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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보광재 옛길불재
눈이불 덮은 길위에 얘깃거리 수북
▲ 보광재는 옛날 완주 구이-임실 신덕 주민들이 땔감을 지고 무를 이고 전주로 넘나들던 고개다. 지금은 전주사람들이 사시사철 올라 다니는 대표적인 등산코스중 하나다.
먼 길을 걸어왔네/또 먼 길을 걸어가야 하네/내 세상의 길을 걸었네
한적한 들길을 걷기도 했고/붉은 산 황톳길을 걷기도 했네/가쁜 숨 몰아쉬며/가파른 산길을 오르기도 했고/시원한 바람의 길을 걷기도 했고/모랫바람 몰아치는/사막의 길을 걷기도 했었네
사람들은 모두/먼 길을 쉼 없이 가네
사람들은 그 길 위에서/사랑을 하고/희망을 노래하고 이별을 하고/끝없는 길을 걸어가네
삶의 머나 먼 길을/오늘도 걸어가네 - 정안면의 시<먼 길을 가네>이다.
전주 서서학동 흑석골 보광재. 완주 구이에서 전주로 넘는 보광재는 정안면 시인이 노래한 그런 인생길처럼 ‘먼 길’은 아니다. 흑석골 버스종점에서 정상까지 3㎞ 남짓한 고갯길이다. 임실 신덕에서 완주 구이로 오가는 불재까지 더하면 총 13㎞ 정도 된다. 전주시내권에서는 보기 드문 산골짜기로 약간 깊은 계곡이다. 소나무,참나무,회화나무 등 활엽수림대가 잘 형성돼 있다. 여울에는 청정수에서만 사는 갈겨니 때가 무리지어 서식하고 있다. 산책과 산행, 피서지로 철마다 찾는 전주사람들의 단골지역이다.
“전에 보광재 계곡안에 집 3채가 있었다. 25년전 큰 물난리로 신발이 떠내려가 맨발로 이곳으로 이사왔다.”흑석노인정에서 만남 김정례(80·청솔아파트)씨는 "막내 어디갔느냐" 이삿짐을 챙기며 소리치자, 맏이가 “엄마가 업고 있잖아” 했단다. 김씨는 이렇게 정신이 없었다며 홍수난 당시를 회상했다.
흑석골에서 5분 정도 가면 흑석교가 반긴다. 데크로 만든 다리다. 계곡물에 발을 담근 갈대들이 찬바람에 몸을 으시시 떨었다. 얼음 바위 밑으로 계곡물이 겨울 노래를 부른다. 쪼울∼ 쪼울∼. 약수터를 지나면 흑석정(黑石亭),송하진 전주시장의 편액이다. 정자 옆에 체육시설이 눈모자를 쓰고 근육을 자랑하고 있다. 서핑롤링머신,로라맛사지머신,트리플트위스트머신……. 혀 꼬부라진 이름표가 달려있다. 흑석교처럼 데크로 만든 견우교,직녀교를 지나면 두 번째가 약수가 악수를 청했다. 겨울, 갈수기라 그런지 물이 없어 약수터도 목말라 했다.
귀한 손님이 오는 길-화객도
보광재 계곡에는 백제 무왕 때 창건한 보광사 절터가 있다. 통일신라시대 때 보광사는 전국 10대 사찰중 하나였다. 현재 완주 구이면 평촌리 상보와 하보마을 중간지점에 절터가 남아있다. 이곳 보광사라는 절이 있으므로 인해 구이면 상, 하보마을이 생겼다. 보광사를 보좌하기 위해 상,하보 마을 아래 화원, 광곡 쪽의 상척,하척마을이 형성됐다고 한다. 이런 역사를 품고 있는 보광재 계곡은 옛날 전주에서 구이로, 구이에서 전주로 넘나들던 중요 교통로였다. 지금으로 치면 전주 팔달로 격이다. 삼남대로처럼 이름난 길은 아니었지만 봇짐을 메고, 지게를 지고 다녔던 옛길이다. 서민들의 애환이 절절이 녹아있는 곳이다. 한때에는 귀한 손님이 오는 길이라는 뜻으로 화객도(華客道)라 부를 정도로 주요 관문이었다고도 한다. 보광재 정상은 해발 280m-보통 작은 산 높이다. 멀리서 물끄러미 바라보면 호랑이 한 마리가 웅크린 형상이다. 날씨가 엄청나게 좋은 날에는 저 멀리 익산·군산·새만금 일원까지 아울러 보이는 풍경을 자아낸다.
보광재 정상에서 만난 김철규(55)씨. 그는 흑석골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다. “어릴 적 어른들이 말구르마를 끌고 흑석골 인근 바위산에서 구들장 돌을 캐서 실어 나를 정도로 보광재 길은 넓었다.”며 “지금 정자수퍼자리는 주막이 있었던 곳으로 사람들이 북적였다.”고 그는 과거를 되뇌였다. “옛날 평촌사람들이 땔감을 지게에 지고 전주 싸전 아래 나무를 팔았고 보광재를 넘어 구이로 갔는데 산적들이 나타나기도 했다.”평화동에 사는 최일규(72)씨의 산적 이야기는 보광재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정말 산적들이 많았어요?” 애완견를 데리고 마실 나온 50대 여인이 귀를 세웠다. “푸성귀나 땔감, 쌀 등을 전주에서 팔고 올 땐 꼭 사람들이 몇몇 모여서 재를 넘었다.”며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솔개는 날고 물고기는 뛰고
보광재를 넘으면 구이 평촌. 바위계곡 10여 미터 길이다. 눈 쌓인 바위길은 위험했다. 종종걸음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행히 걸침목 계단이 미끄럼을 막아주었다. 길가엔 산죽이, 숲 속엔 간벌 나무가 눈이불을 덮고 있다. 다리를 건너자 85마리 젖소를 키우는 외양간을 만났다. 주인은 없고 원유를 수송하는 운전기사만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철쭉농장, 돈마니 농장 지나면 보광노인정.이의창(75·원평촌)씨는 점심땐데 밥은 먹었느냐며 묻는다. “18살 때부터 하루에 두 번씩 가을엔 무를 지고, 겨울엔 땔감을 지고 보광재를 넘었다. 그땐 힘든지도 모르고 친구들과 형들하고 다녔다.” 곁에 있던 어르신들도 한마디씩 했다. “저기에 있는 경복사 절터는 가봤느냐”, “창암 이삼만 묘는 큰 다리 밑을 돌아가면 나온다.” 등등……
10분쯤 갔을까. 왼쪽에 제각이 보였다.보광서원이라는 현액을 달은 연안 이씨 제각- 정문과 측문를 지키고 있는 수백 년 묵은 은행나무와 소나무가 무척 예뻤다. 하척마을 구이노인요양원을 끼고 우측으로 돌면 ‘창암 이삼만선생 묘역 100m⇒’ 큼지막한 안내판이 보인다. 굴다리를 지나 쭉 가면 밭 건너편에 비석 두 개 있는 묘가 창암이 잠든 곳이다. 앞의 것은 강암 송성용이, 뒤에 것은 추사 김정희가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전주 출생한 창암(1770-1847)은 추사 김정희(1786-1856),눌인 조광진(1772-1845)과 함께 조선후기 3대 명필이다.
1770년 전주 자만동(현 교동)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창암은 가정이 넉넉지 못했다. 종이 살 형편이 못돼 나뭇가지로 글씨를 쓰고, 삼베 조각에 글씨를 쓰곤 했다. 하루에 1천 자씩을 쓰다 보니 벼루가 닳아 구멍이 났다고 한다. 그는 서른이 넘어 김해 김씨 광택의 따님을 맞아 혼례를 올렸다. 규환이라는 본명이 있는데도 배움이 늦어 만학(晩學), 친구와 사귐이 늦어 만교(晩交),혼인이 늦어져 만혼(晩婚)이라 하여 삼만(三晩)이라고 이름을 지어 널리 불리게 되었다. 한벽당 뒤쪽 옥류동으로 분가하여 살면서 인근 바위에 솔개는 날고 물고기는 뛴다는 뜻의 연비어약(연비어약)글씨를 바위에 새겼는데 군경묘지 길을 내면서 흙 속에 파묻혀 버렸다고 한다. 그 탁본은 예술회관 현관에 걸려 있다.
추사와의 사연은 이렇다. 김정희가 제주 귀양을 가는 도중 창암의 명성을 듣고 전라감영에서 뵙기를 청했다. 이때 추사는 55세였고 창암은 71세였다. 추사가 청암에게 글씨를 청하자, 강벽조유백(江碧鳥逾白),산청화욕연(山靑花欲然),금춘간우과(今春看又過),하일시귀년(何日是歸年) 이라는 두보가 난에 몰려 고향을 떠나 전전하며 망향의 정을 읊은 절구 한 수를 써 추사의 심경을 헤아려 줬다. 추사는 다음날 남원에서 묶으며 자신의 처량한 귀양 신세를 한 마리 늙은 고양이에 빗대어 ‘모질도 작어대방도중’라는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이 바로 추사의 유명한 ‘모질도’이다. 그림 제목 중의 대방(帶方)은 남원의 옛이름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모질도는 한국동란 와중에 소실돼 현존하지 않고 있다. 다만, 흑백 사진으로만 전해져 추사의 또 다른 일면이 사진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
정각사에 핀 빨간 눈꽃
태봉초등학교를 거쳐 광곡교을 건너 좌측길은 상관행이고 우측길은 신덕 불재행이다. 야트막한 고개를 넘고 깊은 계곡을 끼고 돌아서면 ‘OK목장’사슴요리 전문 음식점이다. 구이면 소재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점이다. 다섯 평 남짓한 닭장엔 토종닭들이 앙감질이다. 눈밭에 서서 길손을 보고도 놀란 기색이 없다. 이방인 취급을 하지 않는다. 서린은빛마을(노인휴양시설)에서는 굴착기가 콧구멍에서 검은 연기를 뿜으며 길내기에 열심이다. 20 굽이 불재의 허리춤엔 구이 정각사가 자리 잡고 있다. 사찰 초입부터 눈을 치워 놔 오르기에 힘이 덜 부쳤다. 낯선 길손을 보고 무심한 절간 개만 짖어댔다. 싸락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산새들이 더욱 요란스러웠다. 감나무마다 주렁주렁 달려있던 까치밥 홍시가 이따금 길에 뚝뚝 떨어졌다. 통째로 지는 동백꽃처럼. 빨간 눈꽃이다. 하얀 눈 도화지에 빨간 감으로 화심(花心)을 그린 것 같다. 가쁜 가슴에 쉼이 됐다.
산자락 덮고 잔들/산이겠느냐./산그늘 지고 사늘/산이겠느냐.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아침마다 우짖던 산까치도 이제는/간데없고/저녁마다 문살 긁던 다람쥐도 지금은/온데없다.
길 끝나 산에 들어섰기로/그들은 또 어디 갔단 말이냐.
어제는 온종일 진눈깨비 뿌리더니/오늘은 하루 종일 내리는 폭설.
빈 하늘 빈 가지엔/홍시 하나 떨 뿐인데/어제는 온종일 난을 치고/오늘은 하루 종일 물소릴 들었다.
산이 산인들 또/어쩌겠느냐.
오세영 시인의 <겨울 노래>다. 진눈깨비가 뿌리던 날, 정각사엔 빈 가지가 없었다. 나무마다 바람과 눈과 새들이 낙엽의 빈자릴 채웠다. 동백도 이제 막 꽃망울을 키우고 있었다. “정각사는 사시사철 꽃이 핀다. 봄엔 벚꽃과 매화가, 여름엔 산나리, 가을엔 단풍, 겨울엔 동백과 눈꽃이 핀다.”
벽송 주지 스님(62)은 사찰의 경관을 자랑했다. 38세 때 불교에 입문한 벽송은 2008년 전통사찰 심사에서 탈락한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 화재로 금강경이 소실됐고 목판도 도난당해 전통사찰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고 한탄했다.
고래 뿔처럼 생긴 경각산
보드득 보드득. 햇살에 녹아서인지 눈이 물껑했다. 경각산 불재 정상. ‘불재 참숯’ 커다란 간판이 시선을 끌었다. 경각산(鯨角山)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숫고래뿔 산이다. 고래의 뿔처럼 생긴 산이라는 뜻일진대, 고래는 뿔이 없으니 상상하기 쉽지않다. `불뫼'라는 해석도 있다. `불'이 `부리'에서 축음해 유래했고, `부리'는 산과 높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어서 경각산이 `큰 산'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해석에서 경각산의 불재는 큰 고개라는 뜻이다. 다만 고래 `경'자를 붙인 것은 이름을 좋게 짓기 위해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동여지도 등 고지도를 보면 경각산은 ‘정각산’(正覺山:올바른 깨달음을 얻는 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경각산 서쪽 아래에는 정각사라는 사찰이 있어서 정확한 산 이름은 정각산이 맞는 걸까.
“눈이 오고 남풍이 불어 패러글라이딩을 못했다. 대신 눈길 산행을 즐겼다.” 양석호 전주 에이스클럽 회장(48)은 비행을 못해 공치는 주말을 아쉬워했다. “경각산 활공장 옆에 풍력발전기를 설치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걱정이다. 이곳은 서울, 대전,광주, 울산 등 전국에서 글라이딩하려고 오는 유명한 활공장이다. 주말에만 100여 명이 오고 한 달이면 4천여 명의 동호인들이 북적이는 명소다. 이용자 중 외지인들이 40%가량 차지한다. 한 달이면 2억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공해 하나 없는 녹색 레저산업인데, 도와주질 못할망정 고춧가루를 뿌려선 되겠느냐?”라며 양회장은 얼굴을 붉혔다. “만약 사업추진을 강행하면 전국에 있는 패러 동호인들을 동원해 실력 저지할 계획이다.”고 덧붙였다.
장시진 씨(34·진안)는 의사다. 주말이면 의사인 남편과 함께 경각산에서 패러를 즐긴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지만 경각산이 이렇게 좋은 줄 몰랐다. 비행하며 조망하는 모악산, 고덕산의 풍광 또한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땅을 탈출한 자유로움, 중력을 벗어나 새가 된 기쁨을 맛보고 있다.”며 그녀는 패러글라이딩을 애찬했다. “이참에 한번 입문해 보세요”권하기까지 했다.
몸과 맘이 하나돼 ‘뫔’
나는 태어나 본 적이 없소/태초의 하늘을 떠돌다가 오늘은/이승의 우물물로 고여 있다 해도/나는 한번도 태어나 본 적이 없소/ 흘러가는 시냇물/ 파도치는 바다에서/나는 나로 춤을 추고 있었을 뿐
나는 나이를 먹어 본 적이 없소/나는 어떤 추억도 없이/여기에서 여기로 흐르고 있을 뿐/꽃샘바람과 함께 흩날리는/봄눈과 함께 나는/하늘에서 땅으로/땅에서 하나의 흐름으로 돌아가고/있을 뿐
나는 어느 하늘 어느 땅에서도/머물러 본 적이 없소/나는 이전에 누구를 만난 적도 없소/한 점의 후회도 없이 /나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나로/지금 흘러가고 있을 뿐 - 불재에서 '뫔 살리기 학교'와 더불어 '진달래교회'를 열어 둔 이병창 목사 시인의 <물>이다.
‘뫔’,잘못 쓰인 것 같은 이 글자는 그가 만든 것이다. “인간의 고통은 몸과 마음이 따로 있을 때 생기는 것이다. 몸과 맘 하나로 살자 해서 뫔이다.” 특허등록된 말 ‘뫔’의 뜻이다. 뫔에 닿기 위해 그가 제시하는 것이 애니어그램. “개는 친하자고 꼬리를 흔드는데, 꼬리 치켜들었으니 싸우자는 신호로 알고 덤비는 것이 고양이다. 개와 고양이처럼 그렇게 서로 코드가 맞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새로 지어 보자는 것이다.” 이 목사 말대로 ‘새로운 관계’를 지어보자. 사람과 사람들은 가슴 속 찌꺼기를 걷어내고, 사람과 자연은 순리 회복을 위해- 옛길을 걸으며 그 길을 생각한다.
기획취재팀=하대성·추성수 기자@ha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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