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친교
2012.02.17 23:23
영적 친교
마틴 세실,
날이 서늘할 때가 오면 날이 서늘할 때 동산을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을 우리는 상기 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그 음성을 들을 때 들리는 말씀은: “네가 어디에 있느냐?” 입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음성과 그 놀라운 말씀의 영을 들으면 우리는 곧 대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 내가 있나이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에 대한 태도가 명확해지고 두려움이나 수치심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과거에 알고 있었던 자기 중심성에 매달린다면 그로부터 돌아서서 두려움과 수치심 속에서 다시 숨기 쉽습니다.
왜 인간의 가슴에 두려움과 수치심이 있습니까? 그것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가 수치스럽기 때문입니다. 두려움과 수치심이 있을 때는 숨으려 하고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피할 곳이 없다는 점을 아는 지점에까지 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한번 분별력을 갖고 정직하게 대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을 직면합니다.
우리는 자기 현시라는-옥으로 만들어진-거울을 드려다 보아 왔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정직할 때만이 이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며 거기에 있는 것으로부터 피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정직하기 전까지는 우리에게는 단지 희망의 잠재성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번 보고 나서 빨리 달아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비록 처음에는 이것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라 하더라도 반복해서 행해야 합니다. 지금 상태의 세계에서는 이것은 영적 성숙 과정의 부분입니다. 이 세계에서 영적 성숙은 모든 다른 수준의 성숙을 포함합니다. 먼저 영적 성숙이 이루어 지지 않고는 어떤 성숙도 이룰 수 없고 이것은 우리가 주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것을 요합니다.
인간의 견해는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은 회개하는 것이고 그러면 신은 우리를 용서하고 머리를 만지면서 “가까이 오라”라고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의 법 아래에서는 그렇게 작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회개하고 싶다는 욕망에 불과한 것이 회개가 아니고 용서를 받고 싶다는 단순한 욕망이 용서받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물 속에서 씻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 땅에 있는 주님의 종에 의하여 됩니다. 그래서 회개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진리의 물을 부어줄 수 있는 사람이 이 땅에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기에는 참된 회개와 참된 응답—열린 가슴을 요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 열린 가슴을 가지고 주님의 소리에 응답하는 가운데 주님 앞에 기꺼이 발가벗고 섬으로써 두려움과 수치심을 털어 버립니다.
같은 영을 나눌 수 있을 때 다양한 각도에서 이해가 생기게 되고 그럼으로써 비전이 완성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될 때 그 모든 것은 같은 영에 의하여 생겨나고 형태로 나타나는 전체 그림은 일치와 조화와 하나됨을 드러낼 것입니다. 인간이 형태에 근거하여 일치를 이루려 하면 논쟁이 일어나고 갈등을 초래하여 아무도 참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그들이 살아있는 신의 영으로 다시 오기 전에는 참으로 소통할 수 없으며 그렇게 될 때 신과 교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현존 앞에 다시 와서 우리는 어떤 것도 숨길 의도 없이 그 앞에 설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무엇을 숨기려 한다면 그렇게 의도하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보통 어떤 것-다른 것이 아니면 체면 같은 것- 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또는 그가 훔친 값싼 어떤 예쁜 것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삶을 처음부터 그에게 속해 있었던 주님께 되돌리는 것에 흥미가 있다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생명을 훔쳤던 그이를 사랑하게 되었고 우리가 그런 일을 그에게 했던 것을 가슴 아파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덕을 본 모든 것을 우리가 그렇게 누렸던 특권에 대한 깊은 감사함의 태도로 그에게 되돌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 특권이 없었다면 극도의 처참함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 점 일 획도 우리의 자기 중심적인 자아를 위하여 남겨두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에게 되돌려 짐에 따라 우리는 주님과의 교감이 더 커지고 그것은 우리의 형제 자매들과의 영적 소통의 바탕이 됩니다. 그리고 인간의 경험에서는 보통 가장 나중에 오는 일인 이것이 우선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두 사람 간의 영적 친교는 먼저 주님과의 개인적인 친교가 있기 전에는 불가능합니다. 주님과의 영적 친교 속에서 순종하기 시작하는 사람이 있기 시작함에 따라 우리는 진리를 숙고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숙고하기 위하여 머무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육체적인 친교에 기울면서 마치 그것이 인생에서 이루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인 것처럼 이러한 일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하는 것은 어떠한 창조적인 경험도 불가피하게 유산 시킬 것입니다. 고요히 앉아서 듣는 사람이 있을 때만이 영적 친교도 가능할 것입니다.
인간은 가장 성스러운 곳, 즉 신에게 가장 가깝고 인간이 창조적인 능력을 함께 하는 곳에 가증스러운 것을 허용했습니다. 그 곳은 인간의 어법에서는 성이라 부릅니다. 그 곳은 가장 성스러운 곳입니다. 영적 친교가 먼저 옵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과의 친교, 주님과의 교감에 기초를 둡니다.
주님과의 소통의 실제를 경험합시다. 그러나 당사자가 깨끗해 지기 전에는 소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깨끗하면 참된 하나됨이 있습니다. 당신의 자기 중심적인 욕망에 근거하여서 주님을 유혹하여 당신과 하나되도록 할 수 없습니다. 그는 멀리 떨어져 냉담하게 서있고 발견될 수 없습니다.
모든 다른 교감은 주님과의 교감에 근거합니다. 당신이 그것이 무엇인지 알 때 당신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넓히는 교감의 파급효과들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주님의 방식은 모든 삶을 충족시키는 길입니다. 그래서 주님과의 교감이 먼저 오고; 그리고 이것이 실현되었을 때 법이 당신을 통하여 작용하고 존재의 참된 디자인이 당신이 땅에 있음으로 형태를 취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그가 그렇게 하도록 할 때 형태를 취하여 영적 친교는 확대될 수 있습니다. 영적 친교가 자라고 발달하게 하여 주님의 계절에 그 형태가 드러나도록 합시다.
남성들은 많은 경우에 어떤 육체적 관계로 해석하지 않으면서 여성들과 영적 친교를 나누는 것이 어려움을 경험해 왔으며 여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영적 친교는 육체적 의미를 전혀 부여하지 않고도 남성들 사이에서 그리고 여성들 사이에서 혹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나누어질 수 있는 친교입니다. 영적 친교는 관련되는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같이 침대로 뛰어드는 것을 상상하지 않으면서 남성들 사이에서, 또 여성들 사이에서, 그리고 또한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억지로 그들 자신이 욕구하는 패턴으로 강요하도록 하지 않고 올바른 디자인이 드러나도록 합시다; 만일 그것이 드러나도록 한다면 그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훌륭하고 충만한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들이 서로를 선택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네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선택하였다.” 신의 디자인은 성스러운 디자인입니다. 인간의 디자인이 아닙니다. 인간의 디자인은 성스러운 디자인에 대한 불결한 대체물입니다. 그것은 빨리 해체될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성스러운 디자인이 제자리를 찾게 하십시오. 그것은 먼저 주님과의 영적 친교의 경험을 기꺼이 하고자 함을 바탕으로 하고 그 다음 다른 사람과의 친교가 오도록 함으로써 당신과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며; 그리고 그 다음 주님께서 그것을 통합하시도록 합니다. 만일 당신이 그분께 맡기면 그분께서 하실 것입니다. 여기에 신의 통치가 있습니다. 여기에 주님 앞에 발가벗고 기꺼이 서는 이들의 경험이 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움과 수치심으로 나무 뒤에 숨지 않습니다. 그들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대답해야만 하는 것 조차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들이 있는 곳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더 이상 묻지도 않으십니다. 이러한 일의 실현을 신의 영광으로 돌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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