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 부터의 치유
2009.03.14 06:28
인간은 누구나 과거가 주는 상처와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상처를 감추고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삶이 왜곡되고 성장이 멈추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상처가 자기 자각과 하나님을 만나는 징검돌이 되기도 한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과거로부터 깨어나는 것이다. 애벌레가 고치에서 깨어 나와 나비가 되면 그의 과거는 완전히 사라지고 깨끗한 존재가 되는 것처럼 인간 역시 그렇게 깨어 나와야 한다. 예수께서 거듭남의 비밀을 강조하신 것 역시 깨어나야 깨끗해지기 때문이다. 성서는 하나님을 본 자는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 말씀 역시 하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만나기 이전의 ‘나’로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과거를 사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현재의 사람들로 살아야 한다. 바로 이런 삶이 구원 받은 자들의 삶이다. 이 현재의 삶을 사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문제가 과거의 상처와 아픔이다.
습관적인 종교 생활이 아니라 영성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집중하는 태도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 내 모습 이대로의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지금의 비참한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 과거의 상처가 나를 계속해서 괴롭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이란 과거의 되풀이 되는 연장 속에서 살아 온 비참한 나를 발견하는 일이다. 그래서 깨달음의 순간에는 환희만 있는 것이 아니라 허망하기도 하고 억울하고 비참하기도 한 것이다. 최근에 에니어그램 수련 하신 분이 보내 온 편지를 소개한다.
“ 안녕하세요. ^^ 입니다.
잘 지내시지요? 수련을 다녀와서 무엇에 홀린 듯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는 멍한 상태에 빠져 있었어요. 조금씩 정신을 차리면서 보고 싶지 않아 외면하고 싶던 내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착하다는 말이 나를 대변해 왔습니다. 모든 일에 나를 살피기보다는 어쩌면 착하기 위해 나를 내던졌던 지난날 이었던 것 같아요. ‘착하게 살지 마라’라는 말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어요. 사실은 착한 게 아니라 참으로 멍청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수련 중에 올라오는 울음을 끅끅 참으며 테이프를 감듯 하소연을 반복하는 나를 보며 갑자기 수치심이 올라왔어요. 참 당황스러운 감정이었습니다. 난 늘 희생자였고 늘 참는 자였고 늘 착한 이였습니다. 그런데 왜 나는 이런 내가 수치스러울까? 하구요. 며칠 동안 혼란 속에서 헤매였 던 것도 아마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이었나봅니다. 난 결코 희생자도 참는 자도 착한 이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허상을 쫒느라 스스로를 난도질 하고 있었을 뿐.
이제까지 나의 삶은 여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착하기 위해 피 흘렸던 지난날을 원망과 상처로 끌어안고 난 늘 어제를 오늘로 살고 있었습니다. 날려버려도 하나도 아깝지 않을 세월들을 왜 그렇게 움켜쥐고 살아왔는지. 오늘 쥐고 있던 손을 폈습니다. 나의 허상이 모두 날아갑니다. 축복의 눈물이 나를 맞아줍니다. 지금 나는 여기에 있습니다. 40년을 살아오면서 어쩌면 처음으로 지금 여기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안의 나' 정말 지금 이 순간 내안의 나가 있습니다. 여기는 참으로 편안하네요.”
누가 나를 편안하지 못하게 했는가?. 그것은 바로 나였다. 누구 때문에 내가 고통 받고 사는 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과거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마가복음서 (1:40-45)에
는 치유 받은 나병환자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 환자는 건강한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면 안 된다는 율법을 무시하고 예수께 살려 달라고 간청했다. 나병은 모든 사람에게 거부당하고 외면당하게 하는 병이다. 모든 인간관계를 단절 시키게 하는 천형이다. 어떤 나환자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절망적인 상태에 처하게 되면 과거의 눈으로 현재의 나를 보면서 현재의 나를 인정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바로 거기에서 정신분열과 망상이 시작된다. 인생이 꿈이라는 말도 현재를 살지 못하고 망상을 현실로 아는 세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무기력과 고립으로 절망상태에 있던 나병환자는 그러한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예수께 다가가 애원했다.(40절)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자신의 자리를 떨치고 일어서서 세상과 종교와 자기 자신 안에 새겨진 율법보다 자신의 생명을 우선시하는 발걸음을 옮기는 자는 복이 있다. 그런 사람은 고침을 받게 되어 있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와 환경을 탓하면서 절망의 자리에 그대로 머물고 있는 사람은 이미 그 존재 자체가 절망이다. 사람들은 현재의 나를 인정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에고에 싸인 의식으로는 여기의 세상을 볼 수도 없거니와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인다고 말했다고 해서 자신이 치유되는 것은 더욱 아니라는 사실이다. 문제는 누군가로부터 온전히 조건 없이 받아들여지는 사랑의 수용만이 인간을 치유하고 온전히 세울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갑자기 중증 장애인이 된 분들과 생활하면서 인간이 영육간에 재활 한다는 것은 환자의 상태와 상관 없이 현재의 나를 자신이 인정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필자는 뼈저리게 확인 할 수 있었다. 나병환자의 경우처럼 예수에 대한 환자의 신뢰와 그 환자를 향한 예수의 무한한 수용의 측은지심이 환자를 깨끗하게 할 수 있었다.
환자를 바라본 예수의 측은한 마음을 말하는 단어를 직역하면 ‘내장이 요동치다’라는 뜻이다. 내장 중에서도 소장은 어머니의 장기이다. 무조건적인 수용과 상처 입은 감정의 자리이다. 인간의 배꼽은 태아 시절에 소장과 연결되었던 흔적이다. 예수는 영적인 탯줄이 이어진 관계로써 그 환자의 아픔을 느끼셨다. 그리고 손을 갖다 대고 어루만지셨다. 예나 지금이나 누가 나병환자의 진물 흐르는 몸을 만질 수 있겠는가. 나의 가장 감추고 싶고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을 만지시는 예수의 손길을 그는 거부하지 않고 온전히 감사함으로 받아들였다. 예수는 그를 향하여 권능에 찬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1:41)” 과거의 상처와 수치심이 올라올 때 우리는 그것들과 싸워서는 안 된다.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것들과 어찌 싸워서 이길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할 일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나를 맡기고 그분의 손길이 닿도록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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