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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사람('13.2.17)

2013.03.05 07:11

구인회 조회 수:4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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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한 형제가 아니냐   

 

 

     여기 불붙는 동네 불재, 시간의 텃밭에서 영혼의 씨앗을 뿌리고 저마다

     뿌린 씨앗의 모양대로 열매 맺기 까지 불지피러 다니는 그리움의 형제들

     외모도 성품도 영혼의 색깔도 관현악의 소리처럼 각양각색이지만 보면

     볼수록 서로가 닮고 또 닮아가는 것은 모두가 다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요 태고적부터 천생연분이기 때문일 겁니다.

     하느님의 형상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는

     것인가? 오늘날 존재와 사람에 대하여 목석처럼 굳어진 마음 저편,

    모두가 하느님처럼 존귀함으로 오롯이 하느님의 형상을 되살려 낸

     물님의 말씀을 옮깁니다.

 

     우리는 우주의 달동네인 이 지구에 보내주신 뜻을 알고 하느님 쓰시기

     참 좋은 잘 익은 열매가 되어 돌아가기로 손가락 걸고 왔다.

    영적 진보를 이루기 위해서 여기 왔는데 그만 길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이천년전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비밀을 알려 주셨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방법이랄까 그 비결을 마태복음 25장을 통해서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5장이 복음의 핵심이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복음의 핵심은 여기 있는 내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다.” 천국 가는 사람들은 자기 이름에

     연연해하지 않는 사람이다. 공로에 연연해하지 않는 사람이 가는 곳이

     천국이다. 하느님을 모신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라도 자기 공로에 연연해

     하지 않고 뭔가 선을 향한 사람들이었다.

     오늘날 교회가 이 복음을 잃어버렸다.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모시고

     산다는 것이 뭔지를 잃어버렸다. 무엇을 붙잡고 어떤 가치로 살아야

     하는지 놓쳐버렸다. 예수님이 칭찬하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도 이름

     없는 사람이다. 비유로 하신 말씀이니까 이름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무명씨가 있었다고 하는 정도로 표현하셨다.

     차의 명인이자 차로 저명한 모리거사란 분이 있다.

    그 분의 차에 관한 글을 여러차레 홈피에 올리기도 했는데, 한 번은

     그분에게 모리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의 답변이 걸작이다. ‘모모란 동네에 묻혀 사는 사람이다.’

     뜻으로 모리거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경전을 보건데 예수님을 받아드린 사람들 중에 니고데모 말고는 이름이

     없다. 분명히 말 하건데 자기 이름에 대해서 집착하고 공로에 연연해하는

     사람들은 천국 가는 명단에 없다.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정권을 잡으면 누가 실세가

     될지 쌈박질을 할 정도였다. 제자들의 어머니들, 치마부대까지 동원해서

     싸웠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받아드리면 나를 받아드리는 것이고 나를 받아드리면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드리는 것이다.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높은 자라는 것이 일관되게 나오는 예수님의

     사상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과 인간이 영혼으로 공명하는 사랑의 주파수

     거기에 하느님 나라가 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나에게 해 준 것이다인류의

     역사는 예수님의 이 선언에도 불구하고 강자와 약자 부자와 가난한자,

    고용주와 피고용주로 나눠져 있고, 무시당하는 약자의 입장에 서고 약자의

     입장을 옹호하면 삐딱한 사람으로 색안경을 쓰고 보는 게 현실이다.

     인류는 한 형제이고 자매이다. 한 식구들이 어우러져 사는 것이다.

    예수님이 인류에게 남겨준 값진 유산은 바로 이 정신이다.

    내 마음가짐과 삶의 중심을 어디에다 두고 살아야 할까?

    바로 이 형제 의식이다. 인간은 다 같이 평등한 존재이다.

    나는 에니어그램이 수피의 유산인 줄 알고 여러나라 수피를 만난 적이 있다

     이슬람하면 라마단, 성지순례, 기도시간이 되면 확 엎드려 기도를 하는

     것이 연상된다. 한번은 터키에 수련을 한 적이 있는데 오히려

     이슬람 사람들에게 배운 바 있다. 우리가 아는 이슬람 교도들은 하루에  

    다섯번 메카를 향하여 기도한다. 그러나 수피는 하루에 다섯번 드리는

     그 기도를 거부한다 인류가 다 형제 자매인데 숨 쉴 때마다 기도를 해야지

     사랑보다도 더 한 율법은 아니올시다라고 한다.

    이 원리를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

    그들의 예배시간이 세 시간인데 한 겨울에도 예배 끝날 시간이 되면

     땀으로 철떡철떡한 옷을 입은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바 있다. 그 때 받은

    영향으로  찬송 부를 때만이라도 정신을 집중해서 열심히 부르려고 한다.

    예배는 의식의 집중이고 가슴의 태도이다. 예배시간이 다가기 전에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평등하다. 그 평등은 물리적인 평등이 아니고

     사랑의 관계를 통한 성숙된 평등이다. 그 베이스에서 출발해야 한다.

    인간은 육체의 단계에서 본성의 단계, 영성의 단계, 신성의 단계가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식은 육체의 단계에서 본성과 지성의 단계, 얼을

     자각하는 영성의 단계, 더 나아가서 신성의 단계가 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하나 됨에 대한 가르침은 계속된다. 인간의 의식은

     하나님과 하나 되는 신적단계까지 나가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하시고 그 증거가 예수그리스도다. 예수님만 하느님의 아들인가.

    우리는 그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씨앗을 발아시켜서 키워가고 있는 사람은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내 안에 하나님의 신성이 있듯이 그 사람에게도 같은 신성이 있다.

    나를 가장 존귀하게 대하듯이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게도 존귀하게

     대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은 각기 다른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하느님의 표현이 인간이다. 하느님의 형상으로 빚어주신 인간을 보는

     가르침을 예수님이 주신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요성과 진리중의 진리는

   “나는 누구인가? 살아있는 동안에 내 삶을 잘 살고 나누면서 살아야 하는데

     있다. 내가 존귀하게 살고 모든 사람이 존귀하게 사는 것이 그 실체다.

     모든 인간은 인간이 처한 상황과 관계없이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예수님의 정신이 복음으로 전해 내려왔다. 예배당 다니고,

    어느 교단, 정통이라느니 그런 것이 아니고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그 사람

     을 존중하는 것이 복음의 정신이다. 높은 자리, 가진 자리에서 베푸는

     시혜자의 입장이 아니다. 내가 타인을 위한다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생각인가? 그리스도를 보는 눈이 열려질 때 평등한 관계가 성장한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46절에 만일 너희가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한다

     면 그것이 무슨 덕이 되겠느냐? 세리들도 그 정도는 하지 않느냐?

    만일 너희가 너희 이웃들과만 가까이 지낸다면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무엇이겠느냐? 이방인들도 그렇게는 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만 교제하고,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끼리만

     교제한다. 교회가 구제하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어떤 때는 이와 같은

     행위가 가증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구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불쌍한 사람이니까 도와준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웃에 대한 관점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이웃은 단지

     내 옆에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 있는 신성의 관점에서

     이웃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런 눈이 뜨이지 않은 사람에게 이웃은 존재

     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시혜자의 입장은 도리어 신성에 대한

     모독이 되기도 한다. 봉사란 무엇인가? 돈을 주는 것도 있겠지만 길을

     묻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는 것도 봉사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 모르게 선을 베푸는 그런 모습을 마태복음 25장에서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경전에서 말하고 계신 최후의 심판의 기준은 무엇일까?

   “너희가 여기 있는 내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곧 내게 해 준 것이다” 이 복음을 통해서

     양의 길을 가는 사람과 염소의 길을 가는 사람이 무엇인지 돌이켜보고

     비추어야 될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저기 저 넘어진 사람이 남이 아니라 그게 나이고,

    저기 저 배고프고 굶주린 사람이 남이 아니라 나이다.  

    저기 저 모욕과 수치를 당한 사람이 남이 아니라 바로 나요,

    저기 저 자살한 사람이 남이 아니라 나라는 자각의 관계 속에서

     나와 남이 다르지 않고 이웃이 나고 내가 이웃이라는 내 몸 같이

     깨우침과 하느님이 그토록 사랑하셨던 사람에 대한 존엄이 되살아난다.

 

   “오호라 하늘의 이름으로 말한다. 우리는 한 형제가 아니냐?”

 

 

                                             's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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