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제10편 [향당鄕黨] "생활" l
2012.07.24 16:59
논어 제10편 [향당 鄕黨]"생활" 논어를 통털어 이 향당 편만을 놓고 볼 때 공자가 얼마나 형식과
예법에 치우친 사람이었는지 불편한 의문이 일기 쉽상입니다.
특히 자본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한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있어
이런 형식과 예법은 적쟎은 가치관의 혼란을 주고 공자를 이해하는데
있어 커다란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논어와 그의 삶에서 면면히 흘러나오는 공자의 정신사를 볼 때
그는 그렇게 예법에만 치중한 고루하고 꽉막힌 도덕군자가 아니었으며
누구보다 자유와 의와 인의정신을 창조적으로 구현한 선각자였습니다.
"志於道하며 據於德하며 依於仁하며 游於藝니라"
뿐만아니라 그의 예 역시 허식에 치우친 것이 아니라 인륜의 근원이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하는 것으로 예가 통하지
않는 시대에 예를 삶의 기저로 택하고 예로써 그 중심을 잡음으로써
도에 뜻을 두고 덕을 근원으로 인에 의지하여 예로서 열어가는
인륜과 예의가 통하는 사람냄새 나는 새시대를 열고자 했습니다.
한편 이 향당편은 공자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지어진 것도 아니고
그분의 생각과 뜻보다는 의식주와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지켜보거나
귀담아 들은 이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채색된 글로 볼 수 있으며,
유자의 제자든 증자의 제자든 공자 사후 종통을 이어가려는 사람들과
논어를 주로 편집한 이들의 주관적 견해가 들어있다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향당 鄕黨이라 함은 공자가 사신 마을을 뜻하기 보다
공자가 가족과 함께 거처하는 집안을 뜻한다고도 볼 수 있으며,
사람들은 대게 겉으로는 잘하면서도 속으로 문란한 경우가 많은데
이 향당鄕黨 편을 통해서 공자가 얼마 자신에게 가혹하리만큼
철저했으며, 수신修身을 통해서 천하를 화평케하려는 마음가짐과
동시에 그의 겉사람과 속사람의 면면을 헤아릴 수 있게 됩니다.
"廐焚이어늘 子退朝曰 傷人乎아 不問馬
구분이어늘 자퇴조왈 상인호아 불문마
마구간에 불이 났다. 공자가 조정에서 퇴근하여
'사람이 다쳤는가?' 묻고 말馬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1. 孔子於鄕黨에 恂恂如也 似不能言者 其在宗廟朝廷 便便言 唯謹爾
조정에 계실 때에는 거침 없고 분명히 말씀하시되 삼가함이 있으셨다. 때에는 온순한듯 하였다. 임금이 있으면 공경하는 중에도 위의가 있었다. 조심하였다. 내빈과 읍할 때에는 손을 조심스럽게 올리셨으며, 옷이 가지런하였다. 빨리 걸어가실 때에는 새의 날개와 같았다. 손님이 물러가면 반드시 "내빈은 뒤를 볼아보지 않았나이다." 하였다. 문 가운데에 서지 않으며, 가실 때에는 문지방을 밟지 않았다. 임 금의 자리를 지나갈 때에는 얼굴색이 변하였으며, 걸음이 주춤거리고, 말은 제대로 못하는 듯이 하였다. 옷자락을 잡고 당에 올라갈 때는 몸을 구부리며, 숨을 죽여 숨쉬지 않는 것 같이 하였다. 나올 때 한층계를 내려 가서는 얼굴빛을 풀어 즐거운듯하였다. 계단을 내려가서는 종종걸음으로 새가 날개를 펴듯이 하였으며, 자리에 돌아와서는 태도가 공경하였다. 규를 올릴 때는 읍을 하는 높이로 하였고, 내릴 때는 남에게 물건을 주는 높이로 하였으며, 얼굴빛은 변하였으며, 발은 공손히 하여 발끝을 땅에 끌며 지나갔다. 임금에게 예물을 드릴 때에는 온화한 얼굴표정을 지었으며, 사적으로 뵐 때에는 화락한 기색을하였다. 평복을 만들지 않았다. 더울 때는 가는 갈포와 굵은 갈포로 만든 홑옷을 반드시 겉에 입었다. 검은 옷에는 염소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입고, 흰 옷 에는 사슴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입으며, 누런 옷에는 여우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입었다. 평상시에 입는 갖옷은 길고 오른쪽 소매는 짧게 했다. 반드시 잘 때는 잠옷을 입었는데 길이가 몸길이의 한 배 반이었다. 여우와 담비의 두터운 털옷을 입고 지냈다. 상복을 벗고 난 후에는 무슨 패옥이나 다 찼다. 조회나 제사에 입는것이 아니면 치마는 반드시 줄여서 꿰매었다. 검은 염소 갖옷에 검정 관을 쓰고는 조문하지 않았다. 초하루에는 반드시 조복을 입고 조회에 나가셨다. 재계할 때에는 음식을 바꾸었으며, 거처할 때에도 반드시 자리를 옮겼다. 밥이 쉰 것과 생선이 상하고 고기가 부패한 것을 먹지 않았으며, 색깔이 나쁜 것을 먹지 않았으며, 냄새가 나쁜 것을 먹지 않았으며, 익히지 않은 것을 먹지 않았으며, 제철에 나지 않은 것을 먹지 않았다. 반듯하게 자르지 않으면 먹지 않았으며, 간이 맞지 않으면 먹지 않았다. 고기가 아무리 많아도 밥보다 더 많이 먹지 않으며, 술은 일정한 양이 없으나 흐트러지지는 않았다. 주점에서 산 술과 포는 먹지 않았다. 생강을 끊이지 않고 먹되 많이 먹지는 않았다. 나라에서 제사지내고 남은 고기는 하룻밤을 넘기지 않으며, 집에서 제사 지내고 남은 고기는 삼일을 넘기지 않았으니,삼일이 지나면 상해서 먹지 못하기 때문이다. 음식을 먹을때에 는 말을 하지 않으며, 잘 때에 말하지 않았다. 거친 밥이나 나물국이라도 반드시 고시레 하고 드셨으며 이때 반드시 정성껏 재계에 임하는 하였다. 따라 나갔다. 향인이 굿을 할 때에는 조복을 입고 동쪽 섬돌에 서 있었다. 절하고 보냈다. 계강자가 약을 내리자 절하고 약을 받으며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 약을 잘 모르므로 감히 맛 볼 수 없습니다.”라고 하셨다. "사람이 다쳤는가?"하고,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시식어군에 군제어시든 선반 질에 군이 시지 동수 가조복타신 군이 명소 주면 반드시 익혀서 제사음식으로 올리고, 임금이 산짐승을 주면 반드시 길렀다. 임금을 모시고 식사할 때에 임금이 고시레를 하면 먼저 밥을 먹었다. 병이 들었을 때에 임금이 보러오면 동쪽으로 머리를 두고, 조복을 덮고 허리띠를 걸쳤다. 임금이 부르면 수레에 멍에를 얹는 것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떠나갔다. 見冕者與瞽者하시고 雖褻이나 必以貌러시다 견면자여고자하시고 수설이나 필이모러시다 迅雷風烈에 必變이러시다 신뇌풍열에 필변이러시다 않았다. 상복을 입은 사람을 보면 비록 친한 사이라도 반드시 얼굴빛을 변하였으며, 관을 쓴 사람과 장님을 보면 비록 자주 보는사이라도 반드시 예모를 갖추었다. 상복을 입은 사람에게 공경을 표하고, 호적을 짊어진 사람에게도 공경을 표했다. 성찬을 대접 받으면 반드시 얼굴빛을 변하고 일어났다. 우레가 치고 바람이 사나우면 반드시 얼굴빛을 변하였다.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빨리 말하지 않고, 친히 손가락 질 하지 않았다. "산 돌다리의 암꿩아! 때를 만났구나, 때를 만났구나." 라고 하자, 자로가 앞으로 나아가자 꿩은 세 번 냄새를 맡고 일어나 다시 날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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