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장학회 김지태, 친일 부정축재자 맞나? - 정치길
2012.10.27 06:26
@ 산에는 노루 사슴도 있지만 늑대와 승냥이도 있습니다.
한국의 현대사 속에서 늑대와 승냥이처럼 권력의 이빨로 인간 사냥을 하던
박정희라는 이름이 지금도 연일 대선판을 달구고 있는 것을 보면 착잡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김지태씨 미망인의 눈물이 어찌 한사람만의 눈물일 수 있겠습니까.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은 김근태, 의문사한 장준하 등 제목소리를 내던 사람들은 모두 군화발로 짓이겨지던
그 세월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오늘의 현실을 보면서 참으로 역사청산이 없는 우리 역사가 서럽습니다.
옹졸한 꼼수로 역사를 왜곡하고 진실을 오도하는 무리들에게 역사적 심판의 철퇴가 내려지는 그 날을
기다립니다.
물
박근혜 후보와 새누리당은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부일장학회 설립자 고 김지태 씨를 친일행위자이며 부패기업인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박 후보는 쿠데타 군부로부터 7년형을 받았다는 점을 내세워 부정축재자로, 새누리당은 김지태 씨의 동양척식(동척) 근무 경력 등을 내세워 친일인사로 규정했다.
박정희 맥 이은 새누리당, 누가 친일인데?
"한번 죽음으로써 나라(일제)에 충성하겠다." 1939년 박정희가 일제의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쓴 혈서 내용이다. 이것이 <만주일보>에 기사화면서 그의 소원대로 일제 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런 박정희의 맥을 잇는 정당이 친일로 몰아세웠다면 김지태 씨는 박정희보다 더한 친일행위자이어야 한다.
20세부터 5년 동안 동척 부산지사에 근무한 것과 일제시대 성공한 조선인 기업인이었다는 점 이외에 김지태 씨에게서 특별한 친일행각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가 살아온 과정을 더듬어 보면 박 후보와 새누리당의 주장과 크게 다르다. 젊은 시절 독립운동에 관심이 많은 청년이었고, 해방이 된 뒤에는 성공한 기업인으로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려 했던 인물이다.
그의 조부는 육영제(부산진초등학교 전신)을 설립하고 통도사 신도회장을 지내는 등 상당한 재력가였고, 아버지 김경중은 일본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이었다. 그가 경제의 흐름을 빨리 간파하고 지기(紙器)사업과 주철사업에 손을 댄 것도 개화된 집안 분위기가 한몫했을 것으로 보인다.
<동척 부산지사로 사용됐던 건물>
반일사상과 사회의식 높았던 청년 김지태
당시 동척 입사는 부산제2상업학교(부산상고)를 나온 김지태로서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상업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되면 동척 등 일제가 설립한 회사에 우선적으로 취업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는 동척에서 말단 사원으로 5년 근무했다. 이를 두고 친일파로 몰아세운다면 일제시대를 살았던 사람 모두를 친일파라고 말해야 한다.
새누리당이 김지태 씨를 친일로 몰아세우는 근거 중 하나가 동척으로부터 땅 2만평을 불하받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땅 불하는 친일행각의 대가가 아니었다. 성실하게 근무하다가 폐결핵으로 사직할 수밖에 없었던 그에 대한 인간적인 배려였다. 퇴직 후 직접 농사를 짓고 벼를 수확해 분할 상환금을 모두 갚았다.
청년 김지태는 친일이 아닌 반일운동가였다. 만주 독립군 간부였던 큰 외삼촌의 영향을 받아 1927년에 설립돼 전국 각지에 지부를 두는 등 회원수가 4만명에 달했던 독립운동 단체 신간회의 말단 조직인 소년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부산상고 졸업 직후에는 조선청년총동맹 부산지부에서 간부직을 맡았다.
출처: 김승 著 '1920년대 경남지역 청년단체 조직과 활동'
조선청년총동맹은 1924년 결성된 단체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청년단체를 규합해 혁명적 민족운동을 기치로 내세우며 1920년대 청년운동을 대변했다. 김승이 저술한 ‘1920년대 경남지역 청년단체의 조직과 활동’에 의하면 1920년대 중반 부산에는 4개의 청년단체가 있었으며, 이 단체가 조선청년총동맹에 흡수된 직후 김지태가 이곳에서 활동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때 반일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부산경찰서에 구속되기도 했다. 동척에 근무하던 1927년 현재 부산 동구 좌천동 정공단 옆에 ‘부산정묘학교’라는 야간학교를 설립하고 청소년들을 모아 밤 시간을 이용해 신학문을 가르쳤다.
소신 있는 정치인이자 언론인, 사회환원 고심한 기업인
그가 손댔던 지기사업과 주철사업은 중일전쟁과 2차대전 특수까지 겹치며 큰 성공을 거뒀다. 해방 무렵 30대 중반의 김지태는 이미 전국적인 재력가가 돼 있었다. 삼화고무와 조선견직 등을 인수해 사업을 키우며 정계에도 진출했다. 1950년 무소속으로 제2대 민의원을, 1954년에는 자유당 소속으로 제3대 민의원을 지냈다.
<고 김지태>
그는 소신 있는 정치인이자 언론인이었다. 1956년 12월 이승만 정권의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다가 해당 행위자로 찍혀 자유당으로부터 제명당하기도 했다. 1958년 10월 조봉암 선생에게 간첩혐의를 씌워 사형을 선고하자 조 선생을 비호하는 글(‘존엄과 비판’)을 직접 써 부산일보에 게재하기도 했다. ‘조봉암 사형’은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학살이었다. 2011년 대법원은 조 선생의 간첩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4.19혁명을 이끌어낸 것도 그였다.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자 그의 지시에 의해 부산일보가 대서특필했고, 이후의 상황은 부산MBC 사장실에서 실황중계를 하듯 보도했다.
“박정희 거사 자금 500만환 요구, 불발되자 앙심 품어”
박정희와는 ‘악연’이었다. 5.16 쿠데타 직후 부정축재 환수금 명복으로 5억4000만환을 거둬간 군부는 1962년 4월 다시 김지태를 구속하고 부일장학회와 부산문화방송, 한국문화방송 등을 강제 헌납 받았다.
유족들과 ‘자명(김지태의 호)기념사업회’ 측은 박정희와 악연의 발단을 이렇게 설명한다. 5.16 직전 박정희는 부산일보 주필이었던 친구 황용주를 통해 김지태 측에 거사자금 500만환을 요구한다. 어찌된 영문인지 황용주는 박정희에게 이를 전달하지 않았다. 거사 직전 박정희가 부산일보 사장실로 김지태를 찾아 왔지만 바쁜 용무로 인해 기다리는 박정희에게 인사도 건네지 못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앙심을 품었을 거라는 게 유족들의 주장이다.
<박정희와 당시 부산일보 주필 황용주>
박정희는 애당초 ‘정치군인’이었다. 그가 거사를 결심한 건 1952년부터다. 1952년 10월 일본 육사 선배인 이종찬 장군을 찾아가서 ‘군사혁명을 해야 한다’고 종용하기도 했다. 사회혼란과 민주당의 무능 때문에 5.16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는 박정희의 주장은 변명에 불과하다.
1962년 4월 초 서독에서 귀중 중 간경화로 일본 병원에 입원 중이던 김지태 씨의 집에 중정요원들이 들이닥친다. 집에 있던 다이아몬드 반지와 카메라가 밀수된 것이라며 김지태의 부인 송혜영 씨을 연행헀다. 김지태 씨가 귀국해 구속되자 부인은 풀려났다.
군부는 부일장학회와 문화방송 등을 헌납하라고 강요했다. 김지태 씨는 포기각서를 쓰되 석방된 뒤 이행하겠다고 하자, 군부는 양도서류를 디밀며 더욱 압박했다. 실제로 포기각서는 5.25일 작성됐지만 강제헌납은 6월 20일 이행(기부승락서)돼 유족들의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 준다.
자진헌납 증거라는 김지태 자서전
박 후보와 새누리당이 부일장학회와 MBC가 자진헌납된 것이라는 증거라고 주장하는 게 있다. 1976년 출판된 김지태의 자서전 ‘나의 이력서’에서 부일장학회가 언급된 문구다.
“나의 모처럼의 이 부일장학회가 영구히 계속되지 못하고 중도에서 좌절되기는 했으나, 그 뒤를 이은 5.16장학회가 62년도의 미불금이던 1,166,000원을 지급해주고 학비의 보조・학술연구・해외유학・문화보급 등 4개 분야로 장학금의 지급분야를 개편해서 계속 이를 지급하고 있어서 지극히 다행한일로 생각하고 있다. 내가 운영하던 부일장학회와 공익재단의 문화사업이 5.16장학회의 공영제운영으로 넘어가서 당초에 기약했고 목적했던 사회봉사라는 이상이 확대되어 가면서 영원할 것임으로 나는 이와 같은 운영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또 만족스레 생각한다.” <나의 이력서 p190>
하지만 유족들과 ‘자명기념사업회’ 측은 당시 중정의 압력에 의해 내용을 바꿔 재출간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책 표지 뒤에 있던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김지태 씨의 휘호와 부일장학회가 언급된 부분을 문제삼아 ‘권불십년’은 ‘성업백년(盛業百年)’으로 바꿨으며, 자진헌납을 암시하는 내용이 중정에 의해 추가됐다고 설명한다.
중정이 강요한 문구, 그래도 ‘좌절’이란 단어 넣은 김지태
자서전 문구를 살펴보면 뭔가 어색하다. 부일장학회가 “영구히 계속되지 못하고 중도에서 좌절 됐다”고 표현하고 있다. 자진헌납과 ‘좌절’은 의미상 배척되는 단어다. 자신의 뜻에 따라 기부한 것이라면 그런 표현을 쓸 리 없다. 김지태 씨는 장학회를 빼앗긴 뒤에도 5.16장학회가 약속된 장학금을 지급하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같다. 미불금을 지급하고 장학사업을 이어가고 있는 것에 안도하는 모습이니 말이다.
그런데도 박 후보 캠프의 이정현 공보단장은 22일 기자들을 불러 이 내용을 보여주며 김지태의 부일장학회가 강탈된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좌절’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뭔지 모르나 보다.
김지태의 행적을 살펴보면 뚜렷한 친일행각은 발견되지 않는다.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다는 주장도 신빙성이 약하다. 되레 젊은 시절 반일운동과 야학을 운영하는 등 사회참여 의식이 높았던 부분과, 신념이 확고한 정치인이자 정론직필을 실천한 언론인의 면모가 돋보인다.
“다른 사람 아버지도 존중할 줄 알아야”
박 후보와 새누리당이 시대의 한 획을 그었던 인물의 명예에 먹칠을 하고 있다. 김지태 씨의 부인과 아들 김영철 씨는 이렇게 심정을 토로했다.
“박 후보가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졸도할 뻔 했다. 기가 막히고 황당하다.”
“박 후보는 자신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끔찍이도 아끼고 존경하는데, 다른 사람의 아버지에 대해서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http://blog.daum.net/espoir/8126788 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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