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광나치오
2011.03.13 08:56
관습의 벽 뛰어넘어 최고가 된 `조선의 마에스트로` 11人
매일경제
2011-03-04 17:07:461781년 어느 봄날, 못생긴 한 청년이 문단의 권력자였던 73세 대작가 이용휴를 찾아왔다. 청년은 소맷자락에 넣어온 시집을 이용휴에게 건넸다. 시집을 찬찬히 읽은 이용휴는 아무 말도 없이 곁에 있던 벽도화(碧桃花) 가지 하나를 꺾어 청년에게 주었다. 청년은 감격했다. 부처가 제자 가섭에게 빙그레 웃으며 꽃을 건네주는 것으로 그를 인정했다는 '염화시중' 사연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청년 이름은 이단전(李亶佃 1755~1790)이었다. 그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천민이었고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자기 호를 '필한(疋漢)'이라고 지었을 정도다. '필(疋)'자는 '下'와 '人'을 합한 것이고, '한(漢)'에는 천한 사내라는 뜻이 있으니, 필한은 '하인놈'이라는 뜻이다. 스스로 종놈이라는 호를 붙인 이단전은 외모도 보잘것없고 말까지 더듬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정신이 있었다. 그의 '거미'라는 시를 보자.
"불룩한 뱃속에는 경륜을 채워넣고 / 먹이를 얻으려 그물을 쳐놓았네 / 이슬방울 군데군데 깔아놓은 데로 / 바람타고 날아온 나비 걸려드누나." 관찰력과 언어의 운용이 매우 뛰어났던 이단전은 남들이 예절과 체면을 따질 때 본질을 바라본 시인이었다. 그는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이렇게 썼다.
"조물주는 대관절 무슨 생각으로 / 해동 한 모퉁이에 나를 낳았을까 / 심성은 바보와 멍청이를 겸했고 / 행색은 말라깽이와 홀쭉이 / 사귀는 이가 모두 양반이지만 / 지키는 분수는 남의 집 종놈 / 천축에 혹시라도 가게 된다면 / 무슨 인연인지 부처께 물어보리라." 종이라는 신분으로 당시 최고 고급문화였던 시를 지었던 이단전. "그래 나는 종놈이다!"라고 외치며 세상을 조롱했던 그는 누구보다도 호방하고 자유로운 시인이었다.
"나는 망하지 않는 부귀를 본 적이 없어. 해진 옷 한 벌에 막걸리 한 잔이면 나는 족하지. 죽으면 바로 그 자리에 묻어줘. 허나 이 삶 앞에 있는 숲과 물, 바람과 달은 어쩌면 좋지." 조선시대는 어쩔 수 없는 신분 사회였다. 그만큼 그 벽 앞에서 신음한 사람도 많았고 때로는 그 벽을 뛰어넘은 사람들도 있었다.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가 쓴 '벽광나치오'는 한 가지 일에 미쳐 현실의 굴레를 뛰어넘은 18세기 천재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조선후기 이들에게는 벽(癖 고질병자) 광(狂 미치광이) 나(懶 게으름뱅이) 치(痴 바보) 오(傲 오만한 자)라는 표현이 따라다녔다. 지금은 이런 사람들을 천재나 기인 정도 호칭으로 부르지만 당시는 그랬다.
대표적인 18세기 '벽광나치오' 중 한 명이 화가 최북(崔北)이다. 호생관 최북은 중인 신분이었다. 그가 원래 이름을 버리고 새로 만든 이름에서도 반항은 드러난다. '북'이라는 이름은 '칠(七)'자 두 개를 붙여놓은 형상이다. 남들이 자기를 높이지 못해 안달일 때 그는 스스로를 칠칠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그의 뜻대로 사람들은 그를 최칠칠이라고 불렀다. 지체 높은 양반이 자기를 위해 그림을 그려 달라고 하자 스스로 눈을 찔러 멀게 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만큼 최북은 자존심과 신념으로 똘똘 뭉친 인물이었다. 이런 일화도 있었다. 당시에는 중인을 '직장(直長)'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어떤 양반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를 최 직장이라고 불렀다. 그러자 최북은 붓을 던지며 이렇게 외쳤다.
"대관절 어떤 관료 명단에서 최북을 직장으로 임명한 걸 보았소!" 최북은 김홍도 정선 심사정 등과 함께 당대 최고 화가였다. 선비였던 이현환은 최북의 삶을 이렇게 기록했다.
"칠칠은 바람처럼 소매를 휘둘러 잠깐 사이에 그림을 완성했다. 대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왕족이나 귀족들이 그를 부리려고 하면 칠칠은 끝내 염증을 냈다. 흰 비단을 팽개치기 일쑤였다." 책에는 이 밖에도 18세기 최고 춤꾼이었던 운심, 세속의 소리를 잠재운 소리의 신 김성기, 자명종 제작에 삶은 던진 천재 기술자 최천약, 반상의 제왕이었던 정운창 등이 등장한다.
시대를 불문하고 벽을 뛰어넘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천재였고 세상에 대적하는 용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허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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