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연구 논문 -고재호
2010.11.01 08:13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이해
가인과 아벨이야기(창4:1-8)를 중심으로
Understanding of God’s choice
고 재 호
목 차
Ⅰ. 서론 1
1. 문제제기 및 연구 목적 …………………………………………………………3
Ⅱ. 선행 연구조사 5
1. 하나님의 이름 연구 5
1) 족장들의 하나님 7
2) 엘(l~oa)신 9
3) 야웨(hw:hoy_)하나님 10
4) 다신에서 단일신, 단일신에서 유일신으로 12
5) 거룩한 분, 거룩한 삶 13
2. 성서기자의 눈 16
1) J기자 18
2) P기자 19
3) E기자 21
3. 회상의 신앙 공동체 21
4. 선악과와 지혜 23
1) 아룸( !Wr[)의 용례 24
2) 지혜문학 26
3) 지혜문학의 형성과 토착화 27
5. 아담과 하와-가인과 아벨이야기의 연관성 32
6. 신약성서에 본문에 나타난 가인과 아벨 34
7. 가인과 아벨이야기의 선행연구조사 39
1) Von Rad의 연구 39
2) Walter brueggemann의 연구 39
3) Claus Westermann의 연구 40
4) Speiser의 연구 41
Ⅲ. 본론 42
1. 본문의 내용연구 42
2. 본문의 구조 배열방식 46
3. 본문내용 검토 49
4.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이해 54
Ⅳ. 결론 57
Ⅴ. 참고문헌 59
Ⅰ. 서론
성서는 우리에게 귀중한 회상을 갖도록 한다. 우리는 성서속의 사건들 또는 이야기를 통하여 귀중한 교훈을 얻어 이 땅의 삶의 환경을 극복하는 힘을 얻는다. 믿는 자에게는 좌절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역사 그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말씀이며 그것은 곧 힘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영원한 생수를 얻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 말씀은 영생하도록 솟아오르는 샘물이 되기 때문이다. 영생하도록 솟아오르는 샘물, 그것을 달리 표현한 것이 곧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의 행위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그 선택에도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그 기준에 대하여는 우리 인간이 말할 수는 없지만 성서를 통하여 확인 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 그 기준의 척도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한 에덴동산에서의 삶은 언제나 보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것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눈길이며 보살핌이다. 로 이해한다.
“주 너의 하나님이 몸소 돌보시는 땅이고, 주 너의 하나님의 눈길이 해마다 정초부터 섣달 그믐날까지 늘 보살펴 주시는 땅이다.” (신 11:12)
가인과 아벨이야기 본문의 위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선악과를 따 먹은 후의 이야기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후 아담과 하와, 곧 인간에게 변화가 생긴 것은 사랑의 하나님이 두려움의 하나님이 되었다는 것과 언어의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존재를 ‘번역’하는 언어가 단순 ‘도구화’가 되었다. 사물의 이름 되는 언어, 그 사물에 일치하는 이름으로서 고유한 언어가 타락한 것이다. 언어가 타락하고, 사랑의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 어둠속에 있는 자는 빛을 싫어한다. 이제 에덴은 더 이상 그들의 낙원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두려워하는 아담과 하와를 당신으로부터 멀리 보낸다. 에덴동산을 버리고 떠나옴 또는 쫓겨 옴은 하나님의 잘못이 아닌 인간의 잘못, 곧 우리의 잘못임을 성서는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나라를 잃고 고통과 어려움에 처한 이스라엘민족에게는 귀중한 과거의 경험으로 인식하는데 그것은 곧, 우리의 잘못으로 나라를 잃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잘못으로 낙원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열약하고 나약한 우리를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선택하셔서 다시금 축복하시고 영원한 약속을 보장하셨다는 성서의 말씀은 어려운 고통의 현실을 이길 수 있는 희망의 힘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는 그들에게는 더욱 귀중한 희망의 회상을 안겨주는 작용을 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 논문을 전개하기 전 선행 조사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신앙의 역사에서 본문의 위치를 주의 깊게 살펴 볼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지혜사상에 대하여 솔로몬왕과 관련지어 살펴 볼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와 가인과 아벨이야기 본문의 연결성을 살펴봄으로서 이스라엘 신앙의 역사에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의 의미를 찾아보려는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하여는 본 논문에서는 서술하는 형식으로 안내할 것이며 구체적인 것은 다음 연구자의 몫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본 논문은 창 4:1-8절을 중심으로 가인과 아벨의 제물 열납과 하나님의 선택에 관하여 연구하고자 한다. 가인과 아벨이야기는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후 그의 아들들에게서 일어난 사건으로 그 해석에 있어서 다양한 목소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Walter Brueggemann은 이 이야기의 중심 주제를 인간의 운명과 형제 문제로 보고 있다. 또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것에 대하여 “가인이 배척당하는 것은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하나님만이 자유로우시다. 우리 사이에 살인적인 충동이 생겨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로 설명하고 있다. 특별한 이유 없이 배척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그분의 정의( fP;v]mi)와 공의( hq;d;x])의 문제에 부딪히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선택은 그분의 정의와 공의에 의한 것이며 한 치의 오차도 있을 수 없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사랑이시다. 그분의 선택은 불공정하거나 인간을 결코 어둠으로 몰아가지 않는다. 그것은 빛을 그리워하는 자의 것일 것이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을 성서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Claus Westermann은 사뭇 말을 아끼는 모양이다. 모두가 잘 알고 있을 것 같은 이야기일 것 같은데 해석상에 많은 의문을 남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분명한 것은 인간에게 향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본문을 연구하면서 찾아보자는 것이다. 인간에게 복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죄로부터 돌이켜 서로간의 언어를 회복하고 걸림이 되지 않은 실존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은 빛을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선택의 모습이며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조명하여 보고자 한다.
1. 문제제기 및 연구 목적
가인과 아벨이야기는 창세기 서두에 나오는 이스라엘 신학 전승에 속한 것으로 아담과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후 그 아들들의 첫 이야기이며 또한 현대 사회에도 파장을 일으키는 살인사건이다. 그것도 형이 동생을 죽인사건이다. 이 본문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해석상에서는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난해한 본문이기도 하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중동지방의 정착된 농업민(가인)과 유목민(아벨) 사이에 일어난 분쟁으로 간주하여 볼 것인가. 이스라엘의 암울한 역사인 바빌론 포로기의 역사를 하나님의 버림이라는 가인의 역사로 볼 것인가. 아니면 피의 제사가 아니라서 하나님이 받지 않은 것인가. 이 본문을 통하여 던져지는 물음은, 가) 하나님의 선택의 기준은 무엇인가? 왜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나? 나)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을 가지고 본문을 접근하여 연구해 보고자 한다.
Ⅱ. 선행 연구조사
성서의속의 하나님 이름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인과 아벨 본문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에호바)이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온다. 본 장에서는 하나님 이름 대하여 연구 조사하고자 한다.
1. 하나님의 이름 연구
창세기의 창조이야기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단수· 복수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님이!yhil~a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창 1:26) -복수
주 하나님 !yhil|a> hw:hy_이 말씀하셨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겠다." (창 2:18) -단수
주 하나님!yhil|a> hw:hy_ 이 말씀하셨다. "보아라, 이 사람이 우리WNM,mi 가운데 하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 (창 3:22) -복수
창세기에서 신의 이름이 단수∙복수형으로 서로 다른 이유를 성서 고고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다.
첫째, 서로 다른 전승 자료가 뒤섞여 편집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창세신화들이 수용된 흔적이 남음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일신교인 유대교는 주변의 다신교와 대항하기 위해 메소포타미아의 천사개념을 수용해야만 했다. 는 것이다. 유대 민족이 가나안을 침략하기 전 그곳에는 농업의 신 바알신이 있었다. 바알신은 태양신으로 바알 신 주변으로 친척 신들이 많았기 때문에 태양신을 중심으로 한 다신교가 형성되었다. 전능한 여호와 신이 단일 신으로서는 바알 신과 그에 합세한 친척 신들에게 세가 밀리자 메소포타미아의 천사들을 수용하여 그들에 대응하려 하였다. 이 결과로 여호와 신과 천사들을 모두 지칭하여 ‘우리’라는 표현이 쓰이게 된 것으로 본다.
유대교는 一神敎이다. 신이 복수형이 될 수 없다. 메소포타미아의 창세신화에서 신들이 모여 인간 창조를 결정하는데, 바로 이 수메르의 신(Dingir ; 딩기르)들이 창세기에 수용되어 엘로힘으로 편집되었다. 는 것이다. 우리는 엘로힘( !yhil~a>)은 가나안 신 ‘엘’ ( H'/la> 또는 H'l~a>)의 복수 형태이다. 성서고고학자료에서 살펴보았다. 중요한 것은 신앙의 역사에서 왜 하나님이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났느냐? 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스라엘에게 바빌론 포로기는 이미 연약함과 수치심, 그리고 패배감은 소극적이며 부정적인 인간상이 당시에 만연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P기자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언제나, 어디서나 자신들과 함께 하시며, 신중의 신이시다는 긍정적이며 희망찬 이야기를 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마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그대로 닮은 존재가 바로 이스라엘 이라고 말이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스라엘 신앙의 위기에서였다. 여호와가 시온을 지상의 자기 거처로 영원히 선택하였다는 확신과 다윗에게 결코 종말이 없는 영원한 왕조를 주겠다고 한 여호와의 무조건적인 약속이 위기에 처해진 것이다. 이러한 교의로 보호를 받고 있었던 이 민족의 백성들은 태평스럽게 마음을 놓고 지냈다. 또한 이를 경고했던 선지자들의 설교를 이단으로 배격하면서 자신만만하게 여호와의 권능 있는 개입과 여호와의 의롭고 자비로운 통치를 굳건히 확립하고 모든 왕조의 약속들을 실현하게 될 다윗 가문의 이상적인 자손이 나타날 미래를 기다렸다.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확신 속에서 기다려온 민족사의 진로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멸망을 계기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지위 자체가 의문시되고 말았다.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에는 항상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 있어왔다. 그런데 이방 국가의 침략아래에서 침략국가의 신이 자신들의 신보다 우월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우월하지는 않아도 과연 자신들의 신이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한 회의마저 들었던 것이다. 정말로 신앙의 기초가 흔들리기에 충분한 민족적인 시련이 다가왔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민족적인 시련을 믿음 가운데 극복하고자 하는 그룹이 나타났다. 이들은 전통과 율법에 대한 강조를 통해서 민족의 정체성을 찾으려 했다. 특히 안식일과 할례는 둘 다 오래된 제도였지만 전에 없이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안식일의 엄격한 준수가 충실한 유대인의 증표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는 주변적인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포로로 잡혀 온 유대인들에게는 이미 신앙의 가시적인 상징들이 사라진 상태에서 그것들은 신앙을 고백하는 수단들이었다. 여기에 나타난 신의 모습은 전능한 하나님(yD'v' laeAynIa :아니 엘 삿다이)이신 것이다.
1) 족장들의 하나님
여호수아24장과 출 3,6장에 기록에서 아브라함이전 조상들은 야웨와는 다른 신을 섬겼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여호수아의 연설에서도 야웨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소. 옛날에, 아브라함과 나홀의 아비 데라를 비롯한 너희 조상은 유프라테스 강 건너에 살면서 다른 신들을 섬겼다. 그러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건너에서 이끌어 내어, 그를 가나안 온 땅에 두루 다니게 하였으며, 자손을 많이 보게 하였다. 내가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 (수 24:2-수 24:3)
주님을 섬기고 싶지 않거든, 조상들이 강 저쪽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아니면 여러분이 살고 있는 땅 아모리 사람들의 신들이든지, 여러분이 어떤 신들을 섬길 것인지를 오늘 선택하시오. 나와 나의 집안은 주를 섬길 것이오."
(수 24:15)
창세기 12-50장에 들어있는 족장이야기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명칭은 나바티아와 팔미라 비문에도 등장하는데, 족장 사들의 신앙을 재구성하는 일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알트(A. Alt)는 1929년 “Der Gott der Vater”라는 논문에서 이들 족장들의 하나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족장들의 하나님은 그가 한 장소와 한정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 집단과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한 개인에게 나타났으며, 그 개인의 이름에 따라 불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개인은 혼자가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이들 “조상들의 하나님”은 인간에게만, 인간을 통해서만 계시하신다. 그리고 이 계시의 수령자는 아직 제사장이나 어떤 특정한 직분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 그 씨족을 대표하는 씨족장이 역할을 하였다. 또한 “조상들의 하나님”은 유목민들의 하나님으로서 일정한 장소에 얽매여 있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진다.
그러나 알버츠(R. Albertz)는 “조상들의 하나님”의 종교적 특성보다는 “족장종교”, “가족 중심의 하나님”이라는 관점에서 보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족장종교에서 야웨 종교로의 변이는 가족 중심의 종교에서 더 큰 사회, 즉 큰 집단이나 국가 중심의 종교 형태로의 변화라고 이야기 한다.
2) 엘 (l~a) 신
엘 신의 이름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집단이 팔레스틴의 여러 곳을 정착하면서 가나안 종교와의 혼합에서 생겨난다. 그들과 관련된 성소의 이름 등에서 나타나는데, 곧 베이트엘, 브누엘, 엘로이, 엘삿다이 등이다. 엘 신은 우가릿 문헌에서는 가나안 만신전의 우두머리 신이다. 엘의 주된 별명이 “황소” 이었다. 아이스펠트가 지적했듯이 각 지역의 신들은 엘 신이 그 지역들에서 나타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엘 신과의 결합이 있을지라도 가나안 엘 신의 성격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다음 성서본문을 보면 내용을 알 수 있다.
(17)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왕이 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21)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 (22)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창 14:17-22절)
여기에서 살렘( !lev;)왕 멜기세덱( qd,x,AyKil]m')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나의 왕은 정의롭다. 평화의왕이라는 뜻이다. 이 왕이 가나안 만전 신을 섬기는 제사장이며 또한 왕이다. 이 왕이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yl][, lae :엘 일리온)을”을 찬송한다. 이러한 신에 대한 표현은 바로 아브라함에게 새롭게 적용되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의식의 발전을 가져오며 그의 신에 대한 개념 속에 여호와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yl][, lae hw:hy_Ala, )” 라는 표현이 그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족장들의 하나님이 엘 신과 결합하게 되어 엘로힘으로 불린 것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엘”은 어느 최고신의 고유한 이름뿐만 아니라 동시에 “신”에 대한 일반적 표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이스마-엘과 같이 “엘”과 결합한 이름이 족장 시대 인물에 많이 나온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미완료동상+엘”의 이름이 기원전 2,000년대에 동쪽의 아라비아 사막으로부터 고대 근동의 경작지역으로 이주해 들어왔던 본래의 아랍족과 아모리족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데, 이스라엘 조상들 역시 이러한 이주민들 집단에 속해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내용은 신26장5절의 표현으로 짐작할 수 있다.
(5)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소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우거하여 필경은 거기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더니 (신 26:5절)
3) 야웨 (hw:hoy_) 하나님
야웨라는 이름은 기원전 3000년대의 에블라(Ebla) 발굴지에 Ya라는 신명(神名) 또는 Ya-u라는 이름과 비슷하다. 따라서 시리아에서는 야웨가 처음에는 가나안의 한 신으로서“엘”의 아들이었다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마리(mari) 지역에서도 야웨라는 이름과 비슷한 야위(Yawi)라는 표현의 동사 형태가 발견 되었다. 에집트 문헌에서도 “샤수-야웨”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여기에서 야웨는 산간지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나타나 구약성서의 초기 증거에 부합되며, 더 나아가서는 팔레스틴 남동쪽 지역(세일)에 관한 관심을 유발하게 한다. 이런 사실들에 근거하여 생각해보면, 성서속의 하나님의 이름은 전혀 새로운 이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성서의 문화, 이름을 포함한 문화는 이미 그 지방에 있었던 것을 더 발전시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재탄생되는 것이다. 할례의 예를 들 수 있다. 이스라엘은 낳은지 8일 만에 할례를 시행하기를 하나님의 명령으로 전달하고 있지만, 이집트에서는 14세때 할례를 거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전혀 새로운 것이된다. 이집트의 할례는 청결과 조루방지에 목적이 있는 반면, 이스라엘의 할례는 하나님과의 계약에 관한 목적이 있다. 이러한 할례의 목적은 또한 성적인 타락을 방지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을 보여진다.
“(9)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10)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2)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3)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창 17:9-14절)
성서의 최종형태 본문에서 야웨hw:hoy_라는 말은 언제 나타나는가이다. 그것은 창조 설화에서부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대 가장 유력한 설명으로는 출애굽기 3:14에서 모세가 미디안 광야 가시덤불 속에 나타나신 야웨 하나님을 체험하고, 소명을 받아 야웨 하나님의 존재와 이름을 전해준 것으로 본다. 이 사건의 기록이 이스라엘과 야웨의 최초 만남이라는 의견에 호응을 얻고 있다. 이 본문에서 야웨라는 이름은 (hy<h]a, rv,a} hy<h]a,);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 (hy<h]a,)는 ( hy:h;)하야동사에서 왔다. 이 동사는 ‘현존하다/활동하다/일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be동사의 사역형(Hiphil)으로 “존재하게 하는 자”, 즉 “창조주”의 의미로 보기도 하지만, 원문에 be동사의 사역형이 등장하지 않는 취약점을 지니고 있어 “나는 존재할 것이다.”, “나는 활동할 것이다”, “있고 있는 자”등으로 “명사”가 아니라“동사”이다. 이 이름은 출 3:12절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과도 일치한다. 이 약속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영원한 약속이요 믿음이다. 이런 하나님의 이름은 “J"기자의 활동으로 성서 전반에 등장하고 있지만, 최초의 기록문서인 출애굽기는 야웨 하나님이 출애굽의 하나님이며 최초로 나타나 당신의 이름을 나타내신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2)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3)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출 6:2-3)
4) 다신에서 단일신, 단일신에서 유일신으로
이스라엘백성들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정리하면, 하나님의 이름의 변화는 다신에서 단일신으로, 단일신에서 유일신으로 변화 되어 감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한 개인에게 나타났으며, 그 개인의 이름에 따라 불리게 된 것이다. 그 개인은 다수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족장들) 이다. “조상들의 하나님”은 인간에게만, 인간을 통해서만 계시하신다. 이 하나님은 유목민들의 하나님으로써 일정한 장소에 얽매여 있지 않는 하나님임을 앞 절에서 살펴보았다. 구약성서의 하나님 상은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등 세계 3대 종교의 하나님 상이다. (김경제, “기독교와 세계 고등 종교의 만남”) 이 하나님은 다신에 대하여 단일 신으로 모든 신들보다 뛰어나고 위대한 신을 이야기한다. 그러다가 후대로 가면서 유일신으로 변화된 유일신 사상이 나타난다. 처음 유일 신앙이 생겨난 시기를 왕정초기시대로 사울 왕 때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당시 그 시대 지역의 특징적인 유일 신앙은 바로 국가의 신을 숭배하는 것이었는데 철기시대에 국가의 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철기시대에 페니키아 지역을 제외하고는, 남쪽 지중해 연안에서 전형적인 종교의 형태가 유일신교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야웨 신앙이 생겨났다는 추측은 개인의 이름에 야웨를 포함하는 이름들이 이스라엘 전통에서 최초로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인데, 족장들과 사사시대에도 야웨라는 이름은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울의 아들 중 한명은 야웨 이름을 가졌다. 요나단은 “야웨께서 (이아이를)주셨다”는 의미이며, 이스위는 “야웨의 사람”이라는 의미로 본다. 그러나 진정한 야웨신앙의 등장은 히스기야와 요시야의 종교개혁이다. 이때 여러 신들의 형상들과 각 지방의 산당들이 제거된다. 또한 예루살렘의 멸망함과 함께 하나님의 개념은 추상적인 우주적 유일신 하나님 개념으로 기원전 6세기에 형성된다. 이스라엘 종교가 포로기 이전 시대에는 다신론의 종교였다가, 엘리야, 엘리사, 예후 그리고 호세아 시대를 거치면서 유일 신론적 경향을 띠게 되었으며, 그 후 요시아 종교개혁과 포로기 시기에 이르러 제2이사야에 의해 유일 신론을 확립하게 되었다는 견해이다. 이 이론은 모세시대로부터 유일신 사상이 있었다고 보는 전통적 견해와는 정면으로 대치되는 주장이다.
5) 거룩한 분, 거룩한 삶
한 하나님, 곧 유일신으로 귀결되는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상은 고대 주변 민족의 종교라는 맥락 속에서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그들은 여러 종교적 요소들과 더불어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는 혼합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주변의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새로운 하나님의 상을 되찾고자 하는 노력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런 그들만의 하나님 상을 찾는 모습으로 인해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는 고대 근동의 다른 종교와는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 이 하나님은 약속의 말씀 속에서 신앙의 희망위에 우뚝 서게 하는 하나님이며, 신앙의 희망은 고통과 죽음의 경험적 현실을 넘어서게 하는 믿음을 제공한다. 칼빈의 말대로 “이 세상을 넘어가려고 서두르는 힘이다.” 고통 받는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으로 거룩하신 분이다. 신명기 4:35; 4:39; 6:4절에서는 오직 하나님은 한 분이신 유일한 분이며 거룩하신 분이라는 사상을 언급하고 있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출 15:11).
이 하나님은 8세기 예언자 호세아가 백성 중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의 의미를 표현한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 나는 네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 하리라 (호 11:9)
이스라엘 전승에서 거룩은 야웨hw:hoy_(에호바)의 이름과 관련된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밝히는 형태에서 분명하다. 야웨라고 하는 거룩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변화와 다양 속에서 신학적으로 계속되었다. 포로기 전후 이스라엘 종교는 인격종교로 발전한다. 야웨 하나님이 개인적 종교, 인격적 종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발은 예레미야로부터 시작된다. 예레미야(렘 1:1~3)는 두 번째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미 국가는 망했으며 종교 공동체는 해산되었음을 간파한다. 그러나 민족이 살아남는 다면 국가는 다시 재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새 계약을 선포한다. 국가의 종교를 민족 개인 신앙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한 것이다.
“나는 나의 율법을 그들의 마음에 새겨두었으니
내가 그들의 심장 위에 기록하리라. 그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렘 31:31)
성서의 하나님 야웨의 거룩은 비인격적인 힘인 “It”그것이 아니라, 백성이 기도와 경배의 “나와 당신”의 관계 속에서 사용하는…“당신”Thou으로 나타난다. 발터 아이히로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거룩”은 하나님의 이름에 요약되는 그분의 속성과 작용(영향력)을 신적인 “당신”으로 설명하는 데 적당하게 보이는 칭호이다; 이런 이유로 그것은 독특하게 하나님의 특성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성격을 구성하는 것으로 의미하게 되었다. 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야웨 너의 하나님이 거룩함이라(레 19:2)
지금까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하여 연구 조사하였다. 하나님이 다신→단일신→유일신의 여러 모습으로 나온다고 할지라도 이스라엘백성의 하나님은 한분임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고백되어진 하나님은 야웨hw:hoy_(에호바)이시며, 그 분이 출애굽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예언자가 선포한 메시지 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제의 예배나 받으시는 주가 아니라 역사의 한복판에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제의보다 더 중요시하는 하나님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2. 성서기자의 눈
본문 창 4:1-8에서의 하나님의 이름은 야웨hw:hoy_(에호바)이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라는 이름은 다음 장에서 연구되는 "J"문서와 관련된다. 이들을 야웨스트라고 부르는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을 야웨로 불렀기 때문이다. 야웨스트 문체는 단순하고 강하며, 그 내용엔 하나님에 관한 사정을 인간의 언어와 행동양식에 비추어 표현하는 의인화(擬人化)수법이 자주 등장한다. 가인과 아벨이야기에서 이 이야기를 단순한 민담이나 설화로 처리한다면 이것은 매우 중대한 잘못이다. 이 문헌의 원초적인 자료가 민담이나 설화라 할지라도 거기엔 신앙을 선포하려는 위대한 신념이 담겨져 있다. J기자는 솔로몬 왕궁 서기관들의 주변 인물로서 시대는 제국 분열의 첫 위기가 밀어닥치고 있으나, 다윗 시대보다 훨씬 더 안정과 번영의 분위기를 강하게 느끼는 시대이다. 이 시대는 평화 무역과 문화 수입으로 말미암아, 농업에서부터 잠언의 지혜와 문학의 발전에 이르기까지 경제와 문화의 고도성장이 이룩되던 시절이다. 이런 시대에 J기자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어떤 말을 선포해야 했을까?
경전으로서의 성서는 신앙을 고백하는 공동체의 작품이며, 그 공동체가 무엇을 고백하려고 하였는가를 밝히는 데에 성서 해석의 내용이 주로 포함되어 있다. 성서 본문에서 메시지를 찾는다는 것은, 그 본문 어디엔가 신앙을 고백하는 공동체가 선포한 신앙의 표현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볼프와 폰 라드는 역사문제, 문서이전의 문제(궁켈이 강조), 이스라엘의 종교발전의 개념, 성서와 고대 근동 문화와의 관계(올브라이트 강조) 등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었다. 그 이유를 신앙고백적인 성서의 성격자체가 그러한 것을 거부한다. 라고 말한다. 특히 오경은 종교적인 확신이나 어느 개인의 관습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수집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신앙의 척도이며 누구나 꼭 믿어야할 사실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바르멘 선언 선언이후 폰라트는 “성서의 자료들 중에서 신앙 고백이 내용을 정리하고 모든 설화들의 의도를 통일시킨 그 메시지적인 목표는 무엇이었는가? 이 물음은 고백교회를 위하여 시급한 문제였으며, 이것 때문에 폰 라드와 볼프는 모든 본문을 신앙 고백적인 증언으로 보게 된다. 이와 같이 볼프와 폰라드는 두 가지 중요한 전제를 지니고 있다.
첫째 성서의 본문 속에서 우리는 단순히 흥미 있는 설화들만을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수많은 신앙 고백이 들어 있다. 그 설화들 속에 본래는 그런 신앙고백의 의도가 없었으나, 신앙 고백의 의미를 증언하기 위하여 재형성된 것이다.
둘째는 성서의 본문에 나타난 신앙 고백은 무시간적인 증언(a timeless statement)이 아니라, 언제나 특정한 역사적인 위기와 관련을 맺고 있다. 즉 그 시대에 대한 신앙의 문서이며, 우리는 먼저 그러한 관련에서 본문을 이해해야 한다.
1850년대 이후 구약 학자들은 대부분 오경의 기본 자료를 JEDP로 보았는데, 이 4문서는 단순히 문학적인 창작품은 아니다. 그것들은 어떤 위기에 처하였을 때 신앙을 고백하려는 중요한 네 가지의 노력이었다. 여기에서는 먼저 창세기의 중요한 위치에 있는 J와 P를 살펴보기로 한다.
J자료는 주전10세기의 상황 즉, 다윗-솔로몬 시대로(70년 통치기간) 보며, P자료는 주전 6세기 바벨론 포로기 시기에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J자료의 창조이야기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가장 으뜸 되는 인간과 창조주와의 올바른 관계를 가르치려는 것을 목적으로, P자료는 바벨론 포로기 때에 해이해져가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안식일 준수정신을 되살릴 목적으로 기록하였다. 창세기이야기의 타락주제는 구약 신학에서만 나타나는 특수한 형태이다.
그렇다면 오경형성의 시기는 언제인가? 최종편집자로는 바빌론 유배시절 사제계급(P)으로 간주되고, 오경의 형성은 페르시아시대로 페르시아는 거대한 제국을 관리하기 위해서 각 지방 또는 각 민족의 법을 중앙의 법으로 인정하고 시행하도록 정책을 펼쳤다. 이를 통해 다 민족간의 충돌을 막고, 제국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유지하려는 정부정책에 따라 유대 전통, 법, 관습을 담은 것이 오경이다. 오경은 에스라(BC 400년경)와 제사장 그룹이 모여 페르시아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1) J 기자
J기자는 통일 왕조시대에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 하에서 신앙을 표현하려는 노력이었다. 그 시대의 이스라엘 역사(주전 1000-922)는 “이스라엘의 여명기”로 경제적인 부흥과 세속화의 시대로서, 권력과 번영에 대한 추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이라는 자기 개념을 위태롭게 하였다. J전승은 그 왕조에 대한 비평이면서 동시에 변명이다.(볼프) 왕조의 교만을 규탄하고, 자기 추구를 폭로하며, 그 왕조에 대한 모든 궁극적인 관심을 비난하기 때문에 비평적이다. 그 왕조는 자체의 목적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축복을 전달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J전통은 상기시켜 주고 있다. 반면, 다윗과 아브라함을 연결시켜 주며, 이스라엘의 특수한 왕조는 괴로움을 받는 세계에 대하여 축복을 전달하는 자로 선택된 자라는 예화를 제시함으로써 자기 왕조에 대한 변호를 하고 있다. 이와 같이 J전통은 권력과 신왕에 대하여, 하나님을 믿는 신뢰와 인간의 저력을 의지하는 확신에 대하여 아주 일찍이, 논리 정연한 진술을 제기하고 있다. J 기자는 왕좌의 세심한 감시를 받으면서 작업을 하였고, 이스라엘의 매우 오래된 회상(回想)들 속에서 새로운 자기의식의 요소들을 식별해 내었다. 이스라엘은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의 축복을 위하여 존속한다는 자각이다. 주전 10세기의 자기만족적인 평안한 상황 속에서 성서의 가장 강력한 선교의 원동력들 중에서 하나가 등장하였다. 볼프가 지적한 바와 같이, J 기자는 놀라운 선교적인 증언을 하였다. 그것은 한편으로 권력과 그 효과에 대한 증언이며, 종교적인 통찰력과 정치적인 사실을 즉각적이고 결과적인 긴장 속에서 보고 증언한 것이다. 이러한 증언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성서는 인간의 죄와 허물을 서슴없이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2) P 기자
창 1:1-2:4a는 P자료, 2:4b-2:25는 J자료로 보는데, P(BC6세기경)는 P는 J(BC10세기경)자료 층의 창조설화를 그대로 수정하거나 가감하지 않고 포용하면서 그것과는 대립되는 자신의 창조관을 1장에 덧붙이고 있다.
P 기자의 사상적 배경을 살펴보면, 이스라엘에게 바빌론 포로기는 이미 연약함과 수치심, 그리고 패배감은 소극적이며 부정적인 인간상이 당시에 만연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P기자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언제나, 어디서나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긍정적이며 희망찬 이야기를 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마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그대로 닮아 가기를 바라는 이스라엘의 열망의 표현이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스라엘 신학의 위기에서였다. 야웨가 시온을 지상의 자기 거처로 영원히 선택하였다는 확신과 다윗에게 결코 종말이 없는 영원한 왕조를 주겠다고 한 야웨의 무조건적인 약속이 위기에 처해진 것이다. 이러한 교의로 보호를 받고 있었던 이 민족의 백성들은 태평스럽게 마음을 놓고 지냈다. 또한 이를 경고했던 선지자들의 설교를 이단으로 배격하면서 자신만만하게 야웨의 권능 있는 개입과 야웨의 의롭고 자비로운 통치를 굳건히 확립하고 모든 왕조의 약속들을 실현하게 될 다윗 가문의 이상적인 자손이 나타날 미래를 기다렸다.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확신 속에서 기다려온 민족사의 진로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멸망을 계기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지위 자체가 의문시되고 말았다.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에는 항상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 있어왔다. 그런데 이방 국가의 침략아래에서 침략국가의 신이 자신들의 신보다 우월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우월하지는 않아도 과연 자신들의 신이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한 회의마저 들었던 것이다. 정말로 신앙의 기초가 흔들리기에 충분한 민족적인 시련이 다가왔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민족적인 시련을 믿음 가운데 극복하고자 하는 그룹이 나타났다. 이들은 전통과 율법에 대한 강조를 통해서 민족의 정체성을 찾으려 했다. 특히 안식일과 할례는 둘 다 오래된 제도였지만 전에 없이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안식일의 엄격한 준수가 충실한 유대인의 증표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는 주변적인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포로로 잡혀 온 유대인들에게는 이미 신앙의 가시적인 상징들이 사라진 상태에서 그것들은 신앙을 고백하는 수단들이었다.
P 자료는 포로기 이후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의 재건과 포로후기 시대의 공동체의 개혁에 대한 프로그램을 간직하고 있다. 이 계획은 과거로 투사되어 그것을 합법화하며, 그것에 권위를 부여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그의 법령을 이미 오래전에 주로 시내산에서 영원한 규약으로 말하였기 때문에, 그 법령들은 현재에도 이의 없이 유효해야 한다. P 자료는 특징적인 언어사용, 계보와 숫자 사용, 제의적이고 제사장적인 관심, 정결성과 성결의 강조, 신인(神人)동형(同形)론들의 회피, 예배장소의 후퇴, 모세이전시대의 제사장 그룹과 제의에 의하여 두드러져 보인다. 역사 이야기와 율법의 밀접한 관계는 두드러진 특징에 속한다.
3) E 기자
E기자의 전통은 실제 독립적인 전통으로 존재하였는지 명백하지 않으며, 실제 존재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완전히 J 전통의 그늘 속에 묻힌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E 기자는 독특한 선포의 의도를 추구하였다. 볼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선포는 어떤 다른 신에게도 충성을 금지시키는 법적인 칙령과 같은 것으로 그는 보고 있다. 엘리야 시대의 종교혼합주의의 위기에서 강력한 선언을 선포한다. 대체로 학자들은 E자료는 9세기경 북쪽 전승에서 나왔다고 한다.
3. 회상의 신앙공동체
성서의 신앙공동체는 귀중한 회상(回想)을 지닌 민족이었다. 약속과 구원의 회상이 그것이다. 신앙의 선조들을 통하여 그들은 매우 일찍이 약속과 구원의 회상에 정착하였다. 회상은 강력한 믿음을 심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들은 이러한 회상들을 자기의 모든 삶과 신앙의 척도로 생각하였다. 역사적인 숱한 소용돌이와 긴장의 한복판에서 자기 민족의 의미와 운명을 찾아낼 수 있을 것으로 대담하게 믿고 있었다. 구약성서는 이 역사를 형성하고 있는 삶의 소용돌이에 대하여 자기의 귀중한 회상이 영향을 끼치도록 하는 진취적인 노력이요, 때로는 투쟁이었다. 이와 같이 구약성서는 그들이 가장 좋은 것으로 믿었던 정화된 회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성서는 그런 책으로 읽으려고 하는 자들에게는 이것이 신앙의 전통과 역사적인 사실의 충돌을 묘사하여 주었다.
성서는 고립된 상태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성서는 언제나 안과 밖에서 신앙과 삶을 위협하는 자들과의 심각한 대결 속에서 형성되고, 더욱 확장되어 재형성되었다. 신앙의 속성은 본디 개혁적이다. 자기 부정과 갱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삶을 이끄는 힘이다. 흐르는 역사의 현실에서 나타나는 숱한 사건들은 계속하여 그들의 회상을 상대로 새로운 질문들을 제기하였으며, 신앙공동체로부터 새로운 답변을 하도록 강요하였다. 때때로 그들의 현실은 거대한 통찰력과 능력을 지닌 강한 긍정들을 초래하였다. 또 어떤 때에는 문화적인 상황이 과거의 전통을 통렬하게 시험하고, 단순히 방어적이고 편협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모든 본문의 배후에는 어떤 대결의 순간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대결 속에서 신앙의 새로운 긍정과 싱싱한 진술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한 부딪힘이 있을 때마다 신앙의 전통은 재형성되었고, 신앙은 과거에 지녀보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를 띠고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대결의 순간에는 문화적인 상황도 다시 밝혀졌던 것이다. 신앙의 새로운 진술은 모든 역사적인 문제들을 새로운 상황 속으로 옮겨다 놓았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요구를 제시한 것이다. 희망을 지닐 수 있는 자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제공되었다. 그럴 때마다 신앙은 가능성으로 바뀌었고, 신앙의 낡은 형태들이 진의를 잃은 것처럼 보일 때에는 바로 이러한 새로운 신앙의 진술이 새로운 형태의 신앙을 가능하게 하여 주었다.
성서는 과거의 전통에서 자기의 표현을 이끌어 오지만, 그 진술은 언제나 현재를 위한 것이다. 그 메시지는 현재의 역사적인 상황을 변화시켜 놓으며, 신자들로 하여금 그러한 회상의 메시지가 없이는 깨달을 수 없는 어떤 것을 자기들의 주변에서 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다. 다른 무엇과 타협할 수 없는 하나님의 요구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배경위에 성서본문은 최종형태를 띠고 서있는 것이다. 가인과 아벨이야기 역시 신앙공동체의 표현이다. 이 이야기가 이스라엘역사와 관련 없는 이야기의 하나로 넘어가서는 안된다. 이스라엘의 역사 또는 신앙의 역사, 오랜 역사 속에서 어느 선과 연관되어져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4. 선악과와 지혜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이스라엘의 역사 또는 신앙의 오랜 역사 속에서 과연 어느 선과 연관된 문제인가? 하는 실마리를 찾기 위하여 이 이야기와 유사한 구조를 띠고 있는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조명하고자 한다. 아담과 하와이야기 또한 J문서의 이야기이며 이 문서의 기록자는 다윗솔로몬 왕궁서기관들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들이 나타내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관하여도 앞서 조사하여보았다. 이 조사를 통하여 알 수 있었던 것은 모든 본문의 배후에는 어떤 대결의 순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순간 그들은 신앙공동체로부터 새로운 답변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가인과 아벨 이야기도 그러한 맥락 속에서 보려는 것이 본 논문의 눈이다. J기자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과 관련된 이야기 속에서 아룸(!Wr[)이라는 표현을 등장시킴으로 솔로몬왕의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인간의 지혜의 위험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임을 아룸의 용례연구를 통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
1) 아룸(!Wr[)의 용례
J의 기자는 뱀의 성격을 묘사하기 위해서 지혜문학의 용어인 (!Wr[)아룸을 사용했다.
아룸의 사용 용례를 잠언에서 살펴보면,
어수룩한 사람을 슬기롭게 하여 주며, 젊은이들에게 지식과 분별력을 갖게 하여 주는 것이니, (잠1:4절)
어수룩한 사람들아, 너희는 명철을 배워라. 미련한 사람들아, 너희는 (마음에) 지혜를 배워라. (잠 8:5절)
미련한 사람은 쉽게 화를 내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모욕을 참는다. (잠 12:16절)
슬기로운 사람은 지식을 감추어 두어도, 미련한 사람의 마음은 어리석음을 전파한다.(잠 12:23절)
영리한 사람은 잘 알고 행동하지만, 미련한 사람은 어리석음만을 드러낸다. (잠13:16)
슬기로운 사람의 지혜는 자기가 가는 길을 깨닫게 하지만, 미련한 사람의 어리석음은 자기를 속인다. (잠 14:8절)
어수룩한 사람은 모든 말을 다 믿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행동을 삼간다. (잠 14:15절)
어수룩한 사람은 어수룩함을 유산으로 삼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지식을 면류관으로 삼는다. (잠 14:18절)
슬기로운 사람은 재앙을 보면 숨고 피하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고집을 부리고 나아가다가 화를 입는다. (잠 22:3; 27:12절)
(!Wr[)아룸은 ‘재치 있게 행동하는 자’, ‘주의 깊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자’, ‘그 지식을 겸손하게 숨길 줄 아는 자‘ 이며 수모를 참을 줄 아는 자로,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여 행동하는 자’로 나타난다. 지혜문학에서 아룸은 현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행이다. 그런데 창 3:1에서는 무슨 이유로 유혹자며 교활하고 간계를 꾸미는 뜻으로 사용하였는가?
창2~3장은 솔로몬 시대의 이야기로 본다. 솔로몬은 외국 여자의 간청에 못 이겨 올리브 산에 이교도들의 성소와 우상숭배를 허락하였다.
왕상 11:1
솔로몬 왕은 외국 여자들을 좋아하였다. 이집트의 바로 딸 말고도, 모압 사람과 암몬 사람과 에돔 사람과 시돈 사람과 헷 사람에게서, 많은 외국 여자를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더욱이 솔로몬은 이집트의 파라오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그의 궁전에는 에돔, 모압, 가나안의 외국 여자들이 득실거렸다. 이들이 이스라엘에 우상숭배를 도입하였다. 뱀은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신적 권능을 상징하였으며 가나안에서는 질그릇이나 도장(印章)위에 새겨진 것을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생명과 치유를 주는 신으로 간주되었다. 뱀은 地神지신으로서 생명과 多産性다산성을 상징하는 보호신이었다. 이러한 배경아래서 창 2:24를 볼 수 있으며, 뱀과 악마를 동일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J는 창 3:1에서 뱀을 교활하고 음모를 꾸미는 자로 탈바꿈시키게 된 것은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인접 국가들에서 문물제도의 수입과 함께 들어온 솔로몬의 지혜가 이스라엘 종교의 순수성을 오염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지혜의 동의어인 아룸(!Wr[)을 간계를 꾸미는 뱀으로 그 뜻을 바꿈으로써(창 3:1절) 우상숭배를 단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솔로몬이 늙으니, 그 아내들이 솔로몬을 꾀어서,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다. 그래서 솔로몬은 자기의 주 하나님께 그의 아버지 다윗만큼은 완전하지 못하였다. (왕상 11:4)
여기에서 간단하게 이스라엘왕국의 형성과 멸망에 관하여 살펴봄으로써 본 논문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사울은 초라하고 검소한 왕국을 세웠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가나안의 최강국으로 만들기 위해 일생을 대부분 전쟁터에서 보냈다. 수많은 허물에도(삼하 16:7~8 시므이의 고발, 우리아의 아내, 아비가엘의 남편?) 불구하고 하나님의 섭리하심으로 굳건하게 세워진 다윗왕국이 솔로몬의 오만방자한 세속 통치를 거치면서 왕실의 과다 지출은 백성들의 짐 이였으며, 북쪽 여려 지파의 강제 노역 동원 등 분열과 분노의 불씨가 자라나게 되며 제국의 분열의 원인이 된다.(왕상 12:16 르호보암의 어리석은 발언이 결정적으로 분열의 빌미를 주지만 그것은 이미 골마 있었던 고름이 터진 것에 불과하다.) 그에게는 충고하는 예언자도 없었다. 비록 애굽탈출 480년만에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치행태와 제국의 분열에 대하여 열왕기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훼께서 솔로몬에게 노하였다.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를 마음으로부터 저버렸기 때문이다. …너의 마음이 이러하고 내가 너와 계약을 맺으면서 일러 둔 법들을 지키지 않았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너에게 쪼개어 너의 신하에게 주리라.”(왕상 11:8~11) 그는 시나이 계약을 변질시켰으며 야훼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 유일신종교를 혼합종교로 변질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솔로몬사망(926/922) 후 나라는 남유다(르호보암)와 북이스라엘(여로보암;아히야)로 갈라지고 722년 북쪽 이스라엘 10부족은 앗수르에게 망하고 사마리아만 이교화된 성읍이 되어 살아남게 되며 그 이름이 예수의 때까지 계속된다.
2) 지혜문학
지혜문학을 살펴보면서 본문을 논하고자 한다.
먼저 구약이라는 이름은 구약성서 내에서 유래되었다. ‘새 계약이 옛 계약을 해체하였다.’ 고 한다. 구약성서의 지혜(호크마 hm;k]j;)문학은 율법서와 예언서 다음의 성문서에 실려 있는 교훈집으로, 히브리 구약성서의 제3부에 해당하는 케투빔안에 있다. Kethubim은 시가서(〈시편〉·〈잠언〉·〈욥기〉), 메길로트 또는 두루마리들(〈아가〉·〈룻기〉·〈애가〉·〈전도서〉·〈에스델〉), 예언서(〈다니엘〉), 역사서(〈에즈라〉·〈느헤미야〉·〈역대기 상〉·〈역대기 하〉)의 4부분으로 나뉜다. 케투빔은 예배의식에 쓰이는 시, 남녀의 사랑을 노래한 시, 지혜문학, 역사, 묵시문학, 짧은 이야기, 낭만적인 이야기 등 여러 가지 글들을 모은 것이다. 이 글들은 BC 6세기 초 바빌론 유수 전부터 BC 2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AD 2세기에 케투빔 전체가 정경으로 인정되었다. 토라(율법서)와 느비임(예언서) 전체가 정경으로 인정된 것과는 달리 케투빔은 각각의 책마다 대중성을 근거로 정경을 정했다.
지혜문학의 연구는 보통 잠언에서부터 시작한다. 구약에서의 지혜란 인간적인 경험에서 오는 지혜가 아니라 야웨에 대한 신앙과 복종을 중심으로 하는 사고를 지혜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욥 28:28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
3) 지혜문학의 형성과 토착화
지혜문학의 성성과정을 살펴보자
이스라엘은 사사시대와 사울시대를 거치면서 다윗 솔로몬 왕조시대로 이어진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수도로 정하기 전까지의 이스라엘은 주로 영토의 확장과 외적의 침입을 방지하는데 주력한다. 이때의 문학은 史詩的 사시적인 것이 대부분이다가 다윗이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면서 동화 정책, 문호개방정책을 펼친다. 그의 정책은 동맹자들을 추방하고 전멸시키고 이방 사제들을 학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용병으로서 근위대를 조직하고, 각 지방의 고유한 종교예배를 허용하고 이집트인 율사들을 등용한다. 또한 정략 결혼을 통하여 국방을 튼튼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략결혼은 유상숭배의 가능성을 초래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솔로몬시대에는 부왕의 동화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신흥왕국은 군주체제를 갖추기 위해서 당시 열강들과 빈번한 외교관계를 맺게 되고 재빨리 열강들의 문화를 흡수, 동화하기 시작했다. 당시 열강들의 문화란 단순히 정치적 지혜가 담긴 격언이나 건축기술만 말하는 게 아니고 문자표기법, 인구조사를 위한 산술 법, 효율적인 세제의 제정, 지명과 사물표기법 등도 포함한다. 솔로몬은 이같이 당시 열강들의 행정체제를 기반으로 하여 이스라엘의 국가행정을 수립하였다. 이 같은 새로운 행정체제가 새로운 공무원 및 관리들의 계층을 탄생케 하였음은 자연적 현상이다. 그 새로운 관리들이 이스라엘의 당시 지성인 계층을 형성하였는데 이들이 곧 율사, 판관, 대사들 같은 군신들로 구성된 이른바 지혜 자들이었다. 그러나 정통파 지도자들은 왕정의 이 같은 동화정책에서 오는 부작용을 참을 수 없어 종교적 반란을 일으켜 불만을 표시한다.
지혜문학은 군주제도 이전부터 이스라엘의 종교사상 안에 들어오기 시작하여 솔로몬시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솔로몬시대의 군주제도와 지혜문학의 밀접한 관계와 야웨스트(J)의 토착화 작업으로 진행되었으며, 이에 대하여는 까젤과 폰 라드의 연구에서 논증되었다. 이집트의 지혜문학은 왕족이나 궁중 고관자재를 위한 지침서로 활용하기 위한 반면, 이스라엘에서는 서민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초기 지혜문학은 이스라엘의 사상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종교적 전통과 충돌이 발생하면서 지혜 자들과 예언자들의 갈등이 증폭되는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겸손함(잠언11:2), 신중함(잠언 8:12), 이해심(잠언 17:24), 의로움(잠언 10:31)등으로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이나 계약법등 종교적인 요소가 아닌 인간의 경험과 현실에 대처하는 이성의 역할을 다루는 세속적이며 비종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 때문으로 본다. 그러나 모든 문화현상은 어떤 폐쇄된 지역에서 기원하고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세계와의 교류를 통해 부단히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하고 새로운 것이 창조된다.
지혜 자들과 예언자들의 갈등, 지혜문학과 예언서, 율법서의 마찰 등이 토착화 과정을 거치면서 제 해석되고 종교적인 성격으로 변화되어가면서 정착하게 된다. 다시 반복하면 왕정시대초기에는 지혜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인정은 했지만 특별히 지혜의 근원 되는 하나님을 성찰하는 데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초기 이스라엘의 지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탐구하기 보다는 세상사와 인생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접근한다. 그러다가 바빌론에서 석방되어 돌아온 지식인들은 새로운 사회질서에서 유대인들의 삶을 규정하는 문학형태를 형성하게 되다가 신학적인 지혜로 바뀌게 되었으며 기원전 3세기와 2세기의 전환기인 예수 시락에 와서 지혜와 토라가 동일시되었다. 포로이후 지혜문학이 토착화된 가장 중대한 이유를 인격적 종교의 출현과 인격적 종교의 발전으로 본다. 개인적 종교 인격적 종교의 시발점은 예레미야의 선포로 부터이다. 그러나 당시 예레미야가 그렇게도 지혜 자를 맹렬히 공격하던 그의 외침이 그 이후에 이율배반적으로 지혜 자들의 가르침을 재해석할 수 있는 사상의 발판으로 전환 된다. 종교는 이제 집단적 권위를 초월하여 마음의 동의 (지혜 자들은 언제나 그들의 가르침에서 마음의 교육을 중대하게 취급했다.) 즉 인격적 동의를 추구하게 되었다.
이제 지혜는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음성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지혜는 만민의 교사요 하나님의 창조의 과업에 동참하는 인격적인 존재인 것으로 해석한다. 인간의 삶의 영역을 실재로 생각하게 되었다.
지혜란 인생을 성공으로 이끄는 ‘실천적 기술’이라고 한 마디로 말할 수 있다. 잠언의 중심주제는 인생의 방향이다. 고통, 비애, 부도덕한 행위, 의인의 고통과 악인의 성공 같은 종교의 중대한 문제는 집단을 떠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문제로 변한다. 유다이즘은 유배 후 예레미야의 권유 하에 현자들의 가르침을 자기네 전통문학 안에 동화 시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을 정화해 나갔던 것이다. 전통 안에서 동화되어 의식의 지평이 확대되는 것이다. 토착화할 뿐 아니라, 정경으로 받아들이면서 이제 지혜는 인격화되어 하나님의 지혜로써 그리스도의 육화를 준비한다.
잠 8:22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던 그 태초에, 주께서 모든 것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주께서는 나를 데리고 계셨다.
잠 8:23
영원 전, 아득한 그 옛날, 땅도 생기기 전에, 나는 이미 세움을 받았다.
잠 8:24
아직 깊은 바다가 생기기도 전에, 물이 가득한 샘이 생기기도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
잠 8:25
아직 산의 기초가 생기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
잠 8:26
주께서 아직 땅도 들도 만들지 않으시고, 세상의 첫 흙덩이도 만들지 않으신 때이다.
잠 8:27
주께서 하늘을 제자리에 두시며, 깊은 바다 둘레에 경계선을 그으실 때에도, 내가 거기에 있었다.
잠 8:28
주께서 구름 떠도는 궁창을 저 위 높이 달아매시고, 깊은 샘물을 솟구치게 하셨을 때에,
잠 8:29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고, 물이 그분의 명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고, 땅의 기초를 세우셨을 때에,
잠 8:30
나는 그 분 곁에서 창조의 명공이 되어, 날마다 그분을 즐겁게 하여 드리고, 나 또한 그분 앞에서 늘 기뻐하였다.
잠 8:31
그분이 지으신 땅을 즐거워하며, 그분이 지으신 사람들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
잠 8:32
그러므로 아들들아, 이제 내 말을 들어라. 내 길을 따르는 사람이 복이 있다.
잠 8:33
내 훈계를 들어서 지혜를 얻고, 그것을 무시하지 마라.
잠 8:34
날마다 나의 문을 지켜보며, 내 문설주 곁에 지키고 서서, 내 말을 듣는 사람은 복이 있다.
잠 8:35
나를 얻는 사람은 생명을 얻고, 주께로부터 은총을 받을 것이다.
잠 8:36
그러나 나를 놓치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해치는 사람이며,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죽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잠 9:1
지혜가 일곱 기둥을 깎아 세워서 제 집을 짓고,
잠 9:2
짐승을 잡고, 포도주를 잘 만들어서, 잔칫상을 차린 다음에,
잠 9:3
시녀들을 보내어, 성읍 높은 곳에서 외치게 하였다.
잠 9:4
"어수룩한 사람은 누구나 이리로 발길을 돌려라." 지각이 모자라는 사람도 초청하라고 하였다.
잠 9:5
"와서 내가 차린 음식을 먹고, 내가 잘 빚은 포도주를 마셔라.
잠 9:6
어수룩한 길을 내버리고, 생명을 얻어라. 명철의 길을 따라가거라." 하였다.
렘 23:5
내가 다윗에게서 의로운 가지가 하나 돋아나게 할 그 날이 오고 있다. 나주의 말이다. 그는 왕이 되어 슬기롭게 통치하면서,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다.
렘 23:6
그 때가 오면 유다가 구원을 받을 것이며, 이스라엘이 안전한 거처가 될 것이다. 사람들이 그 이름을 우리를 공의로 다스리시는 주라고 부를 것이다.
선악과와 지혜라는 주제로 살펴보았다. J기자는 창조 이야기를 통하여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가 바로 낙원을 상실한 사회임을 역설하고 있다. 특히 창2장/J문서의 솔론몬왕궁의 서기관들은 다윗과 솔로몬 같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군주들이 이룩해 놓은 정치적 안정기이며, 경제적 번영기라더라도 체제 중심부에 있는 일부 상층계급에 집중된 부와 사치의 만연, 권력의 남용, 왕권유지를 위한 정략적 결혼으로 인한 이방신 허용은 궁궐 안에서 공공연하게 행해지는 우상숭배와 이교 신녀들과의 성적인 타락은 국가의 장래를 위협하는 행위였다. 그것은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의 말씀위에 있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본 것이다.
5. 아담과 하와-가인과 아벨이야기의 연관성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이야기의 연관성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연구과제로 남기고 본 논문에서는 추론으로 매듭짓고자 한다. 앞장에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지혜와 관련된 솔로몬시대의 J문서임을 조사하여 보았으며, 가인과 아벨이야기 또한 J문서의 이야기임을 살펴보았다. 하나님의 이름에서는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에 그 하나님을 믿는 백성 또한 거룩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J기자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이야기를 지혜의 동의어인 아룸(!Wr[)을 간계를 꾸미는 뱀으로 그 뜻을 바꿈으로써 우상숭배를 단죄하며, 솔로몬의 어리석은 정치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연구 조사를 통하여 성서의 하나님의 이름은 다양하지만 결국은 한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은 ‘거룩함’의 특징을 지니신 분이라는 것도 살펴보았다. 그 백성이라면 또한 거룩한 삶이 되어야 한다는 일관된 입장을 보여주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제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 대한 조명을 하기로 한다. 가인과 아벨이야기와 아담과 하와이야기는 구조와 형태가 유사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가인과 아벨이야기에서 가인과 아벨은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신앙의 역사에서 누구를 상징한단 말인가? 라는 물음을 낳는다. 왜 성서기자는 최종형태의 성서본문인 아담과 하와이야기 후에 가인과 아벨이야기를 아담과 하와이야기와 동일한 형태로 본문을 구성하였는가? 이러한 이야기를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물음에 접근하고자 그들의 표현 방법을 찾아 본 것이다. 그 표현 방법 중의 하나가 선악과의 문제에서이다. 성서기자의 눈은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뱀의 유혹으로 따먹는 죄를 범하였기 때문으로 바라보면서 이야기체로 쓰고 있다. 선악과의 타락이야기의 전개과정에서 아담과 하와 이야기의 구성은 가인과 아벨이야기의 구성과 유사하다는 것을 본문연구를 통해 확인할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성서기자의 의도가 있다는 것으로 생각되어진다고 본 연구자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결론은 선악과 이야기의 주인공과 가인과 아벨이야기의 주인공이 실제 상에서는 같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는다. 이미 선악과의 이야기는 솔로몬의 지혜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가인과 아벨이야기도 같은 선상에 놓고 볼 수 있다 는 것이다. J기자, 곧 다윗솔로몬 왕궁 서기관이었던 그들의 눈에 비친 솔로몬은 어떤 사람인가를 선행연구조사를 통하여 확이 하였다.
성서 역사상 가장 많은 제물을 바친 사람은 누구일까 ane는다면 단연 솔로몬이다. 누구도 솔로몬보다 많은 제물을 바치지는 못하였다는 것을 성서 기자는 말하고 있다. 문제는 그 많은 제물예배에 대하여 과연 하나님은 받으신 것인가? 라는 의문을 성서기자는 제시한 것이 아닐까 만약 야웨께서 그 제물을 받으셨다면 선왕다윗의 피로 세워진 나라가 망할 수 있을까 라는 물음이 있었을 것임을 성서기자의 눈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가인과 아벨이야기를 구사하는 성서기자의 의도는 가인과 그 제물을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통하여 솔로몬과 그 제물을 하나님이 열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비유하지 않았을까! 이다. 솔로몬의 그 많은 제물예배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의 실정정치는 “세월이 흐른 뒤” 왕국은 분열과 분단을 초래 했다. 그는 결국 다윗왕국인 아벨을 살인한 것이다. 라고 추론되어진다.
가인과 아벨이야기 역시 성서의 한 부분이다. 이 이야기도 흐르는 역사의 현실에서 나타나는 숱한 사건들 중 하나일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사건에 새로운 질문이 제기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답변을 요청하면서 귀중한 역사적 신앙의 교훈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조사연구를 바탕으로 가인과 아벨이야기는 솔로몬왕과 관련이 있다는 사고를 유추하게 하였고 가인과 그 제물을 받지 않은 것을 솔로몬과 그 제물을 받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으며 그 결과 아벨의 죽음은 곧 다윗왕국의 분열과 분단이라는 뼈아픈 기역의 이야기를 성서는 담고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6. 신약성서에 본문에 나타난 가인과 아벨
[히 11:4]
(4)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요일 3:12]
(12)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유 1:11]
(11)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마 23:35]
(35)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 가리라.
[눅 11:49-51]
(49)이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저희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 더러는 죽이며 또 핍박하리라 하였으니 (50)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51)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히 11:4절에 대하여 톰슨주석 성경해설은 아벨은 가인과는 달리 정결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믿음의 예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칭찬을 듣게 되었다. 고 해석하면서 ① 참된 예배는 우리의 몸과 함께 헌신된 마음도 요구하며 ②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는 이신득의로 설명하고 있다.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심은 “믿음”으로 드렸기 때문으로 제사의 마음가짐을 말하고 있다.
요일 3:12절에 대하여 톰슨주석은 ‘가인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대표적 모델이다. 세상의 특징은 살인이다.’로 세상의 대표적 모델이며, 세상이 마귀의 자녀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웃의 의로운 행위를 본받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시기하여 그 이웃을 제거하려 한다.고 해설하고 있다. 유다서 1:11절에 대하여는, 불경건한 자들을 실례로 들어 거짓 교사들의 말로(末路)로 가인은 믿음과 정성 없는 제사, 불경건한 삶으로 설명하고 있다.
마 23:35절에서는 아벨을 의인으로 부르고 있다. 의인이 흘린 피는 의로운 피라고 말하고 있다. 이 본문은 눅 11:37-54절과 주요내용이 일치하고 있지만 말씀하시는 상황은 다르다. 본 논문에서는 아벨에 관한 사항을 주시하면서 살펴보는 것으로 보다 자세한 것은 누가본문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눅 11:51절에서는 아벨을 선지자로 부르고 있다.
이 본문(눅 11:37-54절) 내용의 해설을 주석서를 통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예수의 공격은 여섯 개의 저주 말씀으로 되어 있는데 세 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향한 것이고 다른 세 개는 율법 교사들을 향한 것이다. 예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종교적 행위나 실천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탄식한다. 그는 내면적인 욕심이나 자만심은 무시한 채 외형적인 정결만 관심하는 종교를 공격한다. 내적인 문제를 해결하면 외형적인 문제는 자연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밝힌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질 구례한 종교적 규범들에만 관심한 나머지 우선되어야 할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은 등한시하였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로서의 자만심과 긍지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그들의 내면적인 죄가 되었고 그 결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런 그들의 내면적 죄악을 알지 못하는 민중들을 잘못 이끌고 있었다. 이러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공격은 그들과 같은 부류에 속한 율법 교사들에게도 해당되었다. 그들이 해석하는 율법 학자들도 예언자들이나 그 메시지를 거부했다. 그들은 예언자들을 죽임으로써 그 예언을 성취시켰고 그런 대가는 이 시대에도 지불될 것이라는 것이다. 끝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는 열쇠를 아주 효과적으로 제거해 버림으로써 그들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벨은 최초의 순교자로 언급된다. 그를 “예언자”에 포함시키는 사실은 그 뜻이 아주 포괄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시사한다.
이 이야기의 발단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를 초대하였는데 음식을 잡수시기 전에 손을 씻지 않으신 것을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상히 여기는 것을 보고 하시는 말씀이다. “너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너의 속에는 탐욕과 악독의 가득하다. 어리석은 사람들아, 겉을 만드신 분이 속도 만드시지 않았느냐” (11:39-40절) 이어지는 말씀의 내용은 물질은 드리면서 정작 중요한 정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소홀히 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정의는 이웃에 대한 정의임이 분명하다. 그들의 말 한마디에 의해서 힘없고 나약한 사람들이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고 있는 실정을 대변하시는 말씀으로 해석된다. 이웃에 대한 정의와 하나님에 대한 마음으로 부터의 사랑에 대한 질책이다. 이러한 본문의 말씀이 가인과의 관계에서 가인에 의해 죄 없이 죽은 아벨의 설명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여기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가인은 물질은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이웃(아벨)에 대한 정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소홀히 여기는 자로 설명되어짐을 알 수 있다. 이 정의에 대하여 좀 더 살펴보면 정의라는 단어( krivsi") judgment는 희브리어( fP;v]mi)로 공정하고 정직함을 표현하는 단어로 바리사이파를 겨냥하고 있다. “화가 있으리라. 너희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가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장거리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하는 구나! 화가 있으리라.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 그것이 무덤인지 알지 못하는 구나! (눅 11:43-44절) 이러한 그들의 행위 즉 외식하는 행위는, 이러한 행위를 지금까지 저질러온 조상들의 행위를 찬동한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 행위는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죽이고 박해한 것이며 너희들(이 세대)이 책임져야 한다. 고 말한다. 그것은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은 즈가리야의 피에 이르기까지이다. 아벨의 피는 창세 때부터 흘린 모든 예언자들의 피에 속한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본문에서 아벨은 믿음의 사람, 의인, 예언자로 부르고, 가인은 믿음과 정성이 없는 악한자요 살인자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의인과 악한자란 사람됨의 표현이다. 결론적으로 가인과 아벨의 행위의 결과에서 가인은 악한자의 모습을 드러냈고, 아벨은 의인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성서에서 의인의 모습은 믿음의 사람이요 행위가 완전한 사람이며 하나님의 의의 모습을 지닌 사람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그들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에 따른 선택임을 알 수 있다.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은 그의 믿음과 의로움 때문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가인은 악한자이기 때문으로 설명하고 있다.
7. 가인과 아벨이야기의 선행연구조사
1) Von Rad의 연구
Von Rad의 연구는 이 구절에 대하여 “이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피의 제물이 여호와께서 더욱 기뻐하시는 일이였다는 것이다.” Von Rad는 하나님의 선택의 기준이 제물, 곧 피의 제물에 있다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Walter brueggemann의 연구
Walter brueggemann은 제왕적인 권력을 탐내는 상황을 밑바닥에 깔고 있는 것으로 보면서 그 안에서의 공동체의 유해성과 살인자의 운명, 곧 하나님과의 일그러진 관계에서 비롯된 운명을 설명한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의 제사 이야기인 3-5절의 주석에서 ‘종잡을 수 없는 야웨의 자유’로 설명하고 있다. 가인이 배척당한 것은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이 이야기의 필수적인 전제이기 때문으로 설명한다. 삶은 불공정한 것이다. 하나님만이 자유로우시다. 우리사이에 살인적인 충동이 생겨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것은 하나님의 자유이며, 그렇기 때문에 야웨 자신이 가인의 분노와 우울의 원인이었다.고 주석하고 있다. 이러한 주석은 자칫 가인의 살인의 원인이 결국 하나님께 있다는 오해를 불러 올수 있는 것으로 우려된다.
3) Claus Westermann의 연구
Claus Westermann은 지금까지의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고 보고 있다. 첫째는, 가인과 아벨을 태고의 개인(individual-primeval)으로 보는 견해인데, 인류 최초의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로서 경쟁관계에 있는 두 형제가 각각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서 등장하는 이야기로 보는 것이다. 둘째는, 그 두 사람이 특정한 부족을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로 보는 집합적 해석방법이 그것이다. 해석사를 통해 일관성 있게 제기되는 질문중의 하나가 바로 “왜 아벨의 제물만을 호의적으로 보셨는가?” 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열납하지 않으신 것에 관해 Westermann은 하나님은 한 사람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다른 한 사람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는 가인의 불순한 의도나 제물의 종류 또는 제사 드리는 방식의 오류 등에 있지 않았다. 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한 사람이 자신의 일에 성공을 거둔 반면에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하나님의 인정이나 거부를 경험하는 일은 복을 받거나 받지 못하는 일, 또는 성공이나 실패 등과 같은 차원에 속한다. 설화자는 가인이 자신의 노동이 복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가 복을 받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할 길이 없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이 설화는 두 사람이 똑같이 시작하고 똑같은 노력을 기울여도 어떤 이는 성공하지만 다른 이는 그렇지 못한다는 옛 경험을 다루고 있다. 고 말한다. 그의 또 다른 책에서는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카인의 것은 받지 않았다. 왜 하나님은 받지 않았을까? 라는 물음은 대답되지 않은 채 남아 있고 또 그렇게 남아 있어야 한다. 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카인보다 아벨에게 더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또 하나님은 아벨에게만 호의를 가지고 카인에게는 갖지 않고 있다는 것을 카인은 승인 했어야 했다. 그에게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호의였다. 이러한 Westermann의 이야기는 카인은 이유도 모른 체 무조건 하나님의 선택을 승인해야만 하는 것인가라는 물음을 남긴다. 그는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 더 이상 진행하지 말고 그렇게 남아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4) Speiser의 연구
Speiser는 가인과 아벨의 본문은 유목생활과 농경생활 사이의 갈등을 가인과 아벨 개인들의 이야기로 묘사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의 초점을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물에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가인이 바친 “땅의 소산”과 아벨이 바친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생활을 하는 집단의 상징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Von Rad, Walter brueggemann, Claus Westermann, Speiser 등 선행 연구 조사를 통해 오랜 기간에 걸처 이 본문에 관한 연구에 있어서 해석의 방향은 가인과 아벨의 재물 상태에 따른 하나님의 관심과 하나님의 선택의 자유, 유목생활과 농경생활 사이의 갈등 피의 제물 등에 관심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Ⅲ. 본 론
1. 본문의 내용 연구
창 4:1-8절
(1)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5)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1절』 그리고 아담이(!d;a;h;w_); 관사(h) 붙어 있어 에덴서 추방당한 아담을 지칭함을 알 수 있다. 동침하매; ([d'y) 이 동사는 관념적인 지식이 아니라 관계와 교제를 경험한 후 사용하는 동사로 전인 관계,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 알았다는 뜻이다. 경험과 만남, 여기에서는 포괄적인 것으로 성적 관계를 말한다. 이 단어는 창 3장 5, 7, 22절과 그 이후본문에 나타는 것으로 뱀의 유혹으로부터 선악과를 먹은 후부터 나타난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로 해석된 원문
hw:hy_Ata, vyai ytiynIq; rm,aTow"을 직역하면(M.T사본) ‘내가 소유했다.
사람(남자) 야훼를’이다. 내가 득…하였다. 하나님이 주신 아들(벤)이란 말 대신 내가 낳았다. (dl'y::야라드)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다시 의역하면, ‘나도 내 힘으로 사람 하나를 만들어 냈다(소유했다)이다. 카나( hn:q;) 는 ‘얻다, 만들다, 소유하다’의 뜻에서 카인( @yIq')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카인은 ‘세우다, 사람을 짓다’라는 뜻과 ‘창’(찌르는 창), ‘작살’이라는 의미도 있다. 사람을 찌르는 존재란 뜻이다.
『2절』아벨은( lb,h:헤벨) “안개”, “허무”, “숨” 란 뜻이다. 이러한 이름의 표현들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후 인간의 변화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2절 첫 단어 “그가 또(#s,Tow")” 는 1절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를 반복적으로 표현한 접속사· 와우·3인칭 계속적 용법이다. 여기에서는 그의 아내 하와를 반복적으로 표현한다. 범죄 후 인간의 변화된 모습에서도 특히 하와의 표현을 나타냄으로써 하와를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절』세월이 지난 후에 ( !ymiy: $Qemi yhiy_w"ii); 많은 날들이 간 후에, 2절과 3절은 많은 세월의 기간이 내포되어 있다. 이 세월기간을 본문은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가인과 아벨은 이 기간 동안에 성장하면서 성격도 형성되었을 것이다. 어떻게 변했느냐가 관건이다. 오랜 세월을 지내오면서 형성된 가인과 아벨 그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으며 어떻게 변했는가? 에 대해 성서는 침묵하고 있지만 이후의 본문이 그것을 짐작케 한다. 드디어 오랜 세월 그들의 삶의 결실이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다.
아벨이나 카인이 드린 예물은 hj;n_mi라고 해서 대체로 피 흘리지 않은 제물 또는 예물을 의미한다. 가인과 아벨의 시대에는 아직 제단이 없었고 희생 제사나 번제를 드리기 훨씬 이전의 사건이다. 그래서 “미느하흐(hj;n_mi)”라고 했으며 공물, 예물, 제물로 보았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hm;d;a}h; yrIP]mi)”는 단수 명사로 단순한 소출을 의미한다.
『4절』 ( bl,j,)의 복수형(@h,bel]j,meW)으로 표현된 살찐, 기름진이란 뜻이다.
열랍하셨다는 동사는 ( h[;v;;)‘응시하다', (본래 의미는 도움을 청하려고) '둘러보다'; 함축적으로, '조사하다', '생각하다', '인정 베풀다', '어찌할 바를 모르다'(놀라서 둘러보며), 또는 '당황하다':- 떠나다, 흐려지다, 간담이 서늘해지다, 보다(멀리), 간주하다, 존경하다, 아끼다. 1)보다, 자세히 보다, 응시하다, 둘러보다, 놀라서 보다의 뜻이다.
승인하고 바라보다, 좋아하고 인정하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을 인정하시고 가인을 인정하지 않으셨다. 동사 솨아( h[;v;;)‘응시하다'는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의 전 과정을 응시한 것으로 풀이된다. 세월이 흐르기 전부터 세월이 흐른 후 제물을 드리는 지금까지의 전체 과정이다.
『7절』; 의문문 “그렇지 아니하냐?” (a/lh})로 시작한다. 직역하면 “죄가 너를 향해서 갈망하고 있다. 그래서 너 그것(그 죄)을 지배하지 않으면 안된다.”(/BAlv;m]Ti hT;a'w_) 5절에서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였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인정하고 바라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6-7절에서 이것을 지적하고 있다. 가인에게 충고하신 것이다. 본성 깊은 곳에서 끌어 오르는 죄의 위험을 하나님은 너무 늦기 전에 차단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를 버리신 것인가? 6-7절의 표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돌이키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 결과물인 제물을 드림은 한순간에 이루어진 추수나 제물만을 말하지 않는다. 세월이 지난후의 그들에게 형성되어 있는 마음의 결실의 표현(형성된 인격)을 함께 받으신 것이다. 이러한 해석의 근거는 이미 선행조사를 통하여 연구한 내용에서 확인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분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아벨의 예배를 받으신 것뿐이다. 그렇다고 가인을 벌주거나 버리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로우시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신분이시다. 그분은 당신 편애서 편애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23-24절)
7절에서 가인에게 다가가 오히려 그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임과 자신을 돌이켜 성장시켜야 할 못은 가인, 너의 몫이다. 라는 것이다.
『8절』가인이 아우 아벨에게 말하였다. "우리 들로 나가자"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표준 새번역) ‘우리 들로 나가자’는 히브리어 본문에는 없다. 그리이스 역본 70인 역과 공동번역 등에 나와 있다. 히브리원전에는‘들에 있을 때’이다.( hd,C;B' !t;/yh]Bi 비헤요탐 바사데) 한적한 들에 있을 때 끔찍한 사선이 전개된다. 들판으로 나가자는 것은 “누구도 모르는 처소”로 볼 수 있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 가인은 돌연 일어나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였다. 일반적으로 죽일 때는 동사 「카탈」을 쓴다. 그러나 여기서는「할라그」( gr'h;)를 사용하여 잔인하게 학살했다 그의 행위의 잔악성을 표현하고 있다. 인권을 짓밟고 인명을 해치는 자는 하나님의 권리를 침해하는 자이다. 인간은 누구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죽일 권리가 없다. 사회질서와 인명의 귀중성은 종교질서에서 가장 튼튼히 보장 되어야 한다. 그러나 본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속되고 있는 그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을 예고하였는데도 말이다. 죄의 다스림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숙시키고 단련시킨 인격에서 나온다. 가인은 오랜 세월을 살면서 그 훈련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을 다스리지 못한 자의 행동이 잔악함으로 나타났다.
2. 본문의 구조(structure analysis) 배열방식
가인과 아벨이야기는 창3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이야기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두 이야기의 내용을 정리하면
아담과 하와 이야기 |
가인과 아벨이야기 |
선악과에 대한 경고 (2:17절) |
죄에 대한 경고 (4:6-7절) |
아담과 하와의 범죄 |
가인의 범죄 |
하나님의 심판 |
하나님의 심판 |
땅에 대한 이야기(저주) |
땅에 대한 이야기(저주) |
하나님의 보호 (가죽옷을 만들어 줌) |
하나님의 보호 (표를 찍어 줌) |
하나님 앞을 떠남 |
하나님 앞을 떠남 |
아내의 임신과 출산 |
아내의 임신과 출산 |
양쪽이야기의 내용은, 범죄에 대한 경고, 범죄, 심판, 땅에 대한 이야기(저주), 하나님의 보호, 하나님 앞을 떠남, 아내의 임신과 출산 등의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3장에서는 남자와 여자관계가 중심을 이루고, 4장에서는 형과 동생의 관계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가인과 아벨이야기의 전체 본문인 1-16절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8절과 9-16절이다 1-8절은 가인과 아벨이 함께 등장하는 본문이며, 9-16절은 가인혼자서 등장하는 가인과 하나님과의 이야기이다. 아벨이 죽은 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는 가인과 아벨이 함께 등장하는 1-8절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아담과 하와의 관계가 아닌 그 아들들 즉, 가인과 아벨과 하나님과의 이야기이다. 어떻게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되었는가에 대하여는 본문은 말해주고 있지 않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1-2a는 족보로 시작하고, 2f-16절 가인과 아벨이야기의 내용이 있으며, 다시 17-26은 다시 족보로 이어진다. 이러한 이야기의 구조배열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인류역사에 계속적인 관여와 관계를 지속하고 계신다는 것을 본문이 보여주고 있다.
1-8절까지의 이야기 본문의 구조와 배열을 정리 하면 다음과 같다.
a. 가인의 탄생 1절 (하와의 탄생표현)
b. 아벨의 탄생 2a (탄생표현 없음)
c. 아벨과 가인의 생업 2b
아벨
가인
d. 여호와께 재물드림 3-4a
가인
아벨
e. 여호와의 반응 4b-5a
아벨
가인
f. 가인의 태도 5b
g. 여호와의 말씀 6-7
h. 아벨의 죽음 8
본문 구조 분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배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인→아벨(1절에서2a), 아벨→가인(2b), 가인→아벨(3절에서4a), 아벨→가인(4b절에서 5a), 가인→〔여호와의 말씀(6-7절)〕아벨(5b절에서8절)
이 배열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두형제의 이름이 번갈아 나온다. 그러나 5b절로 8절까지 에서는 가인이 나온 다음 아벨이 나오는 차례에 아벨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벨이 죽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의 반응과 표현을 살펴보면, 가인 탄생에 대한 하와의 표현(1절)→아벨의 탄생표현 없음,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다(2절),→가인의 반응에 대한 하나님의 등장 위 본문의 내용구조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아벨보다는 가인에게 초점이 모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본문의 내용 검토(content analysis)
가인과 아벨이야기는 하나님과 가인, 하나님과 아벨, 그리고 가인과 아벨이라는 세 가지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고 있고 하나님과 가인과의 관계에 대하여 초점이 맞추어 있다는 것을 본문의 구조를 통해 살펴보았다. 또한 하와가 가인을 낳은 후의 표현이 범죄 후 인간의 변화된 모습을 짐작하게 하는 표현임을 살펴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와에게 가인은 기쁨의 열매였다. 하와의 표현은 또한 장자로서 가인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1-2절a)
아벨을 낳은 후에는 가인을 낳을 때처럼 환호성이 없다. 그저 아벨은 가인보다 나중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전달 방식을 통하여 성서기자는 처음부터 가인에게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창 4:2a)
그러나 이어지는 본문의 이야기는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창 4:5-6절)
위의 말씀은 제물이 열납되지 않은 후 가인의 반응과 하나님의 반응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행위(제물 열납)에 대하여 아무 문제가 없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곧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너는 왜 그러니?’라고 해석될 수 있다. 본문 6절은 그 내용을 잘 드러내고 있다. “어찌하여 네가 화를 내느냐? 얼굴빛이 달라지는 까닭이 무엇이냐?” 가인은 왜 화를 내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와 재물이 열납되지 않아서이다. 가인의 화는 가인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화이다. 화의 원인은 가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화풀이가 동생을 향하고 있다. 동생인 아벨에 대한 가인의 창끝에 대하여 하나님의 관여는 당연한 것이다. 7절은 화를 내는 것과 화풀이 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선하지 않다)고 하나님은 지적하신다. 그러나 가인은 살인자가 되었다. 그것도 동생을 잔인하게 죽인 형제살인자가 된 것이다. 살인은 결코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물론 살인은 순간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순간적이기는 하지만 살인은 아무나 할 수 없다. 타인(他人)의 생명을 내 감정에 의해 죽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인은 어떻게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그 배경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이 이야기에서 가인의 엄마 하와는 에덴에서 추방당한 사람이다.(창 3:23-24절) 더구나 “이 여자 때문에”(창 3:12절)라는 남편으로 부터의 원망과 크나큰 충격과 고통을 경험했다. 그 하와가 아들 가인을 낳은 후의 탄성은 그의 짓눌리고 한 많은 마음의 표현을 드러내고 있음 알 수 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엄마 하와의 기대는 무엇이었을까? 가인은 성장과정을 통하여 어떤 인격이 형성 되었을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성서본문은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성장 후 가인의 모습은 5절 본문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를 통하여 짐작하게 하고 결국은 동생을 살해하는 천륜을 저지른다. 이러한 배경과 환경 을 생각해본다면, 어쩌면 가인은 부모가 경험한 충격의 희생양인지도 모른다.
사회심리학에서는 성격의 형성이 환경에 의해 좌우되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환경적 요인에도 여러 요인이 있지만 많은 연구들에서는 태어나면서 최초로 접하게 되는 부모, 형제자매 등의 가정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가정환경 중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는 자녀가 태어나면서 맺는 최초의 관계이며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맺어진 관계이므로 다른 어떤 인간관계보다도 아동의 성격 형성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 말한다. Freud는 인간의 기본적 성격 형성은 유아기와 아동기 초기에 그 기초가 형성된다고 하였고, 유아의 행동이나 성격 발달이 부모를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하는 동안에 지적, 정의적 특성이 형성된다고 보았는데 이는 자녀의 성격형성에 부모의 성격과 양육태도가 중요한 요인임을 사사한 것이다. 즉 부모는 유전적 측면에서 뿐 아니라 동일시의 모델로서 그리고 직접적 양육행동으로서 자녀의 성격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가인의 환경배경과 그의 인간성, 그의 현재 상태를 아시는 분이시기에 그에게 근본적인 물음을 묻고 계신 것이다.
“어찌하여 네가 화를 내느냐? 얼굴빛이 달라지는 까닭이 무엇이냐?”
(창 4:6, 표준새번역)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는 물음이다. 너는 무슨 일을 경험한 것이냐! 다시 말한다. “그것이 화낼 일이냐?” 는 물음이다. 이 물음에 대하여 가인이 대답했다면 살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물음 속에는 자신을 돌이켜 생각할 수 있는 충분한 에너지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분노에서 벗어나 사실을 보라는 것이다. 가인에게서 일어난 일은 그와 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일이 감정을 가지고 화낼 일이냐고 뭍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한 일이 일어났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지 화를 내면, 감정의 어둠에 휩싸여 앞을 볼 수 없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 근본적인 물음에 대하여 가인은 대답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는데도 가인의 태도는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가인을 향하여 이어지는 말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은 너 자신에게 있으므로 너 자신을 다스리고 돌아오라는 말씀이다. 여기에서 죄는 감정에 빠져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로 해석되어 진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7)
본문에서 가인은 자신을 하나님과의 관계, 동생 아벨의 관계를 어떤 마인드로 발전시켰는가에 대하여 성서는 말없이 넘어간다. 다만 세월이 지난 후에 (!ymiy: $Qemi yhiy_w"i)라는 말로 그 과정을 생략한다. 그 세월동안 가인과 아벨은 태어나서 성장했고 직업을 가졌고 이제 세월이 지난 후에 자신들의 모습을,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물을 만들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제물은 그 마음, 그들의 모습의 표현이다. 가인은 농사를 하였고 아벨은 양 치기를 하였지만 그들이 성장하는 모습은 드러나지 않았다. 세월이 지난 후에 드디어 그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충분한 시간동안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생활을 하였고 어떻게 성장했는가가 이번 제물을 통해서 평가받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단 한 번의 제물을 바치는 것을 보고, 또 그것을 바칠 때의 순간적인 마음을 보고 평가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다. 여기에서 ‘열납하셨다’는 히브리어: h[;v; 는 전치사 lae과 같이 쓰이고 있는데 이 전치사가 아벨, 그의 제물, 가인, 그의 제물, 이렇게 나오는 4개의 단어에 모두 사용되고 있다. h[;v; 라는 동사는 “관심을 가지고 보다, 응시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호의를 가지고 보고 있는 대상을 “…에게, 위에”라는 의미의 전치사를 사용하여 표현함으로 “주어는 무엇에게 좋게 여기다”란 뜻으로 해석 된다. 이 “응시하다”란 단어가 4-5절에 반복적으로 쓰여진 반면, 6절에는 “어찜이뇨”란 단어가 반복적으로 쓰여지고있다. 여기에서 h[;v; 동사는 세월이 흐르기 전부터 세월이 지난 후, 그리고 지금 제물을 드리고 있는 전 과정을 응시하는 뜻으로 해석 된다. 곧 태어나면서 지금까지의 전체의 과정을 자세히 보고 열납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호의를 가지고 보고 있는 것은 아벨의 제물만이 아니다. 아벨 자신도, 가인 자신도, 포함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아벨이 바친 제물보다, 가인이 바친 제물보다는 그들의 이름이 먼저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보면 제물보다는 그들의 모습 그들의 성장한 모습이 더 중요시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관심 있게 보신 것은 “제물”만이 아니라 아벨과 그의 제물, 가인과 그의 제물이다. 가인의 성격에 대해서는 5절 본문이 말하고 있다.
“가인과 그가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4:5절)
본문을 살펴보았을 때 가인은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감정의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가인을 악한 자에게 속하였기 때문이다. 라고 요한일서에서는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악은 감정에 빠져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7절은 하나님께서 가인과 그의 제물을 선택하시지 않은 이유를 포함하여 말씀하시는 내용으로 보인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4:7절)
김이곤 교수는 “야웨는 아벨을 기뻐 받으신 다음에야, 그 이유 때문에 아벨의 제물도 또한 기쁘게 받으신 것이며, 또 가인을 기뻐 받지 않으신 다음에야,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가인의 제물도 또한 기쁘게 받지 않으신 것이다.”라고 말한다. 아벨과 그의 제물 중 아벨이 더 지배적인 개념이므로 아벨 자신이 하나님께 열납되면 당연히 어떤 제물을 바쳐도 열납되었을 것이다. 반대로 가인과 그의 제물중 가인이 열납되지 않았다면 가인의 제물도 열납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 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 1:13)
4.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이해
하나님의 선택에 대하여 혹자는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말하기도 하지만(Walter brueggemann), 그것은 가인과 아벨이야기에는 해당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열납하신 것은 “아벨과 그의 제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아벨은 신약성서의 본문에서 살펴보았듯이 믿음의 사람이요, 행위가 의로움이요, 의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벨과 그의 제물을 열납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물만 열납하시지 않은 것이 아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을 열납하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은 거룩함이다. 거룩함은 잠정의 상태에서 벗어나 사실을 바라보고(사실의 세계는 하나님의 세계이다) 있을 때 가능한 이야기이다. 곧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거룩함은 하나님께만 있는 특성이다. 하나님에게는 감정에 빠져 앞을 보지 못하는 일 자체가 없다. 만약 백성들이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살면, 거룩함이 그들의 생활의 특징이 된다. 이것이 소위 성결법전(Holiness)의 주제이다.(레 17-26장 참조)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야웨 너의 하나님이 거룩함이라(레 19:2)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출 16:6)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Walter Brueggemann의 ‘종잡을 수 없는 야웨의 자유’라든가 ‘삶은 불공정한 것이다. 하나님만이 자유로우시다. 우리사이에 살인적인 충동이 생겨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라는 것이든지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것은 하나님의 자유이며, 그렇기 때문에 야웨 자신이 가인의 분노와 우울의 원인이었다.’ 는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에 대한 주석은 정당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또한 Westermann의 말처럼 설화 자는 가인이 자신의 노동이 복을 받지 못한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두 사람이 똑같이 시작하고 똑같은 노력을 기울려도 성공과 실패에 대한 옛 경험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라거나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카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신 것에 대하여 카인은 무조건 승인해야만 한다. 는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에 대한 그의 주장과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신 이유에 대하여는 더 이상 진행하지 말아야한다는 논지는 검토의 필요성이 있다는 의문을 얻는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Von Rad 의 말처럼 피의 제물이라는 제물의 종류 때문만도 아니다. 아벨과 가인의 제물드림은 세월이 지난 후에 (!ymiy: $Qemi yhiy_w" ) 많은 날들이 간 후에 그들 자신이 하나님께 평가되어진 것이며 그 평가의 증표가 제물의 열납이라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는다.
Walter brueggemann은 가인은 첫 번째 아들이다. 이삭과 이스마엘, 그리고 야곱과 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장남은 창세기에서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주장 역시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서는 호응을 얻지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본 논문은 연구를 통하여 가인과 아벨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선택은 정의로우시고 공의로우시다는 말씀을 다시한번확인하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시 33:5)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6-8)
Ⅳ. 결 론
가인과 아벨이야기를 연구하면서 하나님의 선택의 자유는 은총 받을 대상자들의 하나님의 말씀 들음, 사람됨, 인격성(완전성)의 여부에 따른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하나님께서 열납 하신 것은 재물만이 아니라 “ 아벨과 그 제물(/tj;n_miAla,w_ lb,h,Ala,)” “가인과 그 제물”( /tj;n_miAla,w_ @yIq'Ala,w_ )이기 때문이다. 창 17:1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99세 때 나타나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ymit; hyEh]w< yn"p;l] &Leh't]hi )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은총의 임재, 곧 아브라함을 축복하기 위해서이다. 은총의 임재를 위해서는 완전함(!ymit;)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완전함의 또 다른 표현은 거룩함일 것이다. 거룩함은 자기를 이기는 힘으로부터 시작된다.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7절b) 하나님의 선택, 곧 축복의 전제 조건은 내 얼굴 앞에서 열심히 노력하며(히트파엘동사) 완전하게,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이다.:&Leh't]hi(레 17-26장 참조) 이제 하나님의 언약은 거룩함을 동반한다. 이 거룩한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창 17:13절)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창 17:10절) 이 후로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사래가 사라로 바뀌어 지며 후손의 약속이 성취된다. 후손의 이름은 이삭(: qj;x]yI)이다. 이쯔학크는 웃음이라는 뜻이다. 이 이야기를 선행연구에서는 솔로몬왕의 제사 예물과 관련하여 살펴보았다. 일천번제를 드리고 얻었다는 솔로몬의 지혜는 분명 하나님의 선택이다. 그러나 그 지혜의 남용은 “세월이 흐른 뒤” 왕국의 분열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있을 때 지속가능하다는 교훈을 얻는다. 하나님의 축복 앞에 서있는 인간은 웃음이다. 그로부터 탄생되어 서있는 인간도 웃음이다. 이제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의 찬송을 드린다.
가인과 아벨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신앙의 역사 속에서 일어났을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출발하였다. 그리고 몇가 지 선행 조사과정을 통하여 솔로몬 왕과 관련이 될 수 있다 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참으로 감탄과 경외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어떻게 장구한 세월동안에 기록되고 정리된 최종형태의 본문이 이렇게 정교하게 짜여져있는 것일까? 마치 거북등 껍질의 무늬와도 같다.
본 논문은 그 범위의 광대함으로 인하여 본문 연구 내용에서는 가인과 아벨의 제물 연랍과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범위를 정하여 연구하였다.
Von Rad, Walter, brueggemann, Claus Westermann, Speiser 등 선행 연구 조사를 통해 오랜 기간에 걸쳐 이 본문에 관한 연구에 있어서 해석의 방향은 가인과 아벨의 재물 상태에 따른 하나님의 관심과 하나님의 선택의 자유, 유목생활과 농경생활 사이의 갈등, 피의 제물 등에 관심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성서본문의 내용을 연구해본 결과 재물의 내용에 따른 하나님의 관심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대한 주장은 본문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 또한 발견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는 항상 공평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가인과 아벨에서의 하나님의 선택은 바로 인격으로 성숙되어 완전함(!ymit;)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자의 몫이라는 것을 본 논문을 통하여 확인하게 되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벧전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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