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간의 호수 - 서동욱
2012.05.23 23:53
3분간의 호수
비가 온 뒤 플라자 호텔 앞 도로는
수면이 맑게 닦인 호수 같다
붉은 신호등이 차들의 침범을 막아 서울
한복판에 3분간 딱
켜져 있는 호수
그 위를 잠자리 한 마리가
공중에 필기체를 휘갈기며 날아간다
가는 꼬리에 뽀글뽀글 가득 찬 저
낳고 싶다는 본능이, 겨우 물로 매끼한 정도의
수심 2mm의 호수에 혹했다
저쪽 횡단보도엔 벌써
파란 등이 이쪽으로 건너오겠다는 듯 깜박거리고 이제
10초 후면 배때기에 타이어 자국 새기며 사라질 호수
물 위를 꼬리로 톡톡 쳐보고 기쁜 듯 홀라당거리며
S자로 6자로 소란스레 비행하는 저 욕망
배고 낳고 죽는 모든 껍데기들을 지구의 탄생부터
떠받치고 있던 저 에너지는
그러나 지구에서는 천수를 다했다는 듯,
이윽고 우주의 시간이 땡 파란 불로 바뀌며
소공로에서 좌회전 대기하고 있던 개들이 풀려나와
덮쳐버린다
● 시·낭송_ 서동욱 - 1969년 서울 출생. 시집 『랭보가 시쓰시를 그만 둔 날』, 『우주전쟁 중에 첫사랑』 등이 있으며, 이밖에 지은 책으로 『차이와 타자-현대 철학과 비표상적 사유의 모험』, 『들뢰즈의 철학-사상과 그 원천』, 『일상의 모험-태어나 먹고 자고 말하고 연애하며, 죽는 것들의 구원』, 『익명의 밤』 등이 있음. 현재 서강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
● 출전_ 『랭보가 시쓰기를 그만 둔 날』(문학동네)
댓글 0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283 | 보고 싶다는 말은 | 물님 | 2012.06.04 | 5743 |
282 | 뉴욕에서 달아나다 | 물님 | 2012.06.04 | 5968 |
281 | 호수 -문병란 | 물님 | 2012.05.23 | 5784 |
» | 3분간의 호수 - 서동욱 | 물님 | 2012.05.23 | 5791 |
279 | 양애경 - 조용한 날들 [1] [1] | 물님 | 2012.05.15 | 6111 |
278 | 빈 들판 - 이 제하 | 물님 | 2012.05.07 | 5747 |
277 | 신록 | 물님 | 2012.05.07 | 5799 |
276 | 거짓말을 타전하다 [1] [2] | 물님 | 2012.04.24 | 5782 |
275 | 삶이 하나의 놀이라면 | 물님 | 2012.04.07 | 5697 |
274 | 이장욱, 「토르소」 | 물님 | 2012.03.27 | 55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