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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마을'['10.5.21 법요식]

2010.05.22 14:33

구인회 조회 수:3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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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활불[活佛]이다
 

   심생즉종종법생 [心生卽種種法生] 
   심멸즉촉루불이 [心滅卽觸不二]

   마음이 살면 진리가 살고 마음이 죽으면 해골이나 다름없다

   신라말기 원효스님이 당나라에 불법을 구하러 가던 길에 폭우가 내려

   어느 굴속에서 기거하게 되었는데 목이 말라 주변을 더듬거리다가

   마침 머리맡에 빗물이 고인 바가지의 물을 마시니 꿀맛이 따로 없었습니다.

   다음날 깨어보니 어제 마신 물은 해골바가지에 고인 물.

   비위가 몹시 상한 원효스님, 구역질이 나 물이고 뭐고 다 토해버리고 맙니다.

   심생즉종종법생(心生卽種種法生) 심멸즉촉루불이(心滅卽觸不二)

   이 말씀은 법을 구하러 가던 중에 해골물을 마시고 정신이 번쩍들어 하신 말씀입니다.

   다 아시는 전승이지만 인간지사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마음먹기 달려있는 말이 있듯이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마음이 살면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마음이 죽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도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마 8:22)

   말씀하신 것처럼 생사는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니요

   인간이 어떤 의식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삶을 경험합니다.

   마음을 닫으면 의식의 올무에 붙잡혀 번뇌의 지옥불에 부글부글 끓을 수 밖고

   마음을 열면 무애인으로서 번뇌의 불을 끄고 진리의 빛으로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시 사람 위에 군림하는 이스라엘의 위선적 율법과

   공의로 위장한 예속적 관습에 정면으로 대결하였으며

   그 분의 행위의 토대 역시 아무 걸림 없는 일체의 삶을 사랑하는 자유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바로 진리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생각만 하더라도 당시 규정에 정면으로 배치되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며

   안식일법을 무시하고 병든 사람을 고쳐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런 일을 할 때마다 바리세파를 비롯한 기득권층은 무슨 귄위로 그런 일을 하느냐고

   성질을 내고 싸움을 걸어왔으며, 그들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게 된 도화선이 되었다고 봅니다

   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예수님은 아무리 처지가 곤궁해도

   창세전부터 하느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진리와 자유의지를

   그분 안에서 조금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는 겁니다.

   사탄의 유혹도 이념도 두려움도 고통도 죽음도 하느님이 주신 진리와 자유로부터

   그분을 떼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전장에 나가 수천의 적과 싸워 이기는 것보다도

   자기 자신과 싸워 이기는 것이야 말로 승리 중에 가장 큰 승리이니라” -법구경

   그분은 어떤 외부의 장애물도 방해할 수 없는 빛[여래 如來]이요,

   눈 뜨고 똑바로 가는 명행족 明行足

   자신을 이기고 생사를 정복한 일체무애인一體無碍人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자유를 본받아 부처님오신날, 우리 교우들과 텐에니어그램 형제들이

   마치 동방박사처럼 이웃 마을, 대한불교조계종 귀신사 歸信寺를 찾습니다.

   석가성불에 산천초목 동시성불 同時成佛이라 했던가,

   녹음이 우거진 경내, 벌써 깨달아버린 산천초목이 우리가 오는 줄 아는지

   해맑은 산소와 초록빛 너털웃음을 선사합니다.

   그 빛은 교회에서 비추는 빛과 같은 빛이요, 별반 다를 것 같지 않은 바람입니다.

   종교를 넘나드는 행보 속에 벗이요 님이신 무여스님 청정한 미소로 맞이합니다.

   이제 눈빛만 봐도 의미를 알 것 같은 귀신사 신도 여러분들과 인사합니다.

  “메리붓다마스” 우리 교회에서 보낸 화분이 젤 큽니다?

   나서 죽고 죽고 나서 또 죽는다.

   용타 조실스님의 일도출생사 一道出生死

   일체법의 무생無生 무멸 無滅 무아無我의 법이 울려 퍼집니다.


   우리 모두 활불을 외쳐 보세요.“나는 활불이다”

   날씨도 좋고 도든 것이 다 좋지만 최고로 좋은 일이 있다.

   그것은 우리들 자신이 활불로서 지금 이 순간 임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이로 따져보면 부처님은 예수님보다 624살 더 많으신 형님이다.

   부처님은 BC 624년에 나셔서 BC 544년에 돌아가셨다.

   나는 귀신사 입구 느티나무 있는데다가 여기 귀신사 문을 넘기만 하면

   120살까지 살게 된다고 걸어 놨다.

   이 문을 열게 되면 마음이 무한 자유하며 무량한 중생을 제도한다.

   이 문을 열게 되면 120세까지 무병장수하고 하와중생 4가지 원을 이룬다.

   일체유심조 日一切唯心造 모든 것이 마음 한자락에 달려 있다.

   화엄경은 부처님을 대각을 성취하신 후 37일 동안 그 자리에 앉아서 읊으신거다.

   모든 것이 다 마음먹은 대로 된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 속에는 부정하고 거부하는 마음이 있다.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는 긍정의 마음하고

   아니라고 하는 부정의 마음 중에 어느 쪽이 이길까?

   그 마음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

   도인보다 더 강력한 파워는 내 마음이다.

   도인이 아무리 제어 할려고 해도 안 될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이 아닐 거야 하면 기어이 안되기 때문이다.

   나는 확실히 이를 걸어놓았다.

   걸어놓은 마음과 믿는 마음이 합해져서 두루두루 성취될 것이다.

   부처님이 해 놓은 일은 가히 위력적이다.

   2500년 후에 이 조선 땅에 멀쩡한 사람이 머리를 깎고 산에 들어가게 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게 만들었다.

   참으로 위력적이었다. 이 위력적인 역사가 생생하게 눈 앞에 있다.

   부처에 대하여 의심하는 마음이 들거든 나를 보라

   BC 624년 부처님이 태어나셨는데 태어나실 때 그냥 울고 태어난 게 아니라

  “천상천하 유아독존” 한 소리를 지르고 태어난다

   나는 이 말씀을 믿지 않았다. 막 태어난 아이가 그런 소리를 지를 수 있는가?

   이건 무슨 상징적인 의미일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깨달음이 오니까 이 소리는 사실이었다.

   사자후를 터뜨리고 일어난 아이가 눈에 본 것처럼 믿어진다

   그 아이는 보통 아이하고 달랐다.

   그 아이는 자라나면서 나서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을 보고

   나도 그럴 것이냐? 심각해져버린 것이다.

   그 때 상여가 나갔다. 사람이 죽어 시체가 나갔다.

   그 장면을 보고 나도 죽는단 말이냐?

   석가모니는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것이 끔찍하게 싫었다.

   나도 죽기가 너무 싫었다. 이런 점에서 나도 석가모니와 닮았다.

   죽는 다는 것이 제일 두렵다. 끔찍하게 싫었다.

   내가 죽음하고 다툰 이야기 만 해도 꽤 시간이 걸린다.

   이런 생각 속에서 우울하게 처져 있었던 아이가 석가다.

   농부가 쟁기질하는 일종의 농경재를 나간 적이 있다.

   왕과 자신 그리고 신하들은 그늘 밑에서 내려다 보고 있는데

   뙤약볕에서 구슬땀을 흘리면서 쟁기질하는 농부를 보면서 심각해져버렸다.

   우리는 그늘 밑에서 있고 저 농부는 힘들게 일하는 것이냐? 이건 아니다.

   또 쟁기질 하다보면 벌레가 튀어나왔는데 새가 삼키며 날아간다.

   어찌 산 짐승을 새가 날아와서 삼켜버릴 수 있느냐? 이건 아니다.

   강한 짐승이 약한 짐승을 삼킨다. 이건 아니다.

   석가는 요샛말로 운동권 기질이 강력했다.

   석가는 이와 같은 불평등한 장면을 목도하고 반반한 바위에서 깊이 묵상한다.

   어떤 사람은 호위호식하고 어떤 사람을 죽도록 일한다. 이건 공평치 않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삼켜버릴 수 있느냐?

   강자가 약자를 억누르는 약육강식의 세상, 이건 아니다.

   아버지 정반왕과 신하들이 깊이 삼매에 든 석가를 보고

   어찌 그 기운이 삼엄하든지 아버지 왕이 무릎을 다 꿇었다.

   싯달다 석가모니 어린아이 싹수가 그러했다.

   늙고 병들고 죽고 아니, 이 세상이 개판이다.

   가진자와 못 가진자의 불공평, 강한자가 약한자를 괴롭히는 이 세상은 개판이다.

   이런 현상 속에서 석가는 그야말로 우울증 환자가 돼버렸다.

   그 당시 석가가 출생하기 전에 상호를 보니까 참 비범했다고 한다.

   보는 이가 말하기를 이 세상에 거하면 왕 중의 왕이 될 것이라 했다.

   그러나 그릇이 넘쳐 사람뿐 만 아니라 파리모기도 끌어안는 성자가 될 것이다

   세상에 있지 않고 출가하면 부처가 될 것이라 했다.


   여러분 대통령이 낫습니까? 여기 용타스님이 낫겄습니까?

   나는 중 초기에 목포 정의원에서 포교를 부탁받은 일이 있다.

   나는 그럴 형편이 안돼서 이렇게 알려줬다.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요.

   아들 있어요? 그 아들을 스님 만들면 될 것 아니요.

   당신 아들을 중 만들어 포교하면 될 것 아니요?

  “내 아들은 스님 안 되면 조컸어요”

   사람들은 다 그렇다. 대통령이 되는 걸 원하지 중이 되려고는 하지 않는다.

   좌우지간 석가는 이 세상에 있게되면 전륜성왕이 될 것이요

   세상 밖으로 나가면 붓다가 될 것이라 했다.

   어느날 그는 이 세상에 이렇게 있어서는 안 되겠다

   자유로운 몸이 돼서 산속으로 들어가 모든 궁금증을 해결해야겠다고 정하고

   아버지 왕께 나아가 출가를 의뢰했다.

   이 때 왕은 네가 가버리면 이 나라와 백성은 어찌 되겠느냐며,

   극구 말렸지만 아들의 의지가 워낙 완고하였고

   생로병사에 대한 물음에 대한 해법을 제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 가지만 요구하고 뜻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 요구는 나라를 위해서 아들을 낳는 것이었고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라훌라라 지었으니 그 아들 이름은 '라훌라'

  ‘애물단지, 장애물’ 이란 뜻이었다.

  “이 핏덩이 때문에 번뇌할 날이 있을 것이요.”

   라훌라가 태어나자 왕실은 출생 잔치를 성대하게 벌렸다.

   이 사이에 석가는 그 자리를 뛰쳐나갔는데 그 나이 스물아홉살이었다.

   아이 하나만 보고 산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온갖 고행을 해도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뼈에 살이 붙을 정도로 금식과 고행의 연속이었다.

   언젠가 극도의 고행으로 쓰러진 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싯달타 태자가 말라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 소문을 들은 아버지 정반왕은 말을 전한 이에게 되묻는다.

   태자가 성불하고 죽었다고 하는가, 아니면 깨닫지 못하고 죽었다는가?

   성불하고 죽었다면 그 말을 믿을 수 있으나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 말을 믿을 수 없다.

   그 이는 깨달음에 이르지 않고서는 죽을 수 없는 자다.

   나는 그 대목을 보면서 한참을 울었다.

  "내 아들은 깨달음을 성취하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

   아버지의 무한 신뢰 앞에 사정없이 울어재꼈다.

   고행의 극단까지 이른 지 육년, 외부에서 깨달을 수 없었고

   이제 스스로 해결해 보는 수 밖에 없었다.

   불성정각, 내 자신을 스승삼아 이 자리에서 내가 죽든지

   내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마지막 결판장에서 스스로를 스승삼아 치열하게 정진했다.


   나는 석가모니 공부를 하면서 이게 화두이면서 화두였다.

   사실 화두일 필요가 없다. 그대로 살기만 하면 된다.

   알려주신 팔정도 대로 살기만 하면 된다.

   당신이 오거수 하면서 무엇을 했는가?

   답이 비춰왔다. 답이 확 왔다. 도통한 것처럼 기뻤다.

  "이처럼 환히 보인 거 일러줄까요?"

   석가가 무엇을 했느냐면 최종적으로 정사유 正思惟를 했다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다. 바른 사색을 했다.

   존재하는 것들의 존재법칙을 사유한다

   나는 죽는다. 나는 죽는다. 죽기 싫다. 죽게 되는 건 만고의 섭리인데

   죽기 싫다는 이 심보는 억지다. 억지부림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천재와 범재가 다른 것은 쉬게 포기하지 않는 거다.

   천재는 고집스럽게 포기하지 않는다.

   나는 죽게 되었다. 고로 할아버지도 죽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죽고

   어머니도 나를 낳은 지 이레 만에 죽었다. 나도 죽게 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죽기 싫다. 이렇게 사유를 한다. 마지막 사유다.

   죽게 되어있는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죽게 되어있는 나, 죽기 싫은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나란 무엇인가? 나란 무엇인가? 강렬하게 물음을 던졌을 때

   일순간 명경지수처럼 해답이 올라왔다.

   단식을 일주일만 하면 대정화가 일어난다.

   정신이 얼마나 맑아지던지 !

   그런 고행에 끝까지 가버린 상태에서 심신이 정화된 청정한 상태에서

   나는 정작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거다.

   이때 명경지수처럼 답이 떠오른다.

   내 존재가 연기적 존재로 보인 것이다.

   덩어리, 블록이 바로 나였는데 진짜배기 나의 존재의 본질은 무엇이냐면

   나는 부모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선조 없이 존재할 수 없고

   물과 공기 햇빛 없이 존재 할 수 없는 존재이다.

   다른 것과 관계를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지

   딱 끊어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덩어리요 블록인 줄 알았는데 연기적으로 보니까

   아버지와 어머니 공기 물 과일 등 모든 것이 나와 합해져서 내가 된 거다.

   별안간 내가 구분하는 한계가 없어져버렸다

   전부 한 덩어리요 유기체적인 한 덩어리다.

   전체가 한 덩어리요 전체가 한 생명이로구나.

   없는 나를 두고 ‘나’ ‘나’ 하고 집착을 했다. 이것이 훤히 들여다보인 거다

   석가모니는 이 이치를 깨닫고 “오메 존거” 본래 죽을 나가 없다.

   없는 나를 있다고 생각하고 아둥바둥 했다.


   깨달음을 얻고 세상 사람에게 전하려고 생각해 보니

   내가 이렇게 애써도 가물가물 하듯이 이 덩어리 습관성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보통사람이 나를 한정시킨 나란 영역을 넘을 수 있겠는가?

   가르쳐 줄려 해도 중생을 가두어 고쳐지려면 쉬운 일이 아니겠구나?

   그냥 무한히 열려버린 의식상태에 있다가 가야겠구나 !

   그러나 석가모니에게 이는 아니라는 생각이 일어났다.

   깊은 자아에 빠진 주변의 사람들에게 제도하려고 보니

   도저히 탐진치 삼독의 벽을 뚫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연못에 연꽃을 보고 무릎을 탁치는 한 생각이 일어났다.

   연꽃이 어떤 것은 물 속에 쳐박혀 있고

   어떤 것은 겨우 떠 있고 쑥 올라온 연꽃도 보였다.

   물 속에 쳐박혀 있는 연꽃, 간신히 떠 있는 연꽃도 있지만

   쑥 올라온 연꽃도 있지 않은가? 올커니, 상근기를 향해서 법을 전해야겠다.

   그리하여 상근기자를 위한 설법으로 시작된다.

   법이 어려워 세상 사람들에게 못 먹히겠다 해서 대가리 좋은자를

   대상으로 전수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을 가르친 스승을 제도하려 했으나

   그러기 전에 스승은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 후 함께 고행하던 시절에 수자타의 우유를 먹고 타락해버렸다고 떠나버린

   다섯 도반 상근기자를 대상으로 법을 전하게 된다.

   다섯 도반이 녹야원에서 수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녹야원에 가서

   다섯 비구를 만나게 된다. 다섯 비구에게 연기를 전한다.

   연기이기 때문에 어떤 실체도 없는 것이다. 있다면 전체가 하나로 통한다

   한 차례 설법을 했는데 알아먹지 못해서 석가가 호주머니에서

   나이타를 꺼내 잎담배에 불붙여 뻐끔뻐끔 담배를 피웠다던가

   어쨌다던가? 역시 안 될 모양이여(용타스님의 위트) 그런 심정이었다.

   또 한 번 시도해보자. 또박 또박 연기법을 설하니까

   마침내 아야 고지녀가 이치를 터득했다.(아야는 깨달음이라는 의미)

   고지녀가 이름대로 “아 알았습니다.” 법열에 든다.

   너 한 사람이 되면 10사람 100사람이 되겠구나.

   드디어 다섯 비구가 다 터져나왔다.

   이 지상에 나를 포함해 여섯 아라한이 생겼구나.
 

   여섯명 아라한 선인의 핵심은 무아 無我이다. 무아의 논리는 연기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내가 없어지면 전체가ㅡ 하나다

   내가 구획을 없애면 전체를 살리게 된다.

   물 속의 대광주리 속을 보라. 겉물이나 속물이나 똑 같다.

   광주리한번 치우고 보게. 겉물이나 속물이나 한물이 된다.

   그러나 욕심은 대광주리를 치고 구획을 정하고 쪼개개 된다.

   무아의 이치를 깨달아야 하는데, 無인 이치 전체가 나요 내가 전체이다.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다. 내가 사라지면 무아를 얻는 것이다.

   이건 이데오르기가 아니다. 그냥 이치다. 따지고 보면 상식이고 이성이다.

   불교라고 이름 붙이면 불교가 아니다.

   석가모니가 무아가 확연해지니까 세상 전부가 한 나요 빛나는 진리다

   보리수하정성각 菩提樹下正成覺 

   눈떠보니 모든 것이 부처이지 부처 아닌 게 없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나, 여러분 전부 부처여!

   그러면 여러분 스스로 부처선언을 해놓고 보실라요

   내가 무신 부처여 하실 분이 있겠지만 손해 볼일 아니니까

   일단 선언을 해 놓고 육년 후에 대각을 이뤄도 좋을 것이요

   역대 조사들은 부처를 여기서 찾으라 했다.

   제자가 묻는다. 부처가 어디 계십니까?

   부처는 너를 떠나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네가 곧이들을까 걱정이구나?

   곧이듣겠느냐?  예, 부처님은 어디 계십니까?

   묻는 네가 바로 부처이니라.

   사람들은 부처를 멀리서 찾지만 바로 여러분이 부처다

   어디 부처와 중생을 구분 할 수 있겠는가?

   부처는 안 먹고 안 자는가? 부처는 피 안 흘리는가?

   부처와 중생 모두 99.999% 다 똑 같다.

   바로 네가 활불이다. 살아있는 부처니라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대각을 이루고 나서 보니

   우주 전체가 부처 아닌게 없었다.

   자기 자신을 부처선언 하라


  “나는 활불이다” “나는 활불活佛이다”


   끝으로 활불이 해야 될 세가지가 있다.

   첫째 활불인 ‘나는 행복해야 된다’. 우리는 행복한 상태에 있다

   둘째 활불은 ‘웃어야 한다.’ 웃어재끼라. 웃지 못하는 인간은 썩어빠진 인간이다.

   셋째 ‘나 없다’를 선언하라. 내가 ‘나 없다’ 를 선언할 때 내가 살아난다.

   내가 없다가 있다. 무한으로 열려진 내가 살아난다.

   이 세 가지가 팔만대장경을 삼박자로 요약한 요체이다.


   물님의 표현대로 뒷꼭지가 아름다운 귀신사

   경내에서 울려 퍼진 용타 스님의 대자대비 무량법이 귓전에 쟁쟁합니다.

   無 속에는 둘이 없고 둘이 없어야 또 無다.

   그래서 삼계가 일체 空이다.

   하느님도 영이시고 그리스도도 영이시고 물님도 영이시고 영님도 영이시고

   기독교에서 영靈이시라 하는 말씀이

   불교에서 공空이시라고 하는 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 오심으로 우리가 다 그리스도가 되고

   사월초파일 예수 믿는 제가 귀신사에 가서 활불 活佛이 되었습니다.

  ‘나는 활불이다’  참 좋아 죽겄습니다.

   부처님오신날 물님의 축사에

  ‘메리 붓다마스’ 리본도 바람결에 좋아서 흔들거립니다.


 

                                                               s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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