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족의 생존을 지켜준 차(茶)
2012.07.12 23:07
모리거사의 차이야기> 9.
- 중화족의 생존을 지켜준 차(茶)
중화족은 본디 황하(黃河)라는 거대한 강줄기를 따라 살면서 문명을 이룬 종족이었다. 그 황하는 하류를 따라 거대한 농경지가 만들어졌고, 그리하여 농경문화를 토대로 나를 구축한 민족이었다. 해서 수렵과 목축을 토대로 한 기마민족과 달리 이동없이 안정된 생산과 소비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같은 풍요를 눈치첸 주변국들이 이를 탈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공격해왔고,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종족들이 바로 북방 기마민족들이었다. 따라서 이들로부터 자신들의 부를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 것인지를 고심해야 했다.
특히 동북방의 기마민족인 고구려의 공격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말의 기동성과 속도를 가미된 공격과 약탈은 땅바닦에서만 움직이는 보병들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해서 중원은 수많은 나라가 망하고 다시 서기를 반복했던 역사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바로 이같은 기동력 부족의 결과가 만리장성이고, 병법과 전략 전술의 개발 등이었는데, 이같이 별짓을 다해보았지만 부여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고 있는 북방 민족들의 말발굽 앞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는 한계였다.
결국 중원의 제왕(帝王)들이 힘을 얻게되면 기마족의 나라들과 협상하거나 죽기살기로 싸울 수 밖에 없었고 번번히 패전을 감수해야 했다. 그리하여 결론은 자신들도 기병대를 만들기로 한다. 헌데 그러자면 말을 구해야 했다. 그리고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주목한 곳이 바로 티벳이었다. 티벳에는 고원을 누비며 야생하는 말이 무수히 많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중국이 티벳에서 말을 가져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티벳의 군사력이 결코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강제로 티뱃을 정벌하여 빼앗아 올 수도 없었다.
해서 고심중 해결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차(茶)였다. 차와 말을 바꾸면 될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자신들의 과거 경험상 티벳인들에게도 차가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이라 보았던 것이다. 사실 당시 티벳인들의 주식은 주로 고기와 양젖이었다. 그래서 심각한 비타민의 결핌을 가져왔고, 때문에 30살이 되면 거의 늙은이 수준이 되었고 수명도 60을 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차를 보내 보았는데, 의외로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 그들에 차는 맛없는 식품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티벳인들에게 차가 없어서는 않되는 식품이 되어 버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중국의 수나라는 중원을 통일하고 자신을 얻자 그간 시달림을 받았던 북방 기마족 고구려를 상대로 611년-614년까지 100만명 이상의 군대까지 동원하여 4차례나 정벌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들의 기동성 앞에 실패로 나라까지 망하고 말았고, 다음 중원의 영웅 이세민에 의해 당나라가 세워지고 중원의 패자가 된 다음 다시 고구려에 대한 진격의 나팔을 분 것이 645년이다.
헌데 이세민은 공격에 앞서 치밀한 준비 작업을 벌린다. 바로 641년 문성공주를 티벳에 시집을 보내 혹시 야기될지 모르는 티벳의 후방 공격을 사전에 막았다. 하지만 포석에는 더 깊은 속내가 있었다. 말을 얻기 위한 공작 정치였다. 바로 차(茶)를 통해서 말이다.
문성공주는 시집갈 때 혼수품 중 다량의 차를 가지고 들어간다. 티벳 왕실이 별로 탐탁치 않게 여기자 그녀는 직접 차를 식사 때마다 양젖에 타서 먹었다. 그녀로서는 티벳 음식에 적응이 힘들어 한 짓이었는지 모르지만, 이짓은 티벳사람들어게 차를 알게 만드는 계기를 주었다.
게다가 16세의 나이로 티벳에 온 그녀는 56세까지 40년여년을 살면서 젊음을 유지했던 비결이 차에서 비롯된 것을 알게 된 티벳인들이 너도 나도 이를 따라 하게 되었다. 티벳인들에게 점차 차가 필요해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중국은 서두루지 않고 거의 공짜 수준으로 차를 공급해 주었다. 그들의 필수품이 될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분위기가 익자 본색을 드러내어 점차 찻값을 올리고, 말로 바꾸는 수순을 밟았다.
결국 작전은 성공을 거두어 중국은 대량의 말을 구할 수 있게 되었고, 비로소 중원은 북방 기마족의 침공을 견디어 낼 전투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차가 중원을 지키는 도구가 되었다는 말이다. 유명한 ‘차마고도’의 스토리가 바로 그것이다.
그 결과 중국에는 차 생산이 급격히 늘어나게 되고, 세월이 흐른 오늘날 운남성과 사천성 등에 거대한 차 생산지가 만들어져 국가 수입을 올리는 것도 이 때부터였다.
- 중화족의 생존을 지켜준 차(茶)
중화족은 본디 황하(黃河)라는 거대한 강줄기를 따라 살면서 문명을 이룬 종족이었다. 그 황하는 하류를 따라 거대한 농경지가 만들어졌고, 그리하여 농경문화를 토대로 나를 구축한 민족이었다. 해서 수렵과 목축을 토대로 한 기마민족과 달리 이동없이 안정된 생산과 소비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같은 풍요를 눈치첸 주변국들이 이를 탈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공격해왔고,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종족들이 바로 북방 기마민족들이었다. 따라서 이들로부터 자신들의 부를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 것인지를 고심해야 했다.
특히 동북방의 기마민족인 고구려의 공격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말의 기동성과 속도를 가미된 공격과 약탈은 땅바닦에서만 움직이는 보병들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해서 중원은 수많은 나라가 망하고 다시 서기를 반복했던 역사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바로 이같은 기동력 부족의 결과가 만리장성이고, 병법과 전략 전술의 개발 등이었는데, 이같이 별짓을 다해보았지만 부여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고 있는 북방 민족들의 말발굽 앞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는 한계였다.
결국 중원의 제왕(帝王)들이 힘을 얻게되면 기마족의 나라들과 협상하거나 죽기살기로 싸울 수 밖에 없었고 번번히 패전을 감수해야 했다. 그리하여 결론은 자신들도 기병대를 만들기로 한다. 헌데 그러자면 말을 구해야 했다. 그리고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주목한 곳이 바로 티벳이었다. 티벳에는 고원을 누비며 야생하는 말이 무수히 많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중국이 티벳에서 말을 가져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티벳의 군사력이 결코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강제로 티뱃을 정벌하여 빼앗아 올 수도 없었다.
해서 고심중 해결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차(茶)였다. 차와 말을 바꾸면 될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자신들의 과거 경험상 티벳인들에게도 차가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이라 보았던 것이다. 사실 당시 티벳인들의 주식은 주로 고기와 양젖이었다. 그래서 심각한 비타민의 결핌을 가져왔고, 때문에 30살이 되면 거의 늙은이 수준이 되었고 수명도 60을 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차를 보내 보았는데, 의외로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 그들에 차는 맛없는 식품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티벳인들에게 차가 없어서는 않되는 식품이 되어 버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중국의 수나라는 중원을 통일하고 자신을 얻자 그간 시달림을 받았던 북방 기마족 고구려를 상대로 611년-614년까지 100만명 이상의 군대까지 동원하여 4차례나 정벌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들의 기동성 앞에 실패로 나라까지 망하고 말았고, 다음 중원의 영웅 이세민에 의해 당나라가 세워지고 중원의 패자가 된 다음 다시 고구려에 대한 진격의 나팔을 분 것이 645년이다.
헌데 이세민은 공격에 앞서 치밀한 준비 작업을 벌린다. 바로 641년 문성공주를 티벳에 시집을 보내 혹시 야기될지 모르는 티벳의 후방 공격을 사전에 막았다. 하지만 포석에는 더 깊은 속내가 있었다. 말을 얻기 위한 공작 정치였다. 바로 차(茶)를 통해서 말이다.
문성공주는 시집갈 때 혼수품 중 다량의 차를 가지고 들어간다. 티벳 왕실이 별로 탐탁치 않게 여기자 그녀는 직접 차를 식사 때마다 양젖에 타서 먹었다. 그녀로서는 티벳 음식에 적응이 힘들어 한 짓이었는지 모르지만, 이짓은 티벳사람들어게 차를 알게 만드는 계기를 주었다.
게다가 16세의 나이로 티벳에 온 그녀는 56세까지 40년여년을 살면서 젊음을 유지했던 비결이 차에서 비롯된 것을 알게 된 티벳인들이 너도 나도 이를 따라 하게 되었다. 티벳인들에게 점차 차가 필요해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중국은 서두루지 않고 거의 공짜 수준으로 차를 공급해 주었다. 그들의 필수품이 될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분위기가 익자 본색을 드러내어 점차 찻값을 올리고, 말로 바꾸는 수순을 밟았다.
결국 작전은 성공을 거두어 중국은 대량의 말을 구할 수 있게 되었고, 비로소 중원은 북방 기마족의 침공을 견디어 낼 전투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차가 중원을 지키는 도구가 되었다는 말이다. 유명한 ‘차마고도’의 스토리가 바로 그것이다.
그 결과 중국에는 차 생산이 급격히 늘어나게 되고, 세월이 흐른 오늘날 운남성과 사천성 등에 거대한 차 생산지가 만들어져 국가 수입을 올리는 것도 이 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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