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년 - 김홍한목사
2012.01.04 23:47
임진년
임진년 새해가 밝았다. 임진년 하면 무엇보다도 1592년 임진왜란이 생각난다. 지금부터 420년 전이다. 해양세력인 일본과 대륙세력인 명나라가 조선에서 벌인 국제전쟁이다. 일본은 애초 조선정벌에 뜻이 있었다기 보다는 그 목표가 명나라였다. 명나라가 조선에 원군을 보내온 것도 조선을 돕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일본을 조선 에서 막기 위해서였다.
국제전쟁이라는 면에서 1950년 6.25전쟁과 비슷하다. 6.25전쟁도 해양세력인 미국과 대륙세력인 중국·소련이 한반도에서 격돌한 전쟁이었다.
7년간의 전쟁으로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크게 변했다. 명나라는 그 후 국력이 쇠하여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게 망하고 말았다. 반면 일본은 문명이 크게 신장했다. 조선으로부터 많은 문화재를 약탈해 가고 10만 명에 달하는 포로를 끌고 갔다. 그 문화재와 포로들이 일본문명을 일으키는 촉매가 되었다. 특히 그 때 끌려간 도공들이 일본의 도자기 산업을 크게 일으켰다. 훗날 일본은 그 발달된 도자기를 서양에 팔아 막대한 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군함과 대포 등 무기들도 대거 사들일 수 있었고 결국 또다시 조선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고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킬 수 있었다. 그래서 임진왜란을 세계사적으로는 “도자기전쟁” 이라고도 하고 10만 명의 포로를 잡아갔다고 해서 “노예전쟁”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의 결과 일본이 크게 발전했듯이 1950년 6.25전쟁으로도 일본은 크게 발전했다. 1945년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함으로 일본은 절망의 상태에 빠졌다. 그런데 그로부터 5년 후에 일어난 6.25전쟁으로 인하여 일본은 막대한 전쟁특수를 누렸다. 그것이 밑받침 되어 일본은 다시금 세계 경제대국이 될 수 있었다.
한편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따라서 가톨릭 선교사가 조선 땅에 들어왔다. 당시 중국과 일본에는 이미 가톨릭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한창일 때 중국에서는 예수회 선교사 마태오리치가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의 四書를 라틴어로 번역하고 있었다. 임진왜란에 선봉장으로 온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다. 그 고니시 군대의 종군신부로 가톨릭 신부가 따라 들어온 것이다.
중국과 일본에는 이렇게 일찌감치 기독교가 전파되었는데 어찌하여 우리나라에는 저들보다 200 여 년이나 늦었을까? 그것이 참 신기하다.
1500년대 들어 기독교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아메리카,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 일본, 태평양의 작은 섬들까지 기독교가 퍼져 나가는데 유독 우리나라에는 기독교선교사의 발길이 들어오지 않았다. 국가단위로 볼 때 우리나라는 기독교선교가 제일 늦은 나라였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기독교 선교는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매우 특이한 점이 몇 가지 있다. 그 하나는 선교사들에 의해서 선교된 것이 아니라 자생적으로 기독교선교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청나라를 통해서 유입된 서양문물을 열심히 공부하던 조선의 지식인들, 특히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난 남인들이 적극적으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기독교신앙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들이 선교사를 요청했다. 우리 땅에 온 선교사들은 복음의 씨를 뿌리러 온 것이 아니라 수확하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처음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우리나라에는 이미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선교역사상 유래가 없는 것이었다. 개신교도 마찬가지 였다. 선교사들은 전도는 고사하고 몰려드는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또 하나 한국기독교의 독특한 점은 가장 늦게 선교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크게 성공한 나라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먼저 기독교선교가 시작된 인도는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대부분이다. 동남아시아도 마찬가지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는 이슬람교가 80%다. 역시 우리보다 훨씬 먼저 선교가 시작된 중국의 기독교인 수는 전체인구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일본은 그들이 자랑하는 신간센을 타고 아무리 달려도 십자가 보기가 힘들다. 반면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실로 괄목할만한 성장을 하였다. 역시 기독교선교 역사상 유래가 없는 성장이다.
우리나라 교회가 이렇게 크게 성장한 이유가 무엇일까? 혹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민족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그렇다고 한다. 혹자는 우리나라사람들의 종교심성속에 이미 기독교적인 요소가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예부터 天神신앙이 있었는데 그 천신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상당히 일리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나는 좀 다른 이유를 들고 싶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기독교의 선교는 제국주의 선교였다. 서양 기독교국가들의 침략주의와 함께 기독교선교가 이루어진 것이다. 강한 기독교국가들이 약한 나라에게 무자비한 폭력과 수탈과 강간을 하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물론 기독교 선교사들이 폭력을 행사한 것은 아니고 그들의 국가가 그렇게 하였지만 당하는 이들 입장에서 본다면 그게 그거다. 대부분의 피 선교국가들에게 기독교는 압제자의 종교였다. 그러한 나라에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민족반역자 내지는 기회주의자로 매도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달랐다. 우리는 서양기독교국가의 침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 기독교는 오히려 일본에게 박해받는 종교였고 일본에게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였다. 그래서 상당수의 애국지사들과 선각자들이 구국의 이념으로 유학을 버리고 기독교를 선택했다.
해방 후 우리 땅에는 미국이 들어왔다. 처음 미국은 점령군으로 우리 땅에 들어 왔다. 그러나 6·25 전쟁 후 미국은 우리나라를 공산주의국가인 중국과 소련을 막기 위한 방패로 삼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 무척 많은 원조를 해 주었다. 그 선봉에 기독교교회가 섰다. 그래서 기독교는 착취하는 종교가 아니라 베푸는 종교였다. 저 남쪽 베트남의 경우는 다르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일으킨 것은 베트남에서 많은 것은 빼앗아가기 위해서 였다.
일제에 의해 박해받은 기독교, 북한에서는 공산주의에 의하여 배척받았다. 박정희·전두환 군부독재 치하에서는 민주화와 통일을 외치는 교회들이 박해를 받았다. 박해받는 종교였기에 생명력이 있었다.
1993년을 정점으로 한국교회는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김영삼장로님이 대통령이 된 이후다. 더 이상 새롭지도 않고 박해받는 종교도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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