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껍질 안의 병아리는 하늘을 볼 수 없다.
2011.04.24 09:14
알껍질 안의 병아리는 하늘을 볼 수 없다.
인간의 감각기능 중에 핵심은 시각이다. 말초신경 중 약 90퍼센트는 시신경이라는 점을 보더라도 시각은 인간이 외부의 정보를 받아 드리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현대인의 눈은 온갖 자극적인 영상매체와 인쇄물, 그리고 오염된 공기에 의해 혹사당하고 있다. 눈의 혹사는 자동적으로 시각을 관장하는 두뇌의 혹사로 이어진다. 문제는 지쳐버린 두뇌로는 깊은 사색의 세계를 탐험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건강을 생각하려면 눈과 두뇌를 쉬게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한 일환으로 숲을 활용하는 방법이 있다. 자연의 빛깔들, 그 중에서도 녹색은 편안하고 평화로운 색으로 인지되기 때문에 과다한 시각적 자극에 시달려온 시각과 두뇌를 쉬게 하는 효과가 있다. 숲과 자연이 주는 자극이 인간의 생리적 변화에 얼마나 긍정적 영향을 주는 것인지에 대한 많은 연구 보고가 있다. 인간이 자연을 가까이 할 때 건강 증진을 위한 도움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 사색할 수 있는 영적 감수성이 열리게 되는 이로움이 있다. 영혼의 사람들이 자연을 찾아 떠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자연의 세계는 모든 존재가 다르고 하나하나의 존재가 모두 완전하다. 그들은 비교 하지 않기 때문에 열등도 우월도 없다. 그들은 생긴대로, 있는 그대로 존재하기 때문에 자신의 가면을 나로 착각할 필요도 없다. 인간이 자연스러워진다는 것, 영적 성숙이란 가면을 자기 자신으로 아는 삶을 청산해 간다는 것이다. 가면을 아름답게 치장하고 꾸미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는 지혜를 얻어가는 것이다. 그 지혜만이 자신의 의식 속에 들어와 있는 성격이라는 이름의 참(real)과 거짓(unreal)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 역시 나의 참과 자연스러움을 회복하기 위함이다. 세속의 자극적 환상에 지친 나의 두뇌가 쉼을 얻고 영혼의 시각을 찾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내 자신을 기만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에니어그램이 말하는 성격이란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어떻게 기만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내가 어떤 방식으로 남을 판단하고 반응하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도구이기도 하다. 이런 상태에서는 자신의 가면을 벗겨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가면을 벗기려하기 보다는 타인의 가면을 벗기려 하는데 골몰하게 된다. 에니어그램이 제시하는 선물은 내가 남을 보는 눈이 아니라 타인이 나를 보고 있는 눈을 갖는 데 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신앙이 주는 선물과 은총은 예수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시각을 갖는 데 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신성한 창조는 가면의 벗김, 즉 거듭남에 있다는 것을 예수는 강조했다. 인간의 성장과정에서 자아(에고)는 생명체로서의 존재하려는 의지를 대표한다. 그 단계에서는 자기 보존의 본능, 사회적 본능, 성적 본능이 삶을 이끌어가는 추동력이다. 그 단계는 자기 초월에 필요한 힘과 욕구를 얻을 때 까지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죽을 때 까지 본능으로만 살아간다면 그는 지구에 보냄 받은 목적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자기 존재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며 영혼 없는 몸으로만 살아가는 것이다.
알에서 병아리가 나올 때 껍질은 반드시 깨어져야만 한다. 껍질이 아까워, 껍질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려워 그 안에만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죽음일 뿐이다. 그런 방식으로 살아있다면 숨만 붙어 있는 것이지 제대로 살아있는 것일 수 없다. 인간이 자기 의식 안에 갇혀 있을 때 그는 지구라는 시간과 공간 속에 얼어붙어 버리게 된다. 그는 집착하게 되고 수많은 피조물들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게 된다. 동일시야 말로 인간의 죽음 같은 함정이다. 집착이 심해져 강박증세가 깊어질수록 마음은 경직되게 된다. 인간의식이 딱딱해지는 것이야 말로 인간의 파멸이다.
껍질안의 병아리는 물을 마실 수도 없고 하늘을 바라 볼 수도 없다. 그런 병아리처럼 사는 사람은 배우려 하지 않는다. 순환적 사고를 할 수도 없고 자기 자신을 속박하고 상처 주는 데 골몰한다. 매우 욕심 많고 공격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는 사람이 정신세계를 다룬 책을 읽더니 자신은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한마디로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지금 여기’는 과거 현재 미래가 융합된 의식의 정점에서 영원불멸하는 지금을 체험한 사람들의 언어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목숨은 지상의 삶과 함께 끝이 나는 목숨과 영원히 보존되는 목숨이 있다. 요한 복음서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영생’이라는 주제 역시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체험의 언어이다. (요한.12:25)
계란 안의 의식권에 있는 사람이 그 껍질 밖의 사람이 쓴 체험을 이해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믿고 나도 껍질 밖으로 나가는 일이다. 엑소더스가 구원의 표상언어인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영생은 지구라는 알 껍질 의식 밖으로 나간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이다. 에고의 영역에서는 몇 살까지 사느냐가 주요 관심사이지만 영혼의 영역에서는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예수는 33세를 사셨어도 ‘다 이룬’ 삶을 사셨다. 그것을 생각하면 우리의 삶을 정말 아껴야 하지 않겠는가. 허송세월하지 말고 영적 진보를 위하여 주어진 시간 속에 영생을 채워보자. 내 존재의 목
적과 목표를 놓치고 있지 않은지 다시 확인해보자.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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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물님
물님의 글은 영을 살리는 글입니다.
물님의 말씀대로 오늘 저희 가족은 자연을 마시고 왔습니다.
눈 두뇌를 쉬기위해서 자연을 마셨습니다.
울산의 파래소 폭포입니다.
시원한 맘 받으시길 바랍니다.
물님(목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