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수비학, 데카(텐)그램 --- 머리말 일부
2011.01.01 19:18
‘나 (I AM)'는 나보다 더 무한히 큰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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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는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이 있다. 무의식은 인성의 작용을 구성하는 시각과 청각적 인상들을 내면의 기억장치에 받아들여 합성된 이미지로서의 ‘나’를 만들어 낸다. 우리가 성격이라고 말하는 것, 에니어그램에서 몇 번 유형이라고 말해지는 것은 이 합성된 ‘나’ (synthetic image)를 말한다. 인간은 태아시절과 아주 어린 시절에 거의 무방비적으로 입력된 인상들을 바탕으로 성장해가면서 입력되는 모든 정보들을 분류하고 자신의 틀지어진 방식에 따라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성장의 과정은 자신의 인성을 강화시키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 인성의 발달은 영적의식을 발달시키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인성의 발달영역은 주어진 현실과 상황에 대처하는 제한된 능력을 계발해가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반응하는 능력을 얼마나 세련되게 또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행동방식이 나타나게 된다.
적극적인 인성으로 발달하든지 아니면 의존이나 이도 저도 아닌 움추림의 인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은 거의 기계적인 반응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합성자아와 동일시되어 있고 무능화 되어 버렸다. 자신을 진정으로 기쁘게 할 줄 모르고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대다수의 사람들은 육체를 나의 전부로 아는 생각 속에서 살아 왔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주의 깊게 탐사를 하기 시작한다면 합성자아야말로 스스로가 투사한 자아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성장을 가로 막고 있는 장애물이며 병이다. 우리는 이 장애물이 각자에게 얼마나 교묘한 형태로 작용하고 있는가를 통찰해야만 한다.
역사 속에 나타난 영혼의 스승들은 한결같이 단순한 감각적 인상으로 합성된 이미지로서의 ‘나’는 ‘나’가 아니며 인간의 생명 안에 흐르고 있는 영적 실상의 거대한 조류를 받아들일 때 인간은 합성 자아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을 강조해왔다. 그것은 내 안에서 갇혀 있는 ‘나’에게 문을 열어 주어 나를 나로 부터 자유하게 하는 일이다. 그 자유를 얻게 될 때 인간은 그 어떤 존재와도 통할 수 있는 영적인 존재임을 자각하게 되고 ‘나(I AM)'는 나보다 더 무한히 큰 존재임을 알게 된다. 그 무엇도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나‘로 서게 된다.
우리 안에는 신성한 창조능력이 있다. 그것은 역동적이고 자연스럽다. 인간을 ‘영혼의 존재’라고 부르는 것은 인간은 창조자(영혼)이며 동시에 창조물(육체. 개성)로서의 양면을 가진 존재임을 의미한다. 이 양면성이 조화되어 삶을 창조적으로 살게 될 때 행복하다. 인간은 자신의 삶과 세상에 대해 책임적 존재일 때 빛이 난다. 그러나 창조물들을 ‘나(I AM)로 동일시할 때 인간의 영광과 그 빛은 어두워지게 된다. 삶이 삶다워지는 것은 동일시의 잠에서 깨어나 창조적 차원의 의식이 열려지고 삶의 변화가 역동적일 때이다.
합성자아란 곧 내가 어떤 것에 어떤 방식으로 집착을 하느냐에 따라 반응하는 행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정체를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생각했었던 집착과 탐욕과 혈기로부터 분리가 일어나게 된다. 합성자아를 나로 알 던 때의 가치들이 전혀 다르게 인식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데카그램이 주는 지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원 안에 아홉 개의 점을 이은 별 모양의 에니어그램 도형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길을 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혀주는 영혼의 지도이며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이 세계를 이해하는 지혜의 도구로 활용되어 왔다. 도형 안에는 고대로부터 전해진 수열의 법칙과 숫자적 상징, 다양한 영적 유산들이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에니어그램의 고귀한 영적 유산들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오직 성격 유형론으로만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처지에 있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오스카 이카조의 성격 유형론으로서의 현대 에니어그램이 에니어그램의 전부인양 오해되어 지고 있다는 것과, 근본적으로는 ‘도형’의 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
에니어그램은 20세기초 구르지예프에 의해 전해진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구르지예프는 자신의 사상적 체계를 전달하는 방편으로 아타나시우스 키르헤의 도형을 참고해 변형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바빌론에서 창시되었다고 하는 사르몬 형제단에 의해 고대에 작성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이슬람의 수피 수행자에 의해 전해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주장은 심한 과장이거나 전달과정에서 나타난 오해가 아닐 수 없다.
에니어그램에 관한 어떤 저자들은 구르지예프가 중앙 아시아의 수피에게서 전수 받았다는 말을 여과 없이 받아들여 에니어그램의 역사를 2천여 년 전부터 수피로부터 전승된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슬람의 창시자 마호메트가 서기 571년경에 태어나서 632년 6월 8일 세상을 뜬 사람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또한 수피의 수행 체계는 서기 9세기 이후에나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야만 할 것이다. 구르지예프의 유명한 제자중 하나인 존 베네트 조차 14세기에 십진법의 발견 이후에 중앙아시아 수학자들에 의해 그 상징 자체가 최초로 묘사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진리인가?를 묻기 시작하면 우리는 지금까지 확실하다고 생각해왔던 것들의 기반이 무너지는 위험스런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적당히 알고 적당히 믿는다면 그런 위험은 없을 것이다.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세대를 통해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각 시대의 요구와 정치적 권위와 힘을 가진 사람들의 입맛대로 재단이 되어 전승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어떤 진실도 전승의 과정을 통해 거짓과 뒤섞이게 된다. 에니어그램 역시 이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에니어그램 도형의 원형을 추적하면서 에니어그램은 성격 유형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에너지와 파동, 인간의 영적 성숙의 여정을 다루는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 비밀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피타고라스에서부터 사막의 교부들, 그리고 라몬 룰과 아타나시우스 키르헤, 동방교회의 영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적 전승을 만나게 되었다. 특히 라몬 룰은 에니어그램의 도형을 완벽하게 완성된 형태로 보여준 사람으로서 그 도형 안에 담고자 했던 놀라운 사상과 이상은 다원화 사회가 된 오늘날에도 깊은 혜안과 통찰의 실마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문헌적으로 보면 에니어그램은 라몬 룰이나 아타나시우스 키르헤, 그리고 타로의 전승에서도 알 수 있는 바처럼 다양한 경로를 통해 도형이 그려졌고 발전되어 왔다. 에니어그램 도형이 완벽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은 13세기 ‘노나그램'(nonagram)이라고 부르기도 했던 라몬 룰의 작품과 예수회 신부이자 과학자였던 아타나시우스 키르헤의 『Arithmologia』라는 17세기 후반의 작품에서 아홉 개의 점을 나타내는 도형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구르지예프의 도형과는 달리 세 개의 삼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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