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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또 다른 얼굴 - 고독

2013.03.05 00:57

물님 조회 수:6630

언어의 또 다른 얼굴 - 고독

창 2:8-

로마황제가 현자라고 이름 난 랍비의 집에 방문해 이렇게 질문했다.

'아담이 잠들었을 때 하나님이 갈비를 뽑아 여자를 만든 것은 아담의 갈비를 도둑질한 행위가 아니냐?' 고. 그 때 랍비의 딸이 황제에게 부탁이 있다고 말했다. 황제는 어떤 부탁이든지 말해보라고 했다.

'우리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그 도둑은 빈 금고를 가져가고 금 항아리를 놓고 갔습니다. 그 도둑을 잡아주세요' 딸의 말을 들은 황제는 껄껄 웃으면서 ‘그런 도둑이라면 나에게도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딸은 '바로 그런 일이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신 일과 같습니다. 남자는 갈비하나를 통해서 또 다른 나를 통째로 얻게 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는 여인의 창조에서 완성되었고 인류의 기원역시 최초의 어머니이자 모든 나라의 어머니인 하와에서 시작되었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다. 하와는 뱀의 유혹에 대하여 심사숙고 끝에 영원한 생명이 보장된 에덴을 포기하고 아담과 함께 어렵고 험한 방식의 삶을 선택하였다. 생명의 창조와 자유의지의 실현, 인간이 인간이 되기 위한 성숙의 위험한 여정을 선택했던 하와 때문에 남자는 세상의 역사를 만들고 여자는 지혜의 역사를 만들었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에덴은 모든 생명들이 함께 평화를 누리는 이상세계의 모델이다. 그곳은 고난도 욕망도 없는 무욕의 땅이다. 그럼에도 아담은 고독했다. 그것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대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언어를 주셨다. 아담은 그 언어를 가지고 모든 존재들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렇지만 정작 에덴동산에서 자신의 마음과 감정을 말로써 나눌 수 있는 대상은 없었다.

 

인간의 의식은 그 사람이 가진 언어의 깊이와 비례한다. 사유가 깊은 만큼 언어의 인식과 표현은 깊어진다. 그러기에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고독이 필요하고 그 고독을 나눌 사람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어를 다루는 사람들, 특히 시인들이 고독해지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언어의 또 다른 얼굴은 고독이다.고독해 질수록 인간은 그 고독을 함께 나눌 대상을 찾게 된다. 애벌레와 나비는 같은 공간에 있어도 대화가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같은 공간에 함께 있다 해도 함께 있지 못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는 법이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언어의 선물은 인간에게 만 허락되었다. 그러나 언어란 그것을 함께 나누고 통할 수 있는 상대가 있을 때 의미가 있다.

 

 

둘이 산다는 건

두 배의 고독을 만나는 일이요

신을 믿는다는 건

신의 고독을 나누어 갖는 일이요

질병보다도 더 깊고

질긴 병을 앓는 일이요.

사람으로 살아가는 외로움을

죽은 뒤에도 포기하지 않는 일이요

아니, 내 속에 악마들을 키우는 일이요.

-사람의 아들 -

 

하나님은 고독해진 아담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아담을 깊은 잠에 빠지게 한 뒤 갈빗대를 뽑아내어 여자를 만드셨다. 이때부터 아담은 남자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남자와 여자로 인간이 분리되게 되었다. 히브리어로 갈비뼈 첼라(tzela)인데 어떤 구조물의 부분 또는 중요한 일부를 의미한다. 그 부분이 없으면 전체가 무너지는 중요한 요소를 뜻한다. 남자와 여자란 피차 반쪽의 존재이다. 심장을 비롯한 중요 장기를 보호하는 갈비뼈는 반쪽으로 나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양성의 통합의식이 있어야 한다. 분리된 남자의 눈(관점), 여자의 눈이 통합 될 때 진정한 인간의 성숙이 일어나게 된다. 그 때까지 자신의 반쪽을 찾고자 하는 방황과 외로움에 시달리게 된다. 몸으로 비유한다면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만나듯 우뇌의 여성과 좌뇌의 남성이 간뇌에서 만나야 뫔을 이룰 수 있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 하와는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남자는 망설이지 않고 따먹었다. 이 양면성을 생각해 보자. 삶의 지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법이다.

 

하나님은 하와를 창조할 때 아담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아담 역시 여자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아담은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지 못했다. 아담의 상상력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존재가 ‘하와’였다는 것을 나중에야 실물을 보고 알게 되었을 뿐이다. 아담은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라'고 감탄했을 뿐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의지대로 창조되었듯이 여자 역시 하나님의 의지대로 창조되었다. 하나님 앞에서 남자와 여자는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일 뿐 그 어떤 차별도 없다.

아담이 하와를 바라보면서 외쳤던 찬탄은 자기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했고 무엇이 필요했었던 가를 알아차린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그 결과 아담은 자신의 언어를 나눌 동반자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인간의 중대한 문제 중의 하나는 자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해 무감각하고 무지하다는 사실이다. 당신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당황해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안타깝기만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아는 것을 소명이라고 한다. 그 소명을 바로 알 때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의 길을 스스로 걸어갈 수 있다. 자신의 길을 스스로 걸어가는 사람은 자유인이다. 자유인은 자립과 공생할 수 있고 건강하고 상호 보완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상대방의 가치와 능력을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고 건강한 대화를 생산적으로 할 수 있다. 인간의 우정과 사랑은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사람들은 지하실에 있는 이야기도 함께 나눌 수 있는 만남을 그리워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조차 믿지 못하기 때문에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탈무드는 이렇게 말한다. "여자가 창조되기 전 남자는 혼자였다. 따라서 남자는 앞서 깨달은 외로움 때문에 배우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더욱 소중히 여긴다."

 

굶주림을 아는 사람은 밥의 고마움을 뼈저리게 안다. 외로움을 아는 사람은 인간의 살 냄새가 얼마나 고맙고 아름다운 것인지 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 심중의 언어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아가 하늘의 언어인 말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도반들을 만나는 것은 천운이 아닐 수 없다. 말씀을 안다는 것은 사전적 낱말 풀이가 아니라 그 분의 가슴을 느끼고 아는 일이다. 선한 자나 악한 자 가리지 않고 햇빛과 비를 주시는 그 분의 마음을 나누어 갖는 일이다. 언어의 또 다른 얼굴이 고독이라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언어를 주신 것은 그 분의 고독을 나누어 갖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위대함이란 하늘의 언어, 하늘의 고독을 체득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언어를 온 몸으로 체득하시고 기화시킨 예수의 가슴을 조금이라도 공감할 수 있는 '나'가 되어 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