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이 되어 -베데스다 편지
2010.06.04 11:28
밥이 되어...
밥이 되어...
“..우리가 만만한가 보네요...” 이렇게 말하며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장이 사고로 뇌를 다쳐서 가족이 당장 먹을 양식이 없다는 연락을 받고 양식을 대준 지도 1년이 넘었습니다.
지난겨울에는 연탄이 떨어졌다는데 외곽지대라서 적은 양은 배달이 되지 않았습니다. 봉사단체에 의뢰를 하려 했지만 본인이 다른 이들에게까지 알려지는 걸 꺼려했습니다.
자존심이 강한데다가 발이 꽤 넓은 탓에 군산에서 받던 정신과 치료도 아는 사람을 만난 후로는 익산으로 옮겼으니 혹시 다른 데서 만나더라도 아는 척 하지 말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연탄 값을 어렵게 마련해서 송금을 해주자는 내 말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그곳까지 찾아갔건만 집 근처에 부인이 기다리고 있다가 쌀과 연탄 값만 챙겨가지고 들어가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대우를 받을 목적은 물론 아니었지만 절박한 상황에서 식량을 가져다주는 사람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매번 서운할 정도로 상식을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에 또 쌀이 떨어졌다는 연락이 왔고, 아무 말 없이 쌀 두 포대를 차에 싣고 나가는 남편에게 “또 갖다 주려고요?” 하자 “우리 기분이야 어떻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마5:42) 갖다 줘야지..다른 것도 아니고 양식이 없다는데...” “맞아요.. 거절하면 우리 마음도 편치않지요...어쨌든 우리가 만만한가 보네요”
자존심이라는 허상에 갇혀 꼼짝 못하는 그들만이 아니라 순간, 만만하게 보이는 사실이 달갑지 않은 내 마음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긴 세월 척박한 사역의 현장에서 웬만큼 마모(磨耗) 되어왔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내 속에 만만하게 보이는 걸 거부하는 마음이 남아 있는가봅니다.
만만한 것처럼 편한 상대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요? 부부에게도, 친구에게도, 형제에게도 만만한 상대가 되어주는 것보다 겸허한 사랑이 있을까요?
비난도 판단도 하지 않고 무슨 이야기든 긍정적으로 들어주며 언제 어디서 무슨 부탁을 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적극적으로 도와 줄 것만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은 살아가다가 힘이 들면 생각이 나는 법인데 나는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그런 사람으로 살아왔을까요?
지금껏 효(孝)를 실천하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늘 넘어지기만 했던 원인도 평생을 만만한 존재가 되어 주신 부모님께 만만한 자식이 되어드리지 못한 탓인 것 같습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유순하게 부모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어떤 의견이라도 다 들어드리는 것이야말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15:22)는 말씀처럼 효의 시작이 아닐까요.
예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한 ‘밥’(요6:48)으로 오셨건만 그 밥 먹고 밥이 되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상대가 밥이 되어주기만을 바랄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요.
밥이 되지 못할 때 우리가 먹은 밥도 우리 속에서 밥의 역할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밥이 되지 못한 소치로 인해 주변의 생명들도 죽어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죽어지지 못한 죄악 된 성향이 애틋한 생명들을 금가루처럼 죽음으로 쓸려가게 하는 이 기가 막힌 세상에서 무엇이 죽어 밥이 되었기에 오늘 초록은 이리도 무성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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