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의 가장 낮은 곳
2011.10.23 23:16
물・2
물
이승의 가장 낮은 자리를
찾아
나는 늘 가고 있다.
불 먹은 가슴이어서일까
아니면 하늘이 심어 준
역마살 때문일까.
흐르고 흐르다가 온몸이 부서져도
돌 박힌 시냇물이 아니라면
무슨 재미로 살 수 있을까
이곳에서
숨만 쉬고서야 살 수 없지
황금의 밥그릇 속에 머물 수야 없지
산다는 건
내 몸이 부서져서 터져 나오는
노래를 만나는 일
그 음악 속의 하늘을 만나는 일이지.
몸살의 가슴을 앓는 일몰의 바다에서
바다보다 낮은 하늘을 찾아
마침내 떠나는 일이지.
새벽 잠자리에서 첫 시집에 있는 시 ‘물2’의 마지막 구절이 떠올랐다. 이승의 가장 낮은 곳이 하늘이어야 세상이 제대로 돌아간다는 것을 자연은 소리 없이 말하고 있다. 이 가을 강물은 너무도 맑아서 하늘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인간의 영혼도 강물처럼 맑아지고 가을 열매처럼 익으면 하늘을 그대로 나타낸다. 바로 그것이 성숙이다. 이 가을에 만물은 그렇게 성숙의 길을 마무리하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땅에서 하늘을 담아내고 품어내는 사람이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의 뜻을 이루어가는 데 그리스도인의 존재적 사명이 있음을 통찰해 주고 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빌 2:6-8)는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하늘에서 내려와 이 땅에서 하늘을 이루신 그 분의 마음을 품으라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하늘을 잃어버린 인간, 하늘을 무시하는 세상에 하늘이신 예수는 오셨다.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심고자 하신 그 분의 뜻은 당대에 무참하게 짓밟힌 것 같았지만 갈보리에서 옹달샘처럼 터져버린 그 생명수는 지금도 흘러내려오고 있다. 인간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빵만 가지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그 분의 외침은 아직도 유효하다. 인간은 노예가 아니라 신의 자식이어야 한다는 피의 진실은 그 분의 영혼에 접속하는 자들의 피를 여전히 뜨겁게 하고 있다.
인간이 하늘을 잃어버릴 때 승자독식이라는 야수와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게 된다. 세상이 하늘을 잃어버릴 때 두려움과 절망의 땅이 되어 버린다. 탐욕과 착취로 인해 가난한 자들이 설자리가 사라지게 되고 자연은 황폐해지게 된다. 2008년도에 재벌들이 차지한 부가 국민 총생산의 55퍼센트였는데 2002년 이후 3분의 2를 넘어섰다는 보도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거대한 대형 쇼핑센터들이 전국의 도시들을 장악해가는 현실을 보면서, 그들이 피자와 순대장사 까지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가슴이 서늘하다.
성서가 말씀하는 내용은 단순하다. 인간과 세상이 하늘을 잃어버리면 자멸한다는 교훈이다. 인간이 찾아야할 하늘은 비움과 겸손과 섬김이다. 이 의미를 상징하는 것이 십자가다. 십자가의 상징이 예배당의 광고판으로 전락했다는 것은 이 시대의 교회가 얼마나 하늘을 잃어버리고 있는 가에 대한 고발이 될 것이다. 하늘은 구름과 해와 달과 별의 에너지를 통하여 지구 생명을 살리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고 자신의 하늘을 열어 세상을 살리는 책임을 감당해야한다.
바리새인들은 의로웠고 율법을 통달했지만 버림을 받았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은 죄를 짓고도 구원을 받았다는 복음서의 기록은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내가 기독교인이고 직분이 무엇이고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는 그 생각을 자신의 의로 삼을 때, 부지불식간에 죄인과 약한 자들을 무시하고 정죄하게 된다는 교훈이 아니겠는가. 예배당 평수가 넓은 교회에 다니고 그 교회의 중직을 맡은 것을 벼슬로 아는 사람들이 있다. 권력의 실세들만 모인다는 강남의 교회가 세상의 지탄과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 교회가 낮은 데 임하는 하늘의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기본 사상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라는 삼진법적 사상이다. 바로 이 사상이 예수의 정신이고 성서의 정신일 것이다. 그 하나 됨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는 갈보리에서 십자가를 지셨다. 인간은 하늘을 만나야 하고 그 하늘을 이 땅에 심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위대한 가르침은 십자가에서 선포되었다. 그 가르침의 실현은 예수처럼 모든 이를 섬기고자 하는 겸손과 비움의 덕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과거에 매이지 않고 지금여기를 사는 사람들이다. 흘러간 물로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는 말처럼 인간의 삶은 지금여기에 있다. 믿음의 길은 지금을 살아간다는 뜻이다. 지금 주시는 은혜를 깨닫고 누리는 삶에 있다.
에고에 사로잡힌 사람은 선한 자나 악한 자를 불문하고 비와 햇빛을 내려주는 하늘을 용납할 수 없다. 그들의 하나님은 악한 자를 멸하고 자신처럼 선한 사람들을 복주시는 하나님이어야 한다. 그들의 복이라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남보다 더 큰 밥그릇과 남을 누를 수 있는 권력을 갖는 것 아닌가.
하늘을 갖는 다는 것은 하늘처럼 무한히 큰마음이고 깨끗한 마음이고 은혜를 퍼부어주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바로 그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다. 우리도 그 마음을 구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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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읽고 나니 무극이태극이란 말이 떠오릅니다. 없음이 곧 하나가 있음이고 있없음이니 0,1,2 무극이태극, 또한 삼태극으로 표현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주님도 악업보다 선업을 더 경계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악업이라 표현될 수 있는 당시 세리나 창녀들에게는 직접 말씀으로 믿음을 주셨고 선업이라 표현되는 가족, 형제, 자매들에게는 사랑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갈라지도록 칼을 가지고 왔다고 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선업이라 불릴 모든 착함이 사라질 때야 악한자나 선한자나 동등함으로 대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보약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