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otal : 2507713
  • Today : 1267
  • Yesterday : 806


동광원의 영성

2012.10.07 22:46

물님 조회 수:6283

         

               동광원의 영성

                                                                                  심중식선생

1. 세 가지 보물

노자는 세 가지 보물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자비의 사랑이요 둘째는 검박儉朴한 아낌이요 셋째는 감히 앞에 나서지 않는 겸허라 했습니다. 동광원 어르신들의 특징도 또한 이것이라 할 것입니다. 동광원 어르신들은 누구에게나 자비의 사랑을 베풀며 살아오셨습니다.

 

 

삶이 곧 사랑이었습니다. 6.25당시 생명이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 있던 유화례 선교사를 돌보기 위해 온갖 어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생명을 바쳐 보호했듯이 이웃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희생적 사랑이 동광원 어르신들의 특징이었습니다. 이런 사랑 때문에 동광원 어머님들은 언제나 한없이 날쌘 사람들이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특징으로 무엇이나 소중하게 생각하여 한없이 애끼는 것입니다. 물건이나 식물이나 무엇이건 애끼고 애껴서 모으고 모은 물질과 돈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다 바쳤습니다. 이세종 어른께서는 일생 모은 재산을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다 내놓고 자신은 거지보다 누추하게 살면서도 말씀으로 풍족하여 마음은 항상 넘치는 기쁨으로 살았습니다.

 

 

 동광원 어르신들은 이같은 거룩한 청빈의 정신을 본 받아 온갖 험한 노동과 갖은 고생으로 모아온 모든 재산을 어려운 환우들과 고아들을 돌보는데 바치다가 복지법인을 만들 때 몽땅 사회에 헌납하여 광주에서 사회복지 법인 귀일원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 직원으로 머물 수 없게 되자 내 집으로 알고 살았던 복지시설을 등지고 또다시 빈손으로 남원에 돌아와 다시 척박한 땅을 일구기 시작해서 옥토로 만들어 오늘의 낙원인 동광원 수도원을 일궈 놓았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언제나 돈 일원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매사에 절약에 절약하고 애끼고 애껴 모았습니다. 그래서 모아진 재물은 다시금 몽땅 남을 위해서 모든 이를 위해서 널리 세상을 유익케 하는 일을 위해서 바치고 또 바치는 사랑의 삶이었습니다.

 

 

또 하나 특징으로 무슨 일이던지 세상에서 앞장서지 않고 언제나 뒤에서 돌봐주는 사람이요 남을 앞세우며 하나님 앞에서 숨어사는 겸허의 덕을 베풀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모든 사람들의 어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감히 앞장서려 하지 않고 언제나 뒤에서 묵묵히 돌봐주는 어머니의 뒷바라지 힘으로 아이들이 자라는 것처럼 동광원 어르신들의 내세우지 않고 보이지 않는 숨은 사랑은 이처럼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 굳센 자비와 만물을 한없이 아끼고 아끼는 절약의 지혜 속에서 이뤄지는 자기 비움과 겸허의 사랑이었습니다.

 

이런 세계를 모르고서 세상 사람들은 너무 소극적이요 은둔적이라 하거나 또는 너무 구차하다 지적 할 수도 있지만 멸망과 죽음으로 치닫는 현대문명사회를 구원할 방법은 이같은 자비와 검약과 겸비함이 아니면 무슨 길이 있을까 싶습니다.

 

 

노자는 자기의 보물이 자비와 검약과 겸비함이라 했지만 사도 바울에게 보물이 무엇인지 물어본다면 아마 사랑과 믿음과 소망이라 하지 않을까요? 만물을 지어내시고 살리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곧 자비의 은총이요 구원의 힘이요 생명의 소망입니다. 천지를 만드신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요 만물을 지켜주시고 살리시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특히 어둠과 죄악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당신의 독생자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사랑이 우리에게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이 세상의 구세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고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는 자비와 사랑의 주님이셨습니다. 그런 사랑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낮은 땅에 오셨을 뿐 아니라 더욱이 말구유에서 태어나실 만큼 가장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만유의 주님이신 당신께서는 만물을 아끼시고 모든 영혼을 섬기시는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항상 가난하고 앓는 이들의 친구가 되시고 남은 빵부스러기들을 모아 애끼는 검약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공중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 천국을 사는 사람에게 이 세상에 대한 집착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위에서 주시는 영광으로 넘치는 기쁨과 만족 때문에 세상적인 것에 대한 집착이나 염려가 일체 사라지고 항상 말씀의 기쁨으로 사는 것이 맑은 가난이라는 청빈이라 봅니다. 그래서 사랑의 청빈이란 집착이 아니라 애낌일 뿐입니다. 옷이나 신발이나 다 헤지도록 애끼고 애끼는 심정은 집착이 아니라 사랑 때문입니다. 종이 한 장 아끼는 것도 집착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아끼는 것입니다. 쌀 한 톨 아끼는 것도 사랑 때문에 아끼는 것입니다. 쌀 한 톨이 나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만물들의 애통과 하나님의 자비가 합해졌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목자의 마음이 사랑의 마음이요 곧 애끼는 마음입니다. 천지 만물을 애끼고 모든 영혼을 사랑하는 이런 마음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요 그리스도의 믿음입니다. 이런 사랑과 믿음만이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믿음과 성령의 소망 이것이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심오한 지혜요 자비의 은총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청빈의 길을 갈 수 있고 그리스도의 이런 믿음 때문에 우리는 순결의 길을 갈 수 있고 성령의 소망 때문에 우리는 순명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동광원은 청빈과 순결과 순명이라는 이런 수도덕목을 일생 실천하며 사는 곳입니다.

 

 

청빈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사랑에 대한 응답이요 순결은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한 구원과 믿음에 대한 응답이며 순명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한 응답인 것입니다. 청빈은 우리 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욕심이 사라지는 것이며 순결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악이 사라지는 것이며 순명은 성령님을 믿고 죽음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이처럼 욕심이 없어지고 죄악이 없어지고 사망이 없어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가 없어지는 것을 믿음이라 합니다.

 

 

믿음은 상대가 아닌 절대의 세계입니다. 절대의 세계를 동양에서는 무라고 합니다. 무란 없다는 뜻인데 무엇이 없는가 하면 욕심이 없고 죄악이 없고 죽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무무라고 합니다.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우주도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계시는 태초의 순수의 세계가 절대의 세계요 무라는 것입니다. 없는 것이 없고 있는 것이 있는 세계입니다. 그런 있다 없다를 초월한 세계를 무라고 합니다.

 

 

결국 무라는 말에는 두가지를 알아야 된다는 뜻이 있습니다. ‘있이 없는’ 세계와 ‘없이 있는’ 세계입니다.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없어지는 세계인 현상계의 무와 없는 것 같지만 없이하려야 없이할 수 없는 실재계의 무를 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합니다. 제행무상이란 ‘있이 없는’ 세계요 제법무아는 ‘없이 있는’ 세계입니다. 이 두 가지를 깨달으면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자유와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동양에서는 이 두 가지를 심心과 성性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즉심시불卽心是佛, 마음을 깨치면 곧 부처라 합니다. 마음이란 없이하려야 없이할 수 없는 순수 절대의 세계를 말합니다. 그리고 견성성불見性成佛, 자기의 성품을 보고 부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성품은 끝없이 발전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소질은 한없이 발전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순수한 마음의 세계는 사랑의 세계요 소질을 발전시켜가는 것은 진리의 세계입니다. 사랑의 세계는 그대로 온전한 세계요 완성된 세계이지만 진리의 세계는 영원한 미완의 세계입니다. 이 우주는 그대로 온전한 세계이지만 동시에 끝없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인생도 그대로 온전한 사랑의 세계이지만 또한 끝없이 발전해야만 되는 미완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이미 온전히 구원을 받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또한 구원을 향하여, 온전한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계속 달려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모순된 두 세계가 하나로 합쳐진 세계가 생명의 세계요 영생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우리는 이미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또한 구원을 이루기 위해 계속해서 청빈과 순결과 순명의 길을 쉬지 않고 힘써 올라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