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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마을['10.6.20]

2010.06.21 17:41

구인회 조회 수:3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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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의 가슴을  따른 사람 


     

    플라톤은 인간을 날개 없는 두 발 짐승으로 정의를 내리자

    디오게네스는 닭의 털을 뽑아 아카데미 안으로 가지고 들어갑니다.

    인간의 영혼 속에는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세계가 있는데도

    물질로 한정시킨 플라톤의 인간 개념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입니다.

    인간과 짐승과 다른 점은 고통을 겪는 과정에서도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짐승은 고통을 받으면 그건 자기 자신이 받는 고통일 뿐.

    고통 받으면서 다른 짐승이 겪는 고통을 같이 겪는 짐승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고통은 내 고통이자 타인의 고통이기도 합니다.

    누가 폭력을 가하거나 상처를 주었을 때 일방적으로 고통이 나타나는 게 아니라

    어느 누구나 맞으면 같이 아프고 쓰라린 것처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때리는 자나 맞는 자나 그 고통을 같이 느끼는 것입니다.

    이렇게 같은 고통을 겪는다는 의미에서 볼 때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한 아버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한 가족 한 혈통 한가문의 사람이며

    인간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 고통을 겪고

    이웃을 위해 고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님이 누누이 말씀하신 것처럼 성서가 “이웃을 사랑하라” 고 하지 않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뜻은

    궁지에 빠진 그 이웃이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겁니다.

    저기 넘어진 저 사람이 남이 아니라 내가 넘어진 것이요

    저기 실연당한 사람이 남이 아니라 내가 실연당한 것이요

    저기 눈물 흘리는 사람이 남이 아니라 내가 눈물 흘리는 것이요

    저기 병든 사람이 남이 아니라 내가 병든 것이요

    저기 강도 만난 사람이 남이 아니라 내가 강도 만난 것이요

    저기 죽어가는 사람이 남이 아니라 내가 죽어가는 거라는 것이요

    저기 죽은 어머니가 남의 어머니가 아니라 내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타불이 自他不二
 
    “나와 너가 둘이 아니다”는 말씀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성서의 말씀과 대통하고 있습니다.

     베르자예프[Nicolai Berdyaev:1874-1948]는

    “빵을 혼자 먹으면 물질이 되지만 배고픈 사람과 나눠 먹으면 생명이 된다.”

     말씀한 바 있습니다.

     오늘날 물질이 인간의 영혼의 중심을 무너뜨리는 현실 속에서

     나 혼자 부자 되고 나 혼자 배부르게 먹는 음식이

     이 순간 남이 아니라 또 다른 나를 가난하게 하고

     굶주리게 할 수 있다는 한 생각이 영혼에 스치웁니다.

 

    불재, 사람의 영혼을 불 지피는 불타, 물님의 말씀을 띄워 보냅니다.

 

    키에르케고르를 안 만났다면 내 삶이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책 ‘공포와 전율’은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친 것에 대한 생각을 쓴 것이다.

    하느님하고 마주치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공포와 전율이 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처녀가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알린다.

    이것이 마리아에게서 기가막힌 충격이요 전율이 아닌가?

    간음하면 돌 맞아 죽는 세상에서 ‘네가 아기를 가질 것이다.’

    또 천신만고 끝에 낳은 자식을 잡아 제물로 바치라니 !

    눈물이 흐르고 두려움과 전율이 흐르지 않을 수 없다.

    이 명령을 듣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사흘 길을 걸어간다.

    사람에게 사흘은 생각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고 모리아산까지 길을 간다.

    이삭은 가는 곳마다 누가 우물을 뺏으면 말없이 주고 떠나는 사람이다.

    그처럼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장작을 들쳐 매고 사흘 길을 아버지를 따라간다.

    이삭은 다 큰 장성한 아들인데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따라갔겠는가?

    아버지한테 힘으로 안 죽겠다고 덤비면 그 아버지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삭은 전혀 반항하지 않았다.

    그걸 보면 아브라함은 어떤 조건에서도 하느님의 요구에 예스하고

    묵묵히 가버리는 사람이다. 믿음의 세계에서는 막가파 깡패나 다름없다.

    자기 가슴이 아닌 하느님의 가슴을 따른 사람

    자신의 에고가 아닌 믿음 안에서 행동을 했다.

    그 때 천사가 소리지르길 아브라함아 그 일을 하지 말아라.

    그리고 천사가 알려준 대로 덤불에 있는 양을 잡아 바치고 이삭은 살아났다.

    이 사건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란 거룩한 이름을 얻게 되고

    그가 얼마나 하느님을 향한 경외심이 큰 지 입증되었다.

 

    우리는 남녀관계에 있어서 몸은 안가고 그냥 그리워만 하고

    줄곧 생각으로만 좋아하는 사람을 보게 된다.

    때가 되어 결단을 요구받을 때 결단하지 못하고 그냥 좋아만 하는 남자를

    어느 여자가 계속 좋아만 할 수 있겠는가?

    사랑도 매웁게 보여져야할 때가 있다. 그래야 사랑도 완성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사건을 통해서 이를 보여줬다.

    하느님도 아브라함의 마음과 태도가 궁금했는데 이와 같은 행동을 통해서

    하느님도 놀라셨다고 본다.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이삭이 새롭게 보인다. 아들이 반항하면 가능한 일이겠는가?

    요즘 언론에 카이스트에 100억, 300억을 기증한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만약 자식들이 반항한다면 그게 어디 가능한 일이겠는가

    우리 사회에 자식들과 재산 때문에 분쟁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돈을 돈답게 쓰려면 가기 전에 카이스트에 기증하시는 게 낫겠습니다.”

    그래서 카이스트에 새로운 과학 분야의 대학원이 세워졌다.

    조선조 큰 부자 임상옥에 관한 이야기다.

    임상옥은 조선에서 고려인삼을 파는 권리가 가진 거상이다.

    백두산 방면에다 장뇌삼을 재배하여 중국에 내다 팔았다.

    중국 상인들은 헐값에 인삼을 사려고 서로 담합을 했다.

    임상옥은 그 값이라도 팔려고 한 게 아니라 인삼을 다 불질러버린다.

    중국 상인들이 난리가 났다. 장사도 다 수 싸움이다.

    단동에 가 사업가들의 말을 들어보니까

    중국 경제는 한국 경제를 넘어선 지 오래됐다고 한다.

    그 동안 중국에서 생산된 값싼 물건을 마진을 붙여 팔았는데

    이제 한국에서 먹힐만한 물건을 중국에다 파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하는 시점에 왔다고 한다.

    그런 상품을 보거든 소개해 달라고 하는 사업가도 있다.

 

    구약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모습은 신약에서 예수님의 모습과 비슷하다.

    모리아산이 골고다의 제단으로 바뀌었다. 지구의 제단이 바로 골고다다.

    다 같이 공포와 전율의 상황이다.

    이삭은 말씀에 전적으로 따르고 예수님도 전적으로 따랐다.

    두 분 사이에 다른 점은 이삭은 아버지를 따라간 거지만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산제물로 바치러 스스로를 따라 갔다.

    본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가 이 말씀에 쉽게 걸려 넘어간다.

    쉬긴 쉬는 데 무조건 쉬기만 하고 쉬는 목적을 잃어버린 거다.

    쉼이라는 게 지친 사람이 쉬고나서 힘을 얻어 다시 일하고자 함이 아닌가.

    구약의 안식일은 마지막 날이지만 신약의 주일은 첫날이다.

    죽으면 살려야 한다. 쉬는 목적이 예수님을 배우는 거다.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매고 나를 배우라” 고 하지 않았는가.

    이는 단순히 무거운 마음이나 물건을 지는 짐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빛의 멍에다. 율법의 멍에가 아니고 빛의 멍에, 진리의 멍에를 지라는 거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에 앞서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려고

    결단하고 마음먹은 순간이다.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려고 한 결단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고

    십자가는 그분의 마지막 장면이다.

    그동안 교회는 예수님의 결단, 헌신, 순종의 십자가의 내용을 설명하지 않고

    오로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피만 강조했다.

    우리는 예배당에 왜 와야 하는가?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 이전에 이미 부활한 사람이었다.

    무덤으로 가둘 수 있는 생사의 문제를 무덤으로 가둘 수 없는 그런 깨어난 사람이다.

    소시적 예수님이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갔는데 군중에 밀려서

    아들을 잃어버리게 되고 부모가 찾아다닌 일이 있었다.

    성전에 있는 예수님을 찾아 가니까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 모르셨습니까?” 고 대답한다.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십자가의 피는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 마음,

    그 삶에서 찾아져야지 십자가에서 찾아서 되겠는가?

    그 분의 결단과 헌신에서 찾아져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찍어 바른다고 어디 구원이 되겠는가?

    예수님의 ‘피, 피’하는 데 오리지널로 찍기만 하면 뭐가 되는가?

    그분의 결단과 헌신처럼 나도 예수님처럼 살아야 하는 거다.

    그분처럼 인류의 짐을 지지는 못하더라도 이웃의 짐이라도 나눠지고

    자비심과 연민으로 대하는 삶의 과정과

    순간순간 ‘예스, 예스’ 할 수 있는 삶 속에서 구원이 따르게 된다.

 

    인간의 에고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데 무슨 구원이 있겠는가?

    한 인간이 준비되었을 때 비로소 빛의 비전을 보여주신다.

    예수님의 멍에는 빛의 멍에다.

    색의 삼요소는 모으면 모을수록 탁해지지만

   
빛의 삼요소는 모으면 모을수록 투명해진다.

    빛의 특성은 생명과 진리의 특성이다.

    나의 멍에를 매고 나한테 배우라

    너희들도 나처럼 그렇게 살아야지 않겠느냐?

    빛의 멍에를 매고 예수님의 옷을 입고 예수님의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의 역할이 그분만의 역할이 아니라 지금 내 역할이다.

    이천년 전이 아니라 여기서 지금 내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

    오늘날 어디 예배당 간다고 해서 쉼이 있는가?

    오히려 에고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사람들이 모이니까

    예배당이 지옥이 되고 서로 싸우게 된다.

    예수님 안에 계신 하느님은 에니어그램으로 볼 때 도의 상징 9번

    예수님은 지혜의 상징으로 6번, 성령님은 사랑의 상징 3번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을 받아드릴 때 ‘하느님이 내게 주신 능력이 있구나’ 그걸 발견하는 것이다.

    일개 거미도 꽁무니에서 찬란하게 거미줄을 뽑는 능력이 있는데

    인간에게는 엄청난 능력을 주셨다.

    하느님의 신성과 보편적 그리스도를 아는 게 바로 지혜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촛불이 되지 못하고 촛대처럼 사는 경우를 본다.

    예수님은 불지르러 오셨다. 다름 아닌 하늘의 불을 붙이러 오셨다.

    하나의 촛불에 불붙으면 천 개 만 개 계속 이어진다.

    하느님이 힘과 지혜와 사랑을 꺼내 쓰도록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주셨다.

    불행히도 사람들은 그 은혜를 받아 소진하는데 쓰고 있다.

    지혜를 가지고서도 맨날 걱정하고 짐승처럼 사는 게 지구 현실이다.

    히브리 기자는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의 지혜와 사랑으로 살지 못하는 것이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행복하게 못사는 게 죄다

    우리가 자유롭게 못사는 게 죄다

    우리가 빈곤하게 사는 게 죄다

    특별히 우리는 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솔로몬이 하느님께 천 번 제사를 드려 사람들의 가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지혜를 얻었고 그 지혜로 솔로몬은 성공했다

    우리는 어떤 지혜를 구해야 하는가?

    하느님의 가슴을 알아차리고 기쁘게 따를 수 있는 지혜를 간구해야 한다.

    지혜가 없으면 우둔하게 살 수 밖에 없다.

    우리가 하느님의 가슴을 따를 수 있는

    멋진 믿음의 차원까지 이르는 걸 목표로 삼아야 하고

    우리의 기도의 내용에 꼭 들어갔으면 하는 서원을 가져본다.

 

    민들레 작은 싹이 딱딱한 땅을 뚫고 나오는 힘은 무엇인가요?

    하늘에서 빛을 퍼부어대니까 그 빛으로 뚫고 나오는 겁니다.

    사람들이 실력이 없다, 가방끈이 짧다, 죄 많다, 안된다지만

    하느님이 태초부터 원하시고 저 풀을 세우듯이 일으키십니다.

    저 하늘의 빛이 내 몸에 닿듯이

    저 말씀의 빛이 내 영에 닿듯이

    하느님이 꿈꾸시는 세상을

    하느님이 원하시는 부활을 그 누구도 막을 재간이 없습니다.

    

                                                                            s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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