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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신나는 일 없을까?” -박완규

2012.10.08 12:31

물님 조회 수:3072

“뭐 화끈한 일이나, 하다가, 뭐 신나는 일 없을까?”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런지 나이를 먹어도 좀처럼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다. 매일 똑같이 굴러가는 하루. 그 하루가 지루해 늘 무언가 색다른 일탈을 꿈꾼다. 누구는 내 나이쯤에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는데, 누구는 이렇게, 이 나이에, 일탈을 꿈꾼다.

 

얼마 전, 방송국에 다니는 친구가 이랬다. “세상 뭐 있어? 재밌게 살자구.” 맞다. 재밌게 살자. 그래서 어제. 옷을 홀딱 벗고 수영을 했다. 노을빛 붉게 물든 시월의 가을 바다에서.

 

엥? 하시겠지만, 오후에 작은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서 수영을 했다. 팬티라도 입지, 하시겠지만 그것까지 벗었다. 여자도 없는데 뭐. 글구 나이가 드니 보여줄 것도 없구. 큭.

 

옷을 훌훌 벗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한참을 들어간다. 수심이 깊다. 하긴. 육지에서 꽤 멀리 나왔으니 깊을 수밖에. 물은 생각보다 차지 않았다. 호수 같은 바다 위로 뉘엿뉘엿 석양이 지고, 서늘한 저녁 바람이 분다. 물새 한 마리 끼룩 날고.

 

아! 좋다.
내 몸에 걸친 것 모두 벗으니 이렇게 좋은 것을.

 

 

“…/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 선생님의 유고시 ‘옛날의 그 집’ 마지막 부분이다. 나도 어제 그랬다. 모두 벗으니 이렇게 편안한 것을. 더 이상 감출 것도 없으니 이렇게 홀가분한 것을.

 

 

한참 동안 누드인 채로 수영을 하고 있으니 배 위에서 걱정 반에 호기심 반으로 나를 지켜보던 후배가 물었다.

 

“형! 좋아?”
“그래 좋아!”

 

주춤하던 후배가 옷을 벗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연이어 선배도 뛰어들었다. 우리는, 석양빛에 붉게 물든 바다 위를 그렇게 헤엄치고 다녔다. 깊어가는 가을. 시월의 바다에서 누드로 수영하는 기분이란. 그것은 또 다른 일탈이었다.

 

나란히 헤엄을 치면서 후배에게 물었다.

 

“좋아?”
“행님! 겁나게 좋습니다.”

 

 

 

 

 

 

 

 

 

 

 

 

 

 

 

 

 

 

   나의 책상서랍 안에는 작은 희망목록이 있다. 어느 것은 항목이 지워지고, 어느 것은 항목이 새로 추가 된다. 체면 때문에, 능력 때문에 아직은 하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은 것을 적은 목록이다. 조금은 엉뚱하기도 한.

 

 

 

 

 

 

 

엊그제 선글라스를 끼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선보였던 강남스타일도 그 항목 중에 하나였다.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일이라 혼자 픽 웃으며 써 놓았는데 결국 이루어졌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꿈이란 희망이란 이런가보다.

 

이 목록들은 크고 거창한 것이 아니다. 어느 것은 꼭 해야 하는 것도 있지만, 희망의 대부분은 반드시 이루고야 말겠다는 엄청난 각오를 가진 것이 아니다. 그저 내가 살다가 이것 정도는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 정도를 적어 놓은 목록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

 

 

색소폰을 배워 달밤에 지인들을 모아 작은 연주회를 가져보는 것. 지리산 천왕봉에서 아내와 아침 일출을 바라보는 것. 20km 하프마라톤을 완주하는 것. 좋은 시 100개를 암송하는 것. 3천명 이상의 청중 앞에서 1시간 동안 인생에 대해 강의해 보는 것.

 

바다에서 옷을 홀라당 벗고 수영하는 것. 죽기 전까지 20권의 저서를 출간하는 것. 내가 소장한 수석으로 개인 전시회를 가져보는 것. 두 아들과 함께 6박 7일간 백두대간을 종주해 보는 것.

 

내 목숨 같은 친구 세 명을 갖는 것. 아내의 경제활동을 그만 두게 하는 것. 날마다 아침메일을 100만 명의 사람에게 보내는 것. 광장에서 깡통 하나 앞에 두고 통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러보는 것.

 

만나는 사람마다 밥값 정도는 내가 내는 것. 골프에서 언더파를 쳐보는 것. 장미꽃 100송이를 사서 소중한 사람에게 한 송이씩 나눠주는 것. 일간지 발행인이 되는 것. 청바지를 입고 출근하는 것.

 

종교를 갖는 것. 아내를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2박 3일간 여행을 다녀오는 것. 신발이 필요한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 옆에 살며시 새 신발을 놔 주는 것. 내 직원들 모두 사장으로 만들어 주는 것.

 

낚시로 60cm 이상 되는 고기를 잡아 손맛을 느껴보는 것. 번지점프를 해 보는 것. 크리스마스 이브에 빵모자를 쓰고 군고구마 장사를 해보는 것. 붓글씨를 배워 휘호를 남기는 것. 마술로 주위사람들을 웃겨 보는 것……. 

 

 

그 외에도 재미있는 것들이 참 많다. 그렇다고 여기에 모두 나열할 수는 없다. 숨기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아! 어제 새로이 하나가 추가 됐다. 올 성탄절에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서 홀딱 벗고 겨울 수영을 하는 것. 어제 후배와 선배와 약속한 내용이다.

 

이 목록들에는 우선순위가 없다. 이루면 다행이고, 이루지 못하더라도 내가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렇지만 거의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다. 조금만 용기를 가지면 내가 할 수 있는 것들만 적어 놓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빛이 참 곱다. 누군가 그랬다. 세상의 크고 작은 변화는 한 치의 생각 차이에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따라서 내가 바뀌고 세상이 바뀐다. 이 말도 멋있지. 내 안의 행복은 내 안에 있는 욕심을 조금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것이라고.

 

맞다.
행복도 불행도, 사랑도 미움도
한 치의 내 생각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고운 하루되시길.
꾸뻑.

 


동부매일 대표
박 완 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