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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의 쓴물

2012.02.13 09:17

물님 조회 수:6321

 

마라의 쓴물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이라는 극적인 사건을 겪고 광야에 나가 첫 번 진을 친 곳이 마라였다. 그들은 홍해를 건넌 감격으로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광야를 향해 진군했다. 그러나 삼일 만에 마라에서 부딪친 문제는 식수문제였다.

 

" 그들이 마라에 왔으나 마라의 물을 마실 수 없었으니, 이는 그 물이 쓰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하니라" (출 15:23)

 

인생이 잠간 살다 간다하지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은 잘 나간다 싶을 때 곤두박질하는 일들이 생기기 때문일 것이다. 눈물과 함께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하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은 인생의 길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주제가 바로 이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분야에서든지 정상에 오른 사람들은 모두 이 시련의 곤두박질을 극복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영혼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통과해야 부활의 세계가 열리는 것처럼 모두 시련의 광야를 몇 번이고 건넌 사람들이었다.

 

 

자연의 세계를 둘러보면 벌레들도 고치를 짓지 않고는 나비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도 의식의 변형과 도약이 일어나고 재탄생의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영혼의 고치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 고치는 추락의 시간이요 고통과 죽음의 시간이다. 화려한 저녁노을이 지나면 순식간에 어둠이 오고, 아름다운 가을 단풍이 지면 겨울 한파가 덮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모든 빛깔이 사라지는 시간이다. 그러나 겨울 지나면 봄이 오듯이 삶의 한 주기가 새롭게 시작되는 비밀이 여기에 있다.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는 바로 이 비밀을 상징하고 있다.

 

 

인간의 의식이 커지는 것은 올라갈 때가 아니라 내려갈 때이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 사람들이 큰 사람이다. 섬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과 삶은 바로 이 주제와 연결되어 있다. 밀알의 교훈처럼 지구에 심어진 밀알의 사명을 다하신 예수는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절규했다.

 

고치 속에서 처절하게 자기 에고의 정체를 보고 그 에고와 싸워 이긴 사람은 존재의 왕이다. 왕의 의식에 도달한 사람이 진정한 자유인이다. 그는 모세가 했듯이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만들어 마시는 사람이다. 그러나 몸만 자유인이지 의식은 여전히 에집트의 노예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홍해의 기적을 망각하고 마라의 우물에서 '불평'을 해대기 시작했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불평만 해대다가 광야에서 모두 죽어갔다.

 

"백성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불평하며 말하기를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므로" (15:24)

 

출애굽기는 인생의 광야를 건너는 자들이 경계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 '불평'이라는 점을 밝혀주고 있다. 인생의 여정에서 믿음과 소망과 감사가 사라질 때 나에게 오는 모든 조건들이 불평의 재료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이다.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으로서 '내가 누구인지' '어디를 목표로 해서 가는 존재'인지 모르는 망각 상태에 빠질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심히 불평을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물물이 쓴 것만을 보고 불평했지만 정작 자신 안의 불평이라는 '마라'를 보지 못했다. 조그만 일에도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작은 먹을거리에도 탐욕의 싸움을 벌이는 자신들의 '마라'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무지와 탐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 기고만장할 때마다 여러 가지 모습으로 마라의 쓴물을 준비하셨다.

인생의 길에서 마라의 쓴물도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는 성숙한 의식에 도달한다. 나에게 찾아온 죽음 같은 고통의 시간도 나를 나비 만들어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다. 바로 그런 이가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이다.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이요, 진실로 자기다운 사람이다. '나 (I AM)를 완성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