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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건위천 [乾爲天] "하늘"['10.7.25]

2010.07.29 23:54

구인회 조회 수:2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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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은 몸의 등불이다 

 

 

    건위천.jpg

   

    건위천 乾爲天.  주역 64궤 중에 첫 번째 궤

     

    왜 주역의 골격과 내용을 만든 문왕은 주역周易의 첫 번째 궤를

    하늘天이라 명명했을까요?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역易을 만든 이는 괴로움이 많았던 것 같다.” 고 술회하는 것처럼

    문왕의 절박한 처지와 고뇌의 한 장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은나라 말기 달기란 여인에 탐닉한 주왕이 폭정을 일삼고 백성은 도탄에 빠집니다

    문왕의 부친은 주왕에게 죽임을 당하고요

    은나라 관리였던 본인마저 감옥에 갇혀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고립무원의 기막힌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우주의 섭리와 하늘에 의지하는 수밖에 아무런 희망이 없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하늘을 통해서 우주의 이치를 통달했고

    사람은 누구나 죽음에 부딪치면 죽지 않음을 안다고 하는 것처럼

    문왕이 죽음에 직면하여 그 자신을 초월하여 죽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10년을 보내면서 필생의 작업으로 주역의 내용을 완성합니다.


   “건 乾은 원형이정 元亨利貞  건이란 원형이정의 세계다.”

   “건원이란 태어나게 하고 발전하게 하는 것이요

    이정이라는 것은 열매를 맺게 하여 살리는 것이다.“

   “大哉乾元, 萬物資始, 乃統天 대재건원 만물자시 내통천”

   “크다, 건의 의뜸됨이여, 만물을 일으키고 마침내 온 세상을 거느린다.”

   “時乘六龍以御天. 시승육룡이어천” 때에 맞춰 육룡을 타고 온 세상을 다스린다.”

   “潛龍, 勿用. 잠룡 물용. 물 속에 숨어 한없이 힘을 기르는 용”

   “見龍在田, 利見大人 견룡재전 이견대인. 자기 존재를 느끼는 용”

   “君子終日乾乾 군자종일건건 군자는 부지런히 힘써 자신이 된다”

   “或躍在淵, 혹약재연 비약적인 존재”

   “飛龍在天, 利見大人. 비룡재천 이견대인. 용이 하늘을 소요유한다.”

   “亢龍, 有悔. 항용 유회. 정상에 오른 용

   “見群龍, 无首吉  뭇 용을 보되 머리가 없으니 길하다”


    주역에 처음 등장하는 건乾괘는 나는 누구인지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완전한 용이 아니라 잠용潛龍에서 비룡飛龍, 항룡亢龍이 되어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다섯 가지 성장의 단계를

    비존재, 되어감, 존재, 행동, 행동에 근거를 둔 존재로 구분하고

    물님이 인간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되어감의 존재라고 설명하시는 것처럼

    주역은 인간의 원래 용인데 자신이 용임을 잃어버린 존재였으며

    끊임없이 정진하여 자유자재로 하늘을 날고 정상을 향해 오르고 또 올라

    저 산 위의 꿈쩍 않는 항용亢龍이 되어야 함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항용亢龍이 회한이 있다함은 깨달음을 얻고 나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마치 문왕이 나라와 백성의 구원을 위해 온 힘을 기울였듯이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치른 다음 사람 속으로 들어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힘쓰다가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먼저 자신을 구원하고 산 아래 이웃마을로 내려가

    이웃과 세계의 구원을 위해서 빛이 되어야 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飛龍在天, 利見大人.비룡재천 이견대인

    용이 하늘을 나는 한 마리 건이 되어 하늘을 소요유하는 것처럼 이견대인

    물님의 말씀이 빛이 되어 경각산 산허리를 휘돌아 돕니다.


   빛을 선택할 것인가 어둠을 선택할 것인가?

   선택의 문제는 모든 종교의 테마이다.

   연세 드신 분들이 무슨 일이 생기면 전생의 업장이라는 말을 하곤 하는데

   여기서 업장, 카르마는 선택이란 뜻이다.

   내가 어리석은 선택을 해서 죽은 것이 업이고 그 상태를 마야라 한다.

   꿈속의 현실을 현실로 아는 것처럼 꿈에 취해 있는 사람은 마야 상태에 있다.

   업은 빛이 없는 눈 먼 상태로 사는 것이다.

   듣는다고 하는 것 때문에 못 듣고 본 다고 하는 것 때문에 못보고 있다.

   예수님은 소경들이 보고, 절름발이들이 걸으며, 문둥병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머거리들이 들으며, 죽은 자들이 살리려 왔다고 하셨다

   아이리딩을 공부하면서 우리 눈이 비행기의 블랙박스라는 것을 알게 됐다.

   우리 인생이 눈에 다 기록되어 있다. 10배율 돋보기로 보면 눈이 다 다르고

   눈동자의 부위에 몸의 장기와 칼라가 다 배치되어 있다.

   이 눈동자가 구분되어 있는 데 남자는 24칸 여성은 96칸으로 네 배 차이가 난다.

   남자가 뭔 생각을 하나할 때 여성은 네 개가 지나간다.

   여성들이 남성들을 잘 봐줘야하는 동기가 여기에 있다.

   하느님께서 남성들을 답답하게 만드신 거다.

   이런 남성들에게 몰라준다고 하는 것은 과욕이고 욕심이다.

   컴퓨터로 말하자면 4배속 컴퓨터로 여성을 만드신 거다.

   남성들에게도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다.

   왼쪽 눈에 96칸의 채널로 들어가는 장치가 있는 데 노력해야 한다.

   눈은 뇌의 조직과 같다. 아주 섬세한 조직으로 되어 있다.

   이 눈동자를 카메라로 찍어서 확대하면서 공부를 한다.

   신비롭게도 눈동자에 내가 살아온 인생이 다 들어 있다.

   내 눈동자를 정밀하게 들여다보면 희한하게 울타리가 쳐 있다.

   내가 허락하는 것만 받아드리는 성장기에 한 원인이 있는 듯하다.

   눈동자의 위장 포인트에 칼로 베어진 듯한 상처가 있다.

   이는 지성, 이성, 감성의 영역에 상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심방을 다니면서 이 지긋지긋한 위장병이 고쳐졌다.

   그분들을 위로하는 예배가 되려 내게 위로가 된 것이다.

   내 자신을 자책하지 말라. 자책은 내 영혼에 바이러스를 주입시키는 거다.

   불행히도 사람은 자기 자신을 고통 주는데 익숙해 있다.

   내 안에 편재되어 있는 빛을 어둠으로 바꾸고 있다.

   가만히 앉아서 쓸데없이 앞일을 걱정하는 게 인간이다.

   그러다 보면 내 마음, 내 영혼이 무거워진다.

   사람 안에 있는 빛을 가리고 어둠으로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들의 어둠이 얼마나 깊은 것인가? 예수님이 탄식하셨다.


   여기 강대상이 있다. 어떤 분은 교회 강대상이 빈약해 보인다며

   이게 뭐냐고 강대상을 바꿔준다고 제안한 이도 있다.

   그러나 우리교회는 이 작은 강대상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또 이 단촐한 강대상의 좋은 점은 내가 옮기고 싶을 때

   맘대로 옮기고 자리를 바꿔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회에 가면 늘 그 자리만 찾아 앉는 분이 있는데

   교회에 무슨 내 자리가 어디 있는가?

   시간과 공간에 매이니까 좁은 공간에서 자기자리를 찾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의도적으로 자리를 바꿔 앉을 필요가 있다.


   이 강대상을 불에 태우면 열과 빛이 나온다.

   다 타고 나면 아무 것도 안 남는 것처럼 보이지만

   물리학적으로 보면 없어진 게 아니라 변형된 것이다.

   에너지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변형되는 것이다.

   형태가 바꿔지더라도 에너지는 달라지지 않는다.

   물질은 고체 액체 기체의 한 형태일 뿐이며, 고유의 진동 주파수가 있다.

   사람도 순간순간 에너지가 달라진다.

   뇌파도 그 사람의 의식의 상태에 따라 알파 베타 감마파로 달라지며

   잠자리에 들면 뇌파가 가라앉게 되어있다.

   즉 파장이 변조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어제 마이드맵 강좌에서 박용민 원장님이“주도적, 능동적이 되라.”

   말한 바 있다. 같은 상황에서 똑 같은 일인데 비판과 부정적으로 받아드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긍정적으로 받아드려 지혜로 삼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 말씀이 빛을 내뿜는 사람이 있고

   어둠의 파장을 내 보내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걸 잘 생각해 봐야 한다.

   인간의 영광과 존엄이 어디 있을까?

   우리자신의 빛을 딸려 보낼 때 그 존엄이 살아난다.

   그 빛을 감추거나 됫박으로 가려서는 안 된다.

   그 빛을 됫박으로 덮어놓고 산다는 의미는 에고와 성격에 얽매여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와 관련해서 미망 迷妄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는 병이다. 빛을 어둠으로 바꾸는 병이며, 치료받지 않으면 안된다.


   같은 벽면에 동종의 추가 달린 시계를 걸어두고 관찰해 보니까

   처음에는 제각각이었지만 몇 시간이 지나자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졌다.

   운동하는 물질은 같이 움직여지는 특징이 있는 것이다.

   하물며 인간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
   텐러버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수련생끼리 맥박을 서로 통하게 하는 거다.

   내 몸에서 뛰는 이 맥이 똑 같은 방식으로 뛰는 게 아니다.

   그러던 것이 한 사람이 맥을 잡고 깊은 의식으로 들어가게 되면

   호흡도 맥박도 같아지게 되고 서로 통하는 어떤 것이 있게 된다.

   이렇게 인간은 너무나 섬세하고 미묘한 거다.

   인간이 어떤 파동을 같이하면 그 사람의 의식과 감정이 나에게 전이된다.

   사람의 의식이 은연 중 타인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

   어떤 공간에 화가 난 사람이 오면 전체가 긴장 상태가 된다.

   그 사람의 화에너지와 파동이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여기 불재 진달래교회까지 온다는 것은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어디에서든지 준비된 상태로 오면 정신적인 감흥이 서로에게 통하게 된다.

   집단적인 파장이 흐르는 곳이 아파트인데 집집마다 분위기가 다르다.

   그 집 파장이 그런 거다. 준비된 의식의 파장이 영향을 준다.

   나비효과라는 것이 대양 건너편 나비의 날개 짓이 태풍이 된다는 것이 아닌가?

   한 사람의 의식이 지구 전체에 영향을 준다.

   의인 열 사람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가 망했다고 전한다.

   그 열 사람은 누구인가? 영혼의 눈이 떠진 사람들이다.

   우리는 에너지 파장이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 지 알아차려야 한다.

   사랑의 에너지를 내뿜고 지혜의 파동을 내보내는 사람이 되라.

   돌이켜 보면 사형수의 십자가가 구원의 상징이 되었다.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를 못 박는 사람들을 용서하셨다.

   마이너스 에너지가 치밀어오는 순간에도 플러스 에너지로 대하셨다.

   부정적인 에너지가 많은 가운데서도 플러스의 에너지로 바꿔서 내보내는

   의식을 가진 사람이 곧 그리스도다.

   여러분들이 그런 의식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자기 자신의 파동에너지를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들이 중대한 과제와

   현실을 지배한다. 그 상황을 지배할 수 있는 자가 그 자신이 되고

   또 자신이 빛이 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자신이 빛이 아니면 문제다.

   에고의 됫박으로 내 안의 빛을 가리고 살지 말라는 게 예수님의 말씀이다.

   깨어있는 선택을 하라. 이는 어둠이 아니라 빛을 선택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정신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선택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이 삶의 노예가 되는 수밖에 없다.

   내 느낌과 행동, 선택할 수 있는 힘을 달리 말하면 자유 의지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빛과 자유의지를 주셨다. 이는 놀라운 은혜다.

   이 두 가지를 잘 쓰고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 살지 말라.

   인생의 선택권을 내가 두 번째 아담인 예수처럼 제대로 쓰고 가자는 것이

   삶의 큰 주제다. 다시 말하면 너희들 안에 빛이 어둠으로 바꿔지면

   너희의 어둠이 얼마나 깊겠느냐?

   하느님의 빛은 절대적인 빛이다.

   우리는 이 빛을 어둠으로 고통으로 바꿔놓으려고 노력한다.

   지난번에 설명했듯이 키르헤의 눈, 그 눈 만 뜨면 내가 사는 이 곳이

   이 지구가 천국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열심히 지옥을 찍어내며 산다.

   이는 악마가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는 것이다.

   존재가 어두워지면 삶을 애매모호하게 답답하게 산다.

   답이 두개 이상인 것이 답답한 것이다.

   이게 옳은지 저게 옳은지 모르고 애매모호하고 답답하게 하는 것이

   악마가 하는 짓이다.


   이제는 지성의 시대가 아니라 영성의 시대다.

   이제는 정신이 아니라 직관의 시대다.

   영성과 직관에서 이 세상 모든 분야가 결판이 난다.

   영성적 감각의 핵심은 내 안에 주신 빛을 억압하거나 가두지 않는 것이다.

     내 안의 빛이나 상대방의 빛이나 다 똑같다.

    그런 의미에서 타인을 차별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내 밖에 있는 나는 바로 여러분들이다.

    그걸 알 때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예수님께서 내 몸처럼 십자가도 지셨고 그 존재가 인류에게 주신 미래다.

    내 안의 빛을 어둠으로 다른 이의 빛을 어둠으로 덮어씌우지 않아야 한다.

    이 일을 우리 교회가 감당해야 하며 또 다른 도구가 바로 에니어그램이다.

    저 텐에니어그램 도형이 온 인류에게 제시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각자 각자 고유의 파동이 있고 내 안에 총체적인 주파수가 다 있다.

    그 총체적인 것을 다 찾아 써야한다.

    이것이 오늘 아침에 주신 한 생각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은 곧 빛이시라더니

    태초부터 계셨던 그리스도가 물님을 통해서 각 사람의 머리 위로

    빛을 뿌려주는 듯, 그분의 사랑과 지혜의 에너지가

    지금 이 순간 영혼을 울리는 빛으로 다가옵니다.

    마음이 심난하고 갈피를 못 잡는 분이 계시거든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단 한번 만이라도 마음을 내 여기에 오셔서 말씀을 청강하시기 바랍니다.



                                                                  si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