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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2


느헤미야 7장 - 오늘 우리는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숨 이병창


어려운 성벽공사가 마무리(B.C. 444년)는 되었지만 한 나라의 수도로서 위상을 갖기에는 인구가 너무나도 부족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민족의 10% 정도는 살아야 적절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100여 년 전(B.C. 537년)에 1차 귀환했던 기록을 찾아내서 인구 재정착 계획을 세우고자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 1차 귀환자들은 유대 지역의 여러 곳에 분산되어 정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구에 대한 정확한 기초조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느헤미야는 제비뽑기라는 방법을 통해서 인구 재정착을 시도했고, 그 결과는 11장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도 서울에 인구의 10%인 500만 정도가 살고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성벽공사에 대한 기록은 1장에서 7장까지인데 구성으로 보면 7장은 준공식이 기록되어야 함에도 인구 조사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그만큼 시급한 당면과제였음을 드러낸다. 성벽 봉헌식은 12장 27-43절에서 다루고 있다. 느헤미야는 레위 지파 중에서 성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을 세워 역할을 하도록 했다. 전통적으로 성문과 성전문은 레위인이 지켜왔다(역대상 9:9-22, 26:12-19). 이는 성전에서 제사장을 돕는 일을 하는 것과 나라를 지키는 일이 동일한 차원임을 나타낸다. 당시 예루살렘 인구의 절반 이상이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였음을 상기한다면 당연한 조치였을 것이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을 다스릴 지도자로 동생인 하나니와 페르샤의 관원으로서 성채를 지키는 수장이었던 하나냐를 세웠다. 느헤미야는 신앙심과 성실성과 애국심을 기준으로 인물을 세웠다.


@ 돌아온 사람들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한 사람들은 머나먼 페르샤에서 조국을 향해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돌아온 사람들은 타국이기는 하지만 오랜 삶의 터전을 포기한 사람들이다. 페르샤의 관용 정책으로 공무원도 되고 나름대로 출세도 하는 상황이었지만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따라왔던 사람들은 꿈과 자유인의 희망을 찾아서 어렵게 결단하고 출발한 것이다. 많은 유대인들은 고향을 그리워만 했지 떠나지는 못했다. 그때 고국으로 떠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위한 유대인 회당은 지금까지도 존속되고 있다.

삶은 지금까지의 익숙한 조건들을 포기해야만 보이는 부분들이 있다. 알껍질을 깨고 나와야만 보이는 세계가 있다.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 자연의 아름다움과 선물을 발견하는 사람들은 인간으로 태어나 가장 고귀한 보물을 갖게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필요하면 취할 수 있지만 강남아파트를 선망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고정화된 사고방식에 길들어져 있다. 일단 고정화되면 그때는 자신의 관점을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00파라고 이름 지어진 집단에 길들어진 사람들의 행태는 이러한 측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과라는 단어를 읽는 것, 사과의 사진을 보는 것, 사과에 대한 논문을 읽는 것과 사과 맛을 아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종교적인 것과 영성의 길 역시 마찬가지이다. 영성의 사람들은 자신이 비워질수록 하나님의 자리가 커지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비좁은 사고의 틀 밖에 계신 하나님을 찾아 나선다.

예수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통해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이 곧 내가 나에게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했다(He came to himself). 과거 페르시아에 포로로 끌려갔었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결단하였다면 오늘 우리는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은 ‘돌아온 사람’이 되고자 서로 확인하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별을 만난 사람들은 내가 빛이라고 믿고 있는 태양 빛이 실제로는 어둠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의 은혜, 충만한 생명, 자유와 기쁨은 감추어져 있다. 그것은 세상의 빛 너머 어둠의 빛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 무거운 짐을 나누어진 사람들


7장에 나열된 사람들의 합산 숫자는 31,089명인데 66절에 언급된 숫자는 42,360명이다. 에스라 2장의 합계는 29,818명이다. 이런 차이는 기록자의 관점에서 누락자가 있었으나 총계에서는 합산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동물들의 숫자에서는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가 동일하다(스 2:66-67).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돌아온 사람들은 공동체의 안위를 지켜낼 성벽공사를 위해서 모두 성금을 바쳤다. 7장에는 헌납자들의 예물을 세부적으로 기록해서 그들이 어떻게 참여했는지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은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합력하여 책임을 나누는 헌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 생명과 믿음을 지키는 일, 공동체의 안전을 지키는 일에 열외가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밥은 누구도 대신 먹어줄 수 없다.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 성장하기 위해 말씀의 밥을 먹는 일 역시 자기 자신이 책임지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느헤미야는 자기 집 맞은편은 자신이 책임지도록 했다. 이는 책임의 분담이다. 자신의 방어 구역이 무너지면 공동체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 내가 소중하게 지켜야 할 가치를 스스로 지키고 보호하는 자세는 인격의 기본이다. 교회는 책임과 헌신을 배우고 실천하는 곳이다. 나만 출석하면 되는 곳이 아니라 교우들의 안부와 기도와 권면과 협동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예배실 천정의 전구가 몇 개나 빛이 꺼져 있는지, 무엇이 필요하고 시정되어야 하는지, 입구에 상사화가 어떻게 피어있는지 알아차리는 눈이 떠져야 한다. 이 눈을 뜬 사람들이 어떤 처지에서든 자신의 자유의지를 존중할 수 있게 된다.


눈이 먼 노예는 책임의식이 없다. 느헤미야의 리더십이 발휘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 먼 길을 걸어서 자발적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꿈에도 그리던 조국에 돌아온 그들이었기 때문에 빈부를 가리지 않고 성심껏 예물을 드려 민족의 숙원사업을 자랑스럽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성의 완공을 통하여 유대인들은 원수들이 둘러싼 환경에서도 자유로운 정착민으로 살아가게 되었다(73절).


우리나라는 돌아온 사람들인 독립운동가들의 나라가 되지 못하고 친일파들이 주도권을 잡은 나라였다. 이 싸움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7장을 읽으면서 통일 한국의 미래를 어떤 식으로 이루어야 하는지를 생각한다. 비참한 처지의 북한 주민을 무시하지 않고 품을 수 있는 민족적 역량이 갖추어지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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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재 정원에 핀 꽃무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