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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식목사 - 칼럼

2011.04.03 08:33

물님 조회 수:12944

# 배명식목사는 내가 시를 쓸 수 밖에 없도록 나를 닦달하는 역할을 해왔다. 첫시집 '나의 하느님이 물에 젖고 있다'는  순전히 배목사의 덕분에 나올 수 있었다.  지금은  감나무골 청도의 아름다움에 반해 원동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지만  그의 다양한 재능과 열정은 어느 곳에 있어도 빛을 드러낼 것이다.  이 아침에 배목사의 글을 읽으면서 그의 고단했던 삶의 이력을 다시 떠올리며, 그가 치른 인생의 수업료만큼 좋은 학점도 함께 딸 수 있기를 기원한다.  

 

 

 

극락강에서 청도천까지

                                       배명식목사(원동교회)

 

  나는 유년을 생각할때마다 맨먼저 떠오르는 장소가 있다.그것은 내 고향 광주광역시의 극락강이다. 그때에는 광산군에 속한 송정리라는 곳에 극락강이 있었고, 광주광역시로 송정리가 편입되면서 지금은 강이름도 <영산강>으로 새겨져 있다. 극락강과 황룡강의 샛강이 흘러 영산강으로 흘러간다. 나는 내 나이 50세가 되는 해에 광주에서 <빛고을의 샛강>이라는 주제로 강풍경들을 담아 유화 개인전을 남도문화예술회관에서 가졌다.극락강,황룡강,광주호,드들강 그리고 영산강까지 그린 그림은 40점을 채웠다. 모두가 어린시절의 추억이 있고, 발걸음이 닿았던 지역으로 그곳은 옛모습 그대로 놓여있다.지금은 근처에 아파트가 지어진 곳도 있지만 아직도 발전되지 않은 지방도시의 한계로 기억의 반추를 할수 있는 곳이다.

  나의 어린시절의 기억은  늘 어머니와 함께한다. 초등학교 3학년때 어머니를 잃고난후 나의 기억은 어머니와 함께 했던 기억을 집요하게 채집하듯 모조리 떠올려 보기도하고, 그 상실의 아픔을 씻을수가 없어 괴로와 하기도 했다. 나의 초기시와 산문은 어머니와 관한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문학은 산물이라서 일까? 지금은 고향에가도 내가 살았던 두암동이나 밤실같은 옛모습은 잘 나타나지 않아 (아예 동네 자체가 아파트 밀집지역으로 변했다) 옛노래의 가사처럼 '그리던 고향이 아니런가'이다.

  그 이후 나는 스스로 살아보고 싶은 장소는 늘 강이 있고 주변의 풍광이 번잡하지 않고 조용한 시골 풍경이 살아있는 곳이었다.그런곳을 찾아 보기도 했다.강릉의 털보 김영욱시인이 살고 있는 소금강입구도 좋았고, 충북 단양군수를 지냈던 이건표씨가 더 적극적이었다면 살게될뻔한 남한강가도 좋았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찾아가 상가교회를 인수하고 지냈던 안성천옆의 몇년의 삶도 좋았다.

  지금 내가 사는 곳은 경북 청도군의 청도천옆에 세워진 원동교회의 사택에 산다. 청도역에서 밀양으로가는 국도 25번도로 4KM 정도거리에 있는  이곳은, 봄에는 복사꽃 천지다.가을에는 감나무가 가득 심어진 산에 올라가 감을 실컷 따보는 재미가 있다.주인에게는 감과의 전쟁이지만....지난 여름에는 피아노 조율사와 함께 한밤을 청도천에 앉아 하늘보며 이야기꽃을 피웠다.나그네 인생길에서 언제까지 여기 놓여 살지 알수 없지만,내 삶의 거처가 유년의 원초적 기억으로 되돌아 가는 곳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은것은 무슨 이유일까?

  인류 최초의 삶의 장소는 에덴이었다.에덴은 4개의 강이 흘렀다. 인류의 발상지가 모두 강이 흐르는 곳이었다.창세기의 첫기록이있는 1-3장에서 땅은 바다에서 올라왔고, 사람의 형질이 만들어진 모태가 물속이다. 나는 아브라함처럼 더 나은 고향을 그리며, 보좌앞에 있는 유리바다와 생명수강가에 서 있는 내모습을 매일 꿈꾼다.우리의 옛선비들이 낙향하면 강가옆에 누각을 짓고 시를 지으며 살았던 그 옛날의 삶이 원초적 본능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 풍류의 허무를 생각하면, 나는 지금 예수안에 있는 구원받은 삶이 너무도 감사하고 기쁘다.

 

 영천교회

                               

 나는 고등학교 시절 부터 <영천교회>를 다녔다.아버지가 집을 광주광역시 두암동에 얻는 이유로 시내에 있는 중앙교회를 다니다가 집 가까이에 있는 교회를 찾은것이 계기가 되었다.어느날 교회 옆을 지나가다가 오르간소리에 이끌리어 교회에 들어섰다.교복을 입고 머리를 두줄로 땋은 머리를 한 여학생이 찬송가를 치고 있었는데 내가 좋아하고 잘부르는 곡이어서, 그 옆으로 다가서서 부르게 된것이 금방 친해지게 되었고,그 다음주에 자연스럽게 학생예배와 어른들이 모이는 대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나중 그 여학생과는 성가경연대회에 나갈때 반주자가 되었고, 나에게는 첫사랑의 연정이 움트기 시작했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여학생의 돌연 가출사건으로 동네에서 사라졌고, 나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와서 생활을 시작했다.

   내게 있어 영천교회는 천국의 문을 열어 준, 영적 첫사랑의 체험이 있는 곳이다. 그곳에 있는 동안 기독교의 복음이 무엇임을 알았고, 예수그리스도를 내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고, 죄사함과 부활의 생명과 천국을 소유하게되었다.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초등학생들이 보는 <1일 테스트>라는 시험지를 매일 돌리는 일을 하며 돈을 모아 다시 고향으로 가서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다. 내 또래의 친구들은 한 학년 위의 선배가 되고, 한해 늦은 나의 생활은 어울리는 친구가 없이 어색하고 소외되어 있었는데 교회만이 그 벽을 해소시켜 주었다.영천교회는 CCC와 UBF에 나가는 교사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의 열정과 적극적인 권유로 교회 밖의 성경공부모임에 참석하게 된것이 성경에 눈뜨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사실임을 알고 믿어지기 시작했다.성경고고학에 대한 서적을 보게 되고,당시 생명의말씀사와 보이스사의 책들을 많이 사서 본것이 신앙을 정리하고,영적세계에 대한 질서를 정립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문서선교하는 이들에 대한 감사를 평생 지니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나는 목사님의 아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목사님의 서재에서 박윤선주석을 비롯해서 많은 서적을 빌려 볼 수 있었다.그 중에서 뚜렸한 기억은,  일본의<네촌감삼>이 쓴 로마서 강해였다.마침 로마서를 강해하는 목사님의 성경공부에 참석하면서 본 그 책은 내 생애를 뒤집어 놓는 놀라움과 신앙적 확립을 주었다.당시 칼바르트의 로마서 소강해가 기독교서회에서 번역되었는데, 실존주의적 철학사조에 매료되어 있던 나에게 칼바르트의 언어는 정신적 충족감을 주었다면, 네촌감삼은 동양적이고, 서술이 아닌 직관적 언어로 성경의 진리를 극명하게 논파하여 내 심장에 새겨 주었다. 그후 네촌의 책이 설우사에서 번역되어 있음을 알고 모조리 사서 보게 되었다.영국의 로이드존스나 죤스타트의 책에서는 볼수없는 간략하고 명증한 언어의 구사로 계시의 언어를 풀이하는데는 일본의 미전풍이 쓴 신.구약강해서나, 흑기주석,그리고 워치만니의 단행본으로 번역된 책들이 긴 서술적 문장으로 지루하고 맥빠지게하는 서구인의 논리보다 설들력있게 다가온것은 사실이다.나는 그곳에서 지낸 시간이 나를 거듭나게 했다.시문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거듭난 기독시의 세계를 찾고, 신앙으로의 길을 나서는 순례자의 첫걸음이었다.

  당시 두암동의 영천교회는 미나리밭 가에 자리잡은 개척교회였다. 미나리밭에 빠지면 거머리가 늘 발목에 붙어 나왔다. 교회는 평안하지 않았다.처음에는 늘 장로님과 무슨 이유에서인지 목사님이  다투고,그  다투는 고성으로 동네사람들도 알게되어 전도가 안되는 곳이었다.키가 커다란 장로님은 키가 작은 목사님을 사자앞의 고양이처럼 다루었다.그 모습에는 도무지 섬김의 모습을 볼수 없었다. 그러나 어린 내 눈에는 목사님의 묵묵히 참고 지내시는 모습이 아름답고 경건하게 보였다. 목사아들과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교회 내부적인 일에 대해서는 함구했기 때문에 목사의 길이 어려운 길임을 알고, 나는 이후에 목사는 되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하고 있었는데, 책을 빌려가는 내 모습을 유심히 지켜본 목사님은 학생헌신예배시 나보고 설교를 하라고 지시했다. 처음엔 완강히 못하겠다고 버티다가,하겠다고 순종하기로하면서, 한주간 내내 원고를 쓰고 뒷 동산에 가서 웅변하듯 원고를 외웠다.어떻게 설교를 마쳤는지는 기억이 안났지만, 설교를 마친 이후로 목사님은 나에게 꼭 주의 종이 되라고 권고해 주셨다.교인들이 모두 격려해 주었고 평소 늘 밝은 미소로 반기며 맞아준 연순이 누나는 나를 소년으로 알았는데 이제보니 다 큰 어른이 되었다며 격려해 주었다.그 날이후 나는 목사님이 소개한 양로원에 정규적으로 설교하러 나갔고,마침내 <컴패션>이라는 사회사업단체에서 성경교사가 되어,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그 다음날 부터, 서울로 상경해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나의 첫 직업은 컴패션 산하의 교회에서 설교하는 전도자였다.영천교회에 나오던 간호사의 소개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천국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속의 신실한 사람들 속에 있었고, 나는 그 속에서 나의 구속자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회개한 강도에게 '오늘 너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하는 약속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다.지상의 교회는 완전하지 못하지만 죄인들이 모이는 그 속에는 늘 인간의 육적 욕구로 원망과 불평이 있다. 그러나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의 다스리심이 있기에 오래 참으시는 긍휼과 의로우심이 어둠속의 빛처럼, 그의 공의가 횃불처럼 나타나고 있음을 믿는다.결국 목사를 괴롭히던 장로의  급작스런 사망소식으로 교회는 경고하심과 두려움의 교훈을 얻었고, 그 자녀들까지 하는일마다 되는일이 없었다.영천교회 목사님은 그후 교회가 안정되자 지방의 큰 교회로 갔고, 젊은 전도사님이  신하교를 다니면서 사역을 했지만 오래 있지 않았다.유난히 목소리를 높이며 설교를 하신  전도사님을 오래 보지 못하고 서울로 온 나는 다시는 고향으로 가서 살지 못하고 영원한 고향을 그리워하며 '예수께서 각 성과 촌을 다니신"(마10;35)것처럼, 이제는 하늘나라에서 만날 천국백성을 양육하는 지역교회의 목사가 되어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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