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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마 빈 라덴과 굽비오의 늑대

2011.05.11 22:52

물님 조회 수:12155

 

오사마 빈 라덴과 굽비오의 늑대
2011년 05월 06일 (금) 23:10:00 정경일 편집위원jungkyeongil@gmail.com

 세계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 넣었던 9/11 테러의 주모자인 오사마 빈 라덴이 미 해군 특수부대에 의해 사살되었다는 발표에 미국이 들썩이고 있습니다. 미국인들의 내면에 깊게 남겨진 9/11의 상처를  생각하면 전혀 이해 못할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성조기를 흔들며 거리로 나와 열광하는 ‘일부’ 미국인들의 반응을 보며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그것은 우선 빈 라덴을 죽였다고 해서 오바마의 선언처럼 세계가 더 안전해진 것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산 빈 라덴’은 높다란 담장에 둘러싸인 좁은 공간에 은신해 있었을 뿐이지만, 이제 숨어 있을 필요가 없게 된 ‘죽은 빈 라덴’은 폭력의 유비쿼터스적 상징이 되어 세계를 더 위협하고 있습니다. 미국 정부가 빈 라덴의 죽음 이후 더 많은 테러 발생 가능성을 예상하며 미국 안팎에서 경계를 강화하고 있는 것은 그 사실을 입증해 줍니다. 또한,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보다 근원적 이유는, 빈 라덴이 아무리 악인이었다 해도, 한 인간의 죽음을 그렇게 흥분하면서까지 축하해도 좋은가 하는 의문 때문입니다. 미안한 소리지만, 빈 라덴의 죽음에 환호하는 일부 미국인들과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붕괴하는 것을 보며 환호했을 알-카에다 테러리스트들은 다른 것 같으면서도 많이 닮았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빈 라덴이 원했던 반응일 겁니다. 새로운 원한을 초래함으로써 또 다른 폭력과 보복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불편한 마음으로 오사마 빈 라덴의 죽음과 그것에 대한 일부 미국인들의 애국주의적 반응을 바라보는데, 문득, 성 프란치스코와 굽비오 마을의 늑대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굽비오 마을 사람들은 사나운 늑대 한 마리 때문에 고통을 겪습니다. 심지어 그 늑대는 가축만이 아니라 사람도 해쳤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늑대를 잡아 죽이려 했지만, 오히려 흉포한 늑대에게 죽임당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을 바깥으로 나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 늑대에 대한 증오와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서로를 증오하고 두려워하는 마을 사람들과 늑대 ‘모두에게’ 연민을 느낀 프란치스코는 그 늑대를 만나러 숲 속으로 들어갑니다. 얼마 후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늑대를 만난 그가 말합니다. “형제 늑대여, 내게로 오렴.” 그 순간 늑대는 프란치스코에게 다가와 그의 발 아래 순한 양처럼 엎드립니다. 프란치스코가 말합니다. “형제 늑대여, 나는 너와 굽비오 사람들이 평화롭게 지내기를 원한단다. 그들은 이제 너를 죽이려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너도 그들을 해쳐서는 안 된단다. 지난 날의 잘못은 모두 용서하마.” 프란치스코는 늑대에게 손을 내밀고 늑대는 앞 발을 내밀어 그 손에 얹음으로써 화해를 약속합니다. 그리고 늑대는 프란치스코를 따라 굽비오 마을로 들어옵니다. 약속대로 늑대는 더 이상 사람들을 해치지 않았고, 사람들도 늑대에게 먹을 것을 주며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서 평화롭게 두 해를 더 살던 늑대가 죽게 되었을 때, 굽비오 마을 사람들은 형제를 잃은 듯 슬퍼했습니다.
 
사나운 늑대를 형제로 대한 성 프란치스코의 행동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상기시켜줍니다. 예수가 말합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오 5:43-44).” 
 
여기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원수를 여전히 원수로 여기면서 사랑하는 것은 모순일 뿐 아니라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그 원수를 친구로, 자매로, 형제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원수는 더 이상 원수가 아니게 되고, 자연히 용서와 화해가 따릅니다. 물론 원수가 우리의 사랑을 거부하고 우리를 해칠 수도 있습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최소한 우리는 원수를 닮지 않을 수 있습니다. 미국 오바마 행정부의 한계는 원수를 친구로 바꾸지 못한 데 있을 뿐만 아니라, 원수의 행동을 모방하고 재현함으로써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할 수 없게 된 데도 있습니다. 
 
이제 보복의 차례는 빈 라덴의 동료들에게로 넘어갔습니다. 그들은 빈 라덴이 당한 폭력을 원수인 미국에게 그대로, 아니 몇 배로, 돌려주려 할 겁니다. 이름도 비슷한 버락 후세인 오바마가 오사마 빈 라덴을 형제로 대하며 사랑했다면, 그의 좌절과 증오를 이해하고 용서와 화해를 위한 손길을 내밀었다면, 세계는 정말 더 평화로워졌을 겁니다.  
 
아마 이런 원수 사랑, 평화의 이야기는 성서나 성인전에만 나오는 설화일 뿐 결코 현실적인 이야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현실적이지 않다면 원수를 미워하고 죽이는 것은 현실적인 걸까요? 설령 그것이 현실적이라 해도, 그런 현실이 과연 바람직한 현실일까요? 
 
원수를 사랑하는 대신, 증오를 증오로,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는다면, “눈에는 눈 식의 보복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눈 멀게 할 것”이라고 했던 간디의 경고처럼, 우리 모두는 증오에 눈이 멀어  폭력의 연쇄고리에 갇히고 말 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증오에 눈이 먼 사람들은 오사마 빈 라덴이라는 늑대를 잔혹하게 죽인 것을 축하하며 환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눈 먼 그들이 미처 보지 못하고 있는 정말 무서운 ‘현실’이 있습니다. 마을 바깥 저 어두운 숲 속에서, 동료 늑대의 죽음을 지켜보며, 증오로 으르렁거리며 보복을 다짐하고 있는 다른 늑대들, 즉 ‘오사마 빈 라덴들’이 있다는 현실입니다. 그런 현실에 눈을 뜨라고 붓다가 말합니다. “증오는 증오로 정복되지 않는다. 증오는 오직 사랑에 의해서만 정복된다. 이것은 영원한 진리이다(법구경).” 증오와 폭력의 악순환을 끊는 길은 오직 사랑이라는 그 진리에 우리 모두 눈을 떠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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