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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무엇이냐?

2010.04.20 15:39

물님 조회 수:6997

진리가 무엇이냐?

에니어그램의 역사에 대해 논한 글들을 보면 2천 년 전부터 수피에 의해 전승된 것이라는 등의 내용들을 볼 수 있다. 마호멧이 서기 571년에 태어나서 632년에 세상을 뜬 인물인데도 마호멧 이전에 이슬람이 존재한 것처럼 역사가 왜곡되어 있다. 수피는 9세기 이후부터 등장하고 있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진리인가? 를 묻기 시작하면 우리는 지금까지 확실하다고 생각해 왔던 것들의 기반이 무너지는 위험스런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적당히 알고 적당히 믿는다면 그런 위험은 없을 것이다. 에니어그램은 라몬 룰이나 아타나시우스 키흐헤등 기독교의 수도사들에 의해 그 도형이 그려졌고 발전되어 왔다.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세대를 통해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각 시대의 요구와 정치적 권위와 힘을 가진 사람들의 입맛대로 재단이 되어 전승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어떤 진실도 전승의 과정을 통해 거짓과 뒤섞이게 된다. 모든 종교적 전통들은 이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초대 교회에는 예수의 가르침으로 여겨지는 문서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아주 적은 양의 4복음서로 한정 짓는 데는 2세기의 교부 이레니우스의 역할이 컷다. 그는 정통주의 주교로 서기 180년경에 쓴 '반 이단론'에서 이렇게 썻다.

 

"이단주의자들은 실제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복음서들을 자기들이 갖고 있다고 떠벌린다. 실제로 그들이 갖고 있는 것 중 신성모독적인 것으로 가득하지 않은 복음서는 하나도 없다" 그는 우주에는 4방위가 있고 바람도 주된 바람은 4개이고 따라서 자연스레 네 개의 순수한 복음서 밖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주저함이 없이 다른 복음서외에는 모두 이단으로 규정하던 그는 예수께서 부활 후 적어도 10년에서 20년을 더 살았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30세를 마감하시매 아직 사실상 청년이며 결코 많은 나이 할 수 없는 때에 고난을 받으셨다. 이제 초기 생애의 첫 단계에 30년이 포함되고 그것이 40세 까지 이른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바이지만, 사람이 노령으로 접어드는 40부터 50 까지, 우리의 주께서는 여전히 선생의 직분을 성취하시며 생존하셨는 바, 이는 복음서와 모든 장로들이 증거하는 바와 같다. 아시아에서 주의 제자, 요한과 대화를 했던 사람들은 요한이 그 사실을 알려 주었다고 시인하고 있다." 3세기의 문서인 피스티스 소피아(Pistis Sophia)에는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제자들과 논하고 그들을 가르치시며 11년을 보내셨다" 고 적고 있다.



성서학자들은 이레니우스와 같은 2세기 교부들에 의해서 예수의 가르침과 영적유산들은 매우 축소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예수 자신이 비밀로 하라고 했건, 제자들의 판단이건, 교부들과 후대의 종교회의에서 이건 간에 예수의 수많은 가르침들이 유실 되고 우리에게는 아주 적은 4복음서만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생략과 삭제 작업을 통하여 피와 살이 흐르는 예수는 사라지고 범속한 인간들이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도 멀고 완벽한 신이 되어 버렸다. 그 앞에서 우리는 무력한 죄인일 뿐이다. 나도 그리스도적 자각을 통하여 그 분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는 길을 막아버린 것이다. 과연 이것이 진실인가?



  진리를 전하는 것이 종교임에도 여전히 종교 안에는 거짓이 있고 또한 그 거짓을 알려주고 있다. 이것은 종교의 어느 부분이 잘못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 의식의 한계가 가진 속성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부모의 종교 때문에 자식이 그 종교인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 어떤 것을 알기 전에 부모의 종교 속으로 편입되어 버린 것이다. 그것은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 채 이 세상 속으로 들어와 버린 것과 같다. 그러기에 이런 문제는 누구의 잘못이냐를 따지고 비난하는 것 보다는 무엇이 얼마나 참인지를 스스로 밝혀가는 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부모와 나의 신앙이 똑 같을 수는 없지만 나와 부모는 모두 한 근원인 하나님으로 부터 나왔고 우리의 영혼은 그 하나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하나의 동일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보내신 분이 있어 나는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왔고 그것이 실현 되든 아니든 이생이 마감 될 때 그 분에게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어찌 됐건 나는 시간 속을 이동해 가고 있다. 나에게 허락된 모래시계 속의 모래가 언젠가는 떨어지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을 확실하게 인식한다면 우리는 물어야 한다.



나는 왜 여기에 있을까? 나는 어떤 나로 여기에 있는 것일까?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은 어떤 목적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사람에게도 그를 통해 드러나야 할 하늘 아버지의 빛이 있다고 예수는 말씀하셨다. 지금 여기에서 드러나야 할 아버지의 빛을 드러내는 것이 믿음이다. 이런 관점에서 자신의 소명을 알아차리는 것이야말로 신념의 믿음이 아니라 통찰의 믿음이다. 그 다음에 그렇다면 나는 어떤 나로 지금 여기에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노예의 나인가? 내일 일을 염려하면서 벌벌 떨고 있는 나인가? 나는 무엇에 의해 조작당하고 조종당하는 인간인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 나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인가? 나는 진정 자유인인가?

 

돈이 있어야 자유로운 인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목소리가 드높은 자본주의 세상에서 진리만이 인간을 자유케 할 수 있다는 예수의 음성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인가? 그리스도가 빌라도 앞에 섰을 때 빌라도는 물었다 진리가 무엇인가? (요한 18:38)이 질문은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유효하다. 다만 빌라도가 묻는 것인가, 아니면 예수가 묻는 것인가의 차이일 뿐. 오늘 우리도 묻고 있다. 무엇이 진리인가?



  우리는 이 지구에서 진리라는 주제는 상대적이라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빌라도의 진리도 있고 그리스도의 진리가 있는 것처럼 반쪽 진리도 있고 온전한 진리도 있다. 우리는 진리에 대해 배워가야 할 것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내가 만약 한 진리를 깨달았다면 하나의 진리를 안 것일 뿐, 모든 진리를 안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매일매일 밥을 먹듯이 은총으로 매일매일 진리를 배워가고 있다는 겸손한 인식이 필요하다. 진리는 겨자씨앗처럼 싹이 나고 큰 나무로 성장해 가는 되어감의 과정일 뿐 고정된 문자나 교리에 머물 수 없다. 진리는 나에게 생명을 주는 영이다. 나는 영으로부터 왔고 영으로 자각하고 영으로 돌아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