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온의 편지 / 오징어 배꼽
2013.03.08 16:55
오징어를 그리라고 하면 먼저 작은 삼각으로 머리를 그리고,
그 아래로 몸통인 큰 삼각형,
그 아래로는 다리 열 개를 길게 그리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오징어의 머리로 알고 있었던 작은 삼각형은
꼬리지느러미요,
다리로 알고 있었던 열 갈래 부분은 먹이를 움켜 먹는
손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훨씬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오징어의 이미지를 그렇게 거꾸로 각인시켜놓은 채 그리기도 하고,
탈을 만들어 쓰기도 하면서 여전히 죄 없는 오징어를
물구나무를 세워놓고 지내고 있으니
오징어에게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배꼽으로 알고 있던 까만 혹으로 달려있는 부분이 사실은
입과 눈이라는 걸 알고 난 후에 우리가 알고 있다는 지식이 때로는
얼마나 얄팍한 오만이요, 어리석음인가를 생각했습니다.
포유동물이 아닌 어류인 오징어에게 배꼽이 있을 리 없건만
어릴 적 오징어를 구워서 버릴 것 하나 없이 야무지게 발라먹던 시절에
어른들이 알려주었던 배꼽은 달 속에 옥토끼를 그렸던 우화처럼
사실 여부를 떠나 애교로 남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매한 고정관념이 될 때 예수님 시대나
갈릴레오 갈릴리오 시대의 기득권 세력처럼
무서운 죽임의 세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고정관념의 대상은 오징어뿐만이 아니라
구원받은 믿음의 무리를 일컫는 ‘교회(에클레시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당인 건물이나 의식들이 상징으로 굳어져 교회,
그 자체로 통하고 있음을 봅니다.
장애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요.
비록 장애를 가졌지만 열심히 살고 있는 씩씩한 이들에게
불쑥 연민의 표정으로 다가와 혀를 끌끌 차거나 한숨을 쉬면서
한없이 불쌍한 사람 취급을 하는 것은
오히려 열심히 일어서고 있는 사람을,
아니, 이미 일어선 사람을 다시 바닥으로 끌어내려
비참하게 만드는 편견의 폭력일 수도 있습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판단이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오만이요, 착각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당신이 전부가 아니듯
당신이 알고 있는 나도 나의 전부가 아니지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외로움이 때로
인간 내면의 원초적 고독이 되어
우리는 홀로 서서 모태에서부터 나를 지으시고
나를 아시는 분(시139:13)을 향하게 되는 가 봅니다.
기존의 상식이나 고정관념으로부터 해방되어 겸허하게 끊임없이
사실의 세계를 깨달아가는 살아있는 의식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께 새 노래(149:1)을 드릴 수 있으며
세상의 모든 것들을 살리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죽은 듯이 굳어있던 모든 것들이 꿈틀거리며 살아나는 이 계절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안에 사는 우리에게서부터
먼저 의식의 부활이 일어나야겠습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난다는 일은 생각처럼 만만치가 않아
사실의 세계에서 깨달은 것들을 인식하고 난 후에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태엽 인형의 태엽처럼 서서히 풀어져 자신도 모르게
원위치로 되돌아와 있곤 하지요.
지금도 오징어를 그리라면 어떻게 그릴 줄을 몰라
여전히 작은 삼각형부터 그릴 것 같습니다.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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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레루야!
글 처음부터 끝까지 놀랍습니다
머리부터 그리는날도 반듯이
오게하십니다
God bless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