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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3


느헤미야 10장 하나님과의 새로운 계약


숨 이병창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동물은 처음부터 동물로 태어나지만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태어난다는 데 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 누구이며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하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해야만 한다. 인간의 가치는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이 위축되지 않고 실현되는 데 있다. 이런 관점에서 죄악이란 인간으로의 가능성을 억압하여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모든 조건들이다.

지상의 모든 생명체들의 성장과정이 그러하듯이 인간 역시 실존의 자연적인 조건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성숙의 과정을 통하여 자기 자신이 된다. 인간은 되어진 존재 (Being)에서가 아니라 되어가는(Becoming) 존재라는 데서 그 특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완성에의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할 수 있다.

삶의 완성은 물질로부터 신성을 향해 나아간다. 하나의 단세포로부터 유기적인 생명체가 되고 인간 의식으로부터 영적 자각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이 땅에서 성장과 성숙의 길을 경험해간다. 지구에서의 생물학적 과정은 미생물의 세계, 식물의 세계, 동물의 세계, 생물학적 인간이 나타난 네 번째 단계를 거쳐왔다. 지금은 다섯 번째 단계로 뛰어넘는 영성의식의 차원으로의 신인류시대이다.

인간의 형상, 인간의 몸이 지금 여기에 있기까지 얼마나 먼 여정이 있었던가. 우주가 시작된 이래 인간은 동물의 완성이며 신성의 시작점에 와 있는 존재이다. 인간의 몸과 삶이 존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코로나를 통해 인류는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고, 기존의 질서와 상식이 깨어지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는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 이제 인간 의식이 도약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새로운 창조 질서가 일어나고 있다.


@ 언약의 갱신과 맹세


포로기 이후에 예루살렘에서 인간 의식과 신앙의 도약이 집단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새로운 창조의 질서가 임한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의 나약한 사람들이 아니라 새로운 민족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들은 모세의 시내산 계약에서처럼 새로운 계약을 하나님과 맺었다. 지도자들은 새로이 제정한 언약에 서명을 하고 언약을 갱신하였다. 1-8절은 제사장, 9-13절은 레위인, 14-27절은 백성의 지도자들이다. 이들은 개인 자격이 아니라 가문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도장을 찍는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약속을 수행하겠다는 막중한 책임과 명예를 나타낸다. 또한 일반 백성들도 율법을 준수하는 삶을 살 것을 맹세하였다. 28-39절까지는 백성들의 생활과 성전 제사와 관련한 규례들이 기록되어 있다.

규례는 이방인과의 혼인 금지(30절), 안식일과 안식년 준수(31절), 성전을 위한 헌금(32절), 맏아들과 처음 난 짐승(36-37절)과 십일조를 바치겠다는(37-39절) 내용이다. 구약성서에서 언약갱신은 역사의 전환기에 있었던 중요사건이었다. 첫 번째는 모세가 주관했던 시내산(출 19-23), 두 번째는 가나안 정복과 토지 분배 후(여호수아 24)에 있었다. 본문은 세 번째 언약갱신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언약갱신이란 공동체의 정체성 확립에 목적이 있다. 느헤미야 시대의 유대인들은 종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이방인들과 동화되어 있었다. 바로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나는 누구이며 우리는 누구인가? 라는 명제는 정체성을 확인하는 주제가 된다. 또한 언약갱신 사건은 율법을 준수하고자 하는 맹세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하나님과의 언약갱신은 삶의 회복과 성장으로 이어져야 함을 보여준다.


@ 삶의 표준 – 말씀


기준이나 표준이 없다면 삶은 혼란스러워진다. 그리스도인의 표준은 말씀이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표준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준 없는 삶을 살아온 것에 대해 뉘우치고 돌이켰다. 말씀의 회복은 하나님과의 교제로 이어진다.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만남 공간인 성전 제사 제도의 회복을 맹세했다.

34절에는 땔감 나무를 종류대로 드리는 의무가 등장하고 있다. 성전의 제단은 사방 6미터에 이를 만큼 컸고 항상 불이 피워져야 했기 때문에 많은 나무가 필요했다(레 6:12-13). 모세 시대에는 산에 나무가 많았으나 포로기 이후에는 산림이 헐벗어 나무를 구하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많은 나무를 조달하기 위해 유대인들은 거국적으로 압월(종교력 5월, 민간력 11월) 14일에 나무를 바쳤다고 한다. 이렇게 힘을 합하고 짐을 나누어지는 울력의 과정 역시 공동체의 역량을 강화하는 역할이 되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곡식이나 과일의 첫 열매를 바쳐왔다. 첫 열매는 장남도 해당된다(35절). 그 이유는 출애굽 때 이집트인의 장남과 모든 처음 태어난 짐승들까지 죽게 되었을 때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전하게 보호받았던 데서 유래한다(출 12:29). 이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생계를 위해 필수적이었다. 레위인들은 가나안 땅을 분배받지 않았고 백성들이 바치는 십일조로 생활해야 했다. 그들은 성전과 수도인 예루살렘을 지키는 데 전념해야 했다. 레위인들은 자신들이 받은 십일조 가운데서 십일조를 제사장에게 바쳤다(민 18:21, 26).

당시에 백성들은 경제난으로 십일조를 잘 내지 않았기 때문에 레위인들은 자신들의 책무에 충실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느헤미야의 종교개혁으로 이 시스템이 복원 된 것이다. 레위인들이 십일조를 거둘 때는 언제나 제사장을 동참시켰다(38절). 이는 제사장에게 가야 할 십일조가 횡령 등의 부정 없이 제대로 돌아가게 하기 위함이었다. 제사장은 십일조의 십일조로 생계를 유지했다. 십일조의 회복은 신앙과 민족의 생존을 정의롭게 운용하는 신뢰의 경제 시스템을 살아나게 하였다.


코로나 팬데믹은 당연하게 생각해온 일상의 삶이 무너지는 경험을 인류에게 주고 있다. 기존의 질서와 안정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것은 새로운 질서와 지혜가 요구되는 새 시대의 전조가 다가왔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러한 혼돈의 시대에는 더 본질적이고 심오한 표준이 필요하다. 그리고 더 깊은 영적 지혜가 필요하다. 그 표준은 말씀이고 지혜의 근원인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다는 것을 10장은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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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리골드꽃이 활짝 피어나는 10월의 첫 주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