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온의 편지 / 더위를 넘어서...
2012.08.04 15:40
가로수 산책길에서는 보도블록 바닥만으로도
계절의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봄이면 손을 대기도 안쓰러운 여린 꽃잎이 눈처럼 내리고,
꽃받침에서 떨어진 핏줄처럼 가녀린 흔적은 차라리 슬픔입니다.
꽃잎이 쓸려나간 후, 나무는 꽃잎을 물고 있던 받침까지 쏟아내면서
꽃잎의 흔적마저 지나가도 나면 잠시 간격을 두고
버찌 열매가 쏟아져 내리고,
그 작은 알갱이들은 내 휠체어 바퀴 틈새에 끼인 채
이러 저리 옮겨 흩어집니다.
버찌 열매가 까맣게 말라버릴 즈음이면 문득 숨이 막힐 듯 역한
밤꽃 내음과 함께 긴 밤꽃들이 허연 벌레처럼 여기저기 떨어집니다.
그런데 오늘은 때 이른 낙엽 몇 잎이 가슴에 서늘함으로 스칩니다.
세월의 흐름은 늘 허무와 쓸쓸함으로 오지만
사실은 낡아짐과 소멸만이 아닌 발전과 치유의 역사도 병행하지요.
받침을 모두 빼고도 한글을 띄엄띄엄 읽을 수밖에 없는
지적장애를 가진 심령을 매일 가르치고 훈련시킨 결과
한계처럼 보였던 상황을 넘어 이제는 아주
조금씩 받침을 읽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모두가 자기를 포기했다면서
나도 제발 포기해주기를 바라며 공부하기 싫어하는 그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노력과 기다림의 열매일 것입니다.
설교를 통해 여러 사람들과 은혜를 나누는 그 틈새,
그 사각지대에 묻혀버릴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눈높이에 맞게 양식을 먹이는 일도 보람이지요.
나는 성경의 스토리를 그가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드라마처럼 재미있게 각색을 해서 들려줍니다.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의 이야기에는 “와~진짜 용감하다!”하고 감탄을 하는가 하면, 아들을 번제로 드리기까지 순종했던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와~정말 대단하다!”라는 감탄사를, 다윗에게 기름 부으시며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이야기에는 얼른 눈물을 글썽일 때, 어린 시절부터 지적장애로 늘 언니와 비교되며 열등감으로 살아왔을 그의 삶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똑똑했다는 그의 언니는 불우한 가정환경에 비관하여 청소년 시절에 생을 마감한데 비해 비록 지적장애를 가지고 험난하게 살아왔지만 지금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은혜생활을 하는 그의 삶이 승리지요.
물은 흘러야 하고, 바람은 지나가야 하는 자연의 순환이 생성의 원리를 이루듯 세월 또한 머무르지 않기에 그리움과 기다림의 열매가 여무는가봅니다.
때 이른 낙엽이 흩어지기 시작하는 산책길이지만 아직도 밤이면 송진 내음을 포함하여 나무가 뿜어내는 산소가 한 날의 더위를 씻어줍니다. 견디기 힘든 폭염 속에서 과일이 익어가듯이 나이 들어가는 나도, 쌓여져가는 나의 연륜도, 노화라는 현상을 넘어 새로운 역사를 창출하고 생성케 하는 과정으로 익어가기를 바람해봅니다.
8월의 햇살보다 따갑게 쏟아지는 매미소리와 함께 곁에서 삶아지고 있는 구수한 감자 내음은 더위를 넘어 여름날의 운치와 행복으로 스며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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