으로 숭배하는 것은 우상숭배일 뿐이다.
도비야는 ‘좋은’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토브’에 여호와의 압축형 ‘야’가 결합 되어 ‘여호와의 선하심’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암몬족인 도비야가 히브리식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가 이스라엘의 종이 되어 개명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는 유대식으로 그럴듯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단히 이름값을 못한 사람으로 역사에 남아있다. 이름과 그의 삶에는 큰 괴리가 있다.
두 사람은 온갖 조롱과 무력시위로 겁박하면서 공사를 방해했지만 무위로 돌아가자 느헤미야를 제거하기 위해 암살모의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사악한 의도를 간파한 느헤미야의 대처로 실패하였다(1-4절). 그들은 느헤미야가 페르샤에 반역을 하여 왕이 되고자 한다고 헛소문을 퍼뜨려 모함하였다(5-9절). 성벽의 완공이 가까워질수록 두 사람의 발악 역시 그 수위가 높아져 갔다. 선한 일을 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간다고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 반대의 경우가 많다는 것을 느헤미야서는 보여 주고 있다. 총독으로서 자신의 안위를 추구하지 않고 성심껏 백성들을 위해 선한 통치를 했지만 온갖 위협과 암살의 위기를 겪어야만 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사람이었고 받은바 지혜와 권능으로 어려움을 극복했다.
@ 제사장 스마야의 거짓 예언
산발랏은 온갖 술책이 통하지 않자 기상천외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느헤미야의 측근으로 추정되는 제사장 스마야를 매수하여 거짓 예언을 하도록 한 것이다. 스마야는 산발랏 일당이 느헤미야를 죽이기 위해 쳐들어오고 있으니 빨리 성전으로 피신하라고 말하였다. 이 술책은 두 가지 암수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당황하며 도피하는 비겁한 모습을 백성들에게 선전하여 느헤미야의 위신을 떨어지게 하고 그에 따르는 혼란을 통하여 공사를 중단하게 하려 하였다. 둘째는 제사장만 들어가는 성소를 들어가게 하여 성전을 모독하고 율법을 범했다는 누명을 씌우려는 올가미였다.
느헤미야가 성소에 숨었다면 백성들도 공사를 중단하고 모두 다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고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자신이 성벽 공사의 구심점으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정의로운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당당하게 ‘민족을 이끄는 지도자로서 어찌 위험을 피해 몸을 숨기겠느냐?’ 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자신을 염려하는 척하면서 자신을 간접 살인하고자 하는 스마야의 의도를 간파하고 걸려들지 않았다. 세상이 험하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올무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이스 피싱부터 시작해서 온갖 올무들이 많은 현실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느헤미야의 지혜가 필요하다. 땅의 지혜를 초월하는 하늘의 지혜가 필요하다. 자립과 공생의 성숙한 의식으로 존재와 삶의 중심을 바로 세운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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